기적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 -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이름 부르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막막한 소리로 거듭 울어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마리 날아와
시치미 떼고 옆 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가문 밤에는 잠꼬대 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바오밥의 추억
왜 그렇게도 매일 외울 것이 많았던지
밤샘의 현기증에 시달리던 나이,
큰 바오밥 나무를 세 개나 그려
소혹성 몇 번인가를 가득 채워버린
그 그림 무서워하며 헐벗은 날을 살았지.
그 후에 가시에도 많이 찔리고
허방에도 많이 빠지고
녹슨 못을 잘못 밟아 피 흘리면서
창피한 듯 눈치껏 피해만 다녔지.
나는 그렇게 살아냈어. 너는?
하느님이 제일 처음 심었다는 나무,
뿌리가 하늘을 향해 물구나무선 채로
늙은 의사가 되어서야 지쳐서 만난
아프리카 초원의 크고 못난 다리,
안을 수도 없어 어루만지기만 했는데
밀가루 같은 추억이 주위에 흩어졌어.
밥이 되는 열매와 야채가 되는 잎,
나이테도 아예 없애고 둥치만 커지는
주위로는 대여섯 개 문이 닫혀 있는데
안내원은 더위에 덮인 목소리를 뽑으며
이것이 아프리카의 수장 樹葬 이라고 했지.
큰 바오밥을 만나니 무섭기보다는 목이 메인다.
둥치를 뚫고 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에 구멍을 만들어
시테를 그 속에 밀어넣고 판막이로 입구를 못질해 막으면,
열대의 초원에 우뚝 선 바오밥은 시체를 잠재워준다.
못질한 막이도 어느새 구별되지 않는다.
천 년 이상 이렇게 사람을 안아주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체가 한 나무에서 살다가 나무가 되었을까
나무가 되어버린 인간들은
남은 살과 피로 열매를 만들며
추억을 수액에 섞어 마신다.
인간이 나무 속에 들어가는 동네,
잡초까지 이상하게 물구나무선다.
둥치의 긴 척추가 우리들의 날같이
귀환의 낮과 밤을 비추어준다.
축복처럼 아프게 행복하다.
시인 마종기는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뒤,
<조용한 개선> <두번째 겨울> <평균율>
<변경의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의 맨살> 등의 시집을 냈다.
그 외 <마종기 시전집>,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등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고원문학상, 혜산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에는
시인의 고독한 영혼이 호명하는 하나의 커다란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은 현재의 세계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는데,
과거에서 미래로 서로 꼬리를 무는 시간과 현세의 사물들과
현재에는 없는 사라진 것들의 낌새와 흔적까지 다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세상은 시인이 호명하는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해 그 세상과 시인의 고독한 목소리를 만난다.
오, 외로움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는, 그리움을 통해 그리움을 깨우는 목소리여!
마종기 시인의 말
지난번 시집 발간 이후, 만 4년간 쓰고 발표한 시들을 여기에 묶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시집을 만든 것은 내게 처음이지만, 아마도 의사 생활에서 은퇴한 후 내 게으름을 은폐하고 싶었던 무의식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모아놓은 시들을 다시 읽어보니 비틀거리고 억지스러운 시가 많은 것 같아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아쉬운 것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이런 것이 내게 오히려 자극이 되어 하찮은 것도 다시 유심히 볼 수 있는 나머지 날들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2006년 늦여름, 마종기
해설
너무 먼 이쪽
권혁웅
마종기의 시는 “~구나” 와 “~하고 싶다” 사이에서 하염없이 울린다. 마종기 시의 여러 문장들은 이 말들로 대표되는 두 가지 문형 文型 의 변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탄과 소망을 표시하는 이 두 술어는, 마종기 시의 인칭과 시제, 격 格, 서법 등을 두루 관통하는 말이다. 두 술어를 좌표로 삼아 나와 당신( ‘당신’ 은 2인칭이면서 3인칭이어서 아내와 부모와 벗을 모두 아우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과 우리가 자리를 잡고, 청춘의 들끓던 한 시절과, 그 시절과 결별한 채 늙어가는 지금의 삶과, 진정한 만남이 이뤄질 미래의 삶(그러나 진정한 만남은 ‘지금’ 가능한 일은 아니어서, 성취는 지연되고 그래서 미래의 몫으로 남는다)이 나뉘고, 주격(主格)과 속격(屬格), 여격(與格)과 대격(對格) 등의 여러 관계(당신과의 수많은 주고받음이 여러 관계를 낳는다)가 파생되고, 고백과 탄식과 희망과 청원 등의 여러 정조가 생겨난다.
두 술어는 마종기 시의 시공간이 어떤 결락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나는 너무 멀리, 너무 오래 흘러왔다. 행복한 한때는 아득하고 그리운 곳은 너무 멀고 그리고 나는 이미 늙었다. 세월은 내게서 많은 이들을 떼어놓았고 심지어 삶과 죽음의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놓기까지 했다. 때문에 마종기 시의 주체는 늘 ‘너무 먼 이쪽’ 에 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가 비탄과 절망에 침윤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멀리 있음이 마종기의 시에 놀라운 호소력을 부여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떤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 중심과의 거리로 제 방황의 자리를 측정한다. 너무 먼 저쪽이 이쪽의 좌표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한 시절은 돌이키지 않는 지금의 원형이 되고, 그래서 마침내 불행은 행복의 전제가 된다. 그것은 아주 여린 강인함이다. 한 줌의 온기로 한 겨울을 견뎌내는 이의 간절함이 거기에 있다.
‘간절하다’ 는 말은 물론 온당한 비평적 언사가 아니다. 진정성이나 열망과 같은 말로 한 시인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정서적 온도를 측정할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종기의 시를 설명하는 말로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다. 다만 이 간절함이 사랑하는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이의 내면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삶은 그를 바깥으로 밀어냈으나 그는 안쪽을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해도 좋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나 그곳이 돌아갈 수 없는 중심임을 알았다. 비유적으로 말해보자. 지구가 태양의 중심을 도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중력이 끌어당길 수도 없고 놓아버릴 수도 없는 경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태양의 인력이 공간을 왜곡하여 일련의 홈 파인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그 주어진 홈을 도는 구슬이다. 마종기의 시 역시 사랑하는 중심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중심을 영원히 이탈할 수도 없는 어떤 원환의 자리에서 씌어진다. 40여 년 동안 그의 시편들이 한결같은 테마를, 한결같은 간절함으로 노래해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여담이지만, 시인이 영구 귀국한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원환의 궤도가 놓인 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이미 대칭성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대칭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귀국은 중심으로의 귀환일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돌이키고 싶으나 돌이킬 수 없는, 귀환을 열망하지만 결콘 귀환하지 않는 탕자의 강인함이 그의 시에 있다.(이 글의 끝에서 말하겠지만, 진정한 귀환은 그 원환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은 상태로 이루어진다). 마종기의 시가 품은 간절함은 이 강인함의 다른 이름이다.
이 중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자. 그곳엔 사랑하는 나라와 고향이 있다.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의 표제 시 일부다.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거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거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거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거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뭐가 중요해?
할아버니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3부 >
이 아름다운 시의 1부에는 ‘옥저의 삼베’ 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중학교 국사 시간에 동해안의 작은 나라 옥저에 대해 배운 나는, 그날 밤 꿈에 옥저의 삼베 장수가 되어 “딴 나라의 큰 마을” 에 가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베옷’ 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환유다. 변방의 작은 나라인 조국을 떠나 큰 나라 미국에 올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역사가 나라 역사에 겹쳐졌다. 2부는 ‘乙亥年의 江’ 이란 소제목을 달았다. 1815년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최창흡의 말로 시작되는 이 얘기에서 “안 보이는 나라를 믿는 안 보이는 사람들” 은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바친 순교복자 殉敎福者 들이면서, 아득히 멀어 보이지 않는 조국을 그리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살과 피” 와 “길고 긴 슬픔” 의 땅인 조국의 현실과 그 고통스런 땅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은 시인의 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가상의 대화를 적어 내려간 3부에서, 시인의 고백은 낮고 그윽하게 울린다. 아버지의 대답을 산문으로 풀어보자. 이곳은 무서운 곳은 아니지만 어두운 곳이다. 빛이 저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2행) 사랑하는 나라를 찾아가는 여정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 곳은 가야 할 곳이다. (4행) 그렇다고 해도 자리 잡고 사는 이곳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6, 8행) 아들에게는 사는 곳이 나라지만 내게는 떠나온 곳이 나라다, 그것도 무척이나 정다운.(10행) 이곳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꼭 그만큼 쓸쓸함도 느꼈다.(12, 14행) 여기서는 죽어서도 쓸쓸하고 어두울 것이다.(16행)
그곳에는 먹고살 수 있는 아무런 터전도 없지만, 내 나라이고 내 조상의 나라다.(18, 20, 22행) 내 벗들도 거기에 있다, 설혹 그들이 나를 잊었다고 해도.(24, 26행)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28행)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사랑은 맘 붙이고 사는 어디서나 자라지만, 진정한 사랑의 삶은 그럴 수가 없다.(30행) 내게는 시가 이 어둠으 ㄹ밝히는 등불이었다.(32, 34행) 등불은 자꾸 꺼졌으나 여전히 저 먼 곳에서 거듭 빛나고 있었따. 내게는 시를 쓰는 일이 그 사랑의 나라를 거듭해서 바라보는 일이었다. (34, 36, 38, 40행)
그다음 시인은 아들의 입을 통해 또다시 고백한다. 내가 찾던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찾아야 한다. 그것을 찾기까지 내 방황은 끝나지 않을 테니까. 밤새 눈이 내렸고 나는 드디어 고국으로 길을 떠난다. 물론 이 귀국에 실제적인 의미를 덧붙일 수는 없다. 1부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 귀국은 가상의 여정( “그날 밤 꿈에 나는……” )이며 2부에서 말한 것처럼 “안 보이는 나라” 를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라는 말에서 ‘보이지 않는다’ 는 말은 이중적이다. 그 나라는 멀리 떠나왔기에 보이지 않고, 한반도라는 특정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다( 내 나라는 여전히 어둡고 캄캄하다). 그 나라는 내 조상과 모국어, 내 청춘과 사랑과 우정의 한때가 보존된 곳이기에 사랑의 나라이며, 먼 미래의 지평에 열려 있기에(내 나라는 훗날 아름다울 것이다) 사랑의 나라다. 다시 말해서, 그 나라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나라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에는 1980년대 초반 조국의 환난을 보며 느낀 시인의 고통이 곳곳에 배어 있다.
끝없이 떠다니는 모래들의 소문.(만선의 돌)
침묵이 언제부터 움직이고 있다. / 아버지의 삭은 뼈가 잠 깨어 / 내 앞길을 막아선다. (확답)
아직 실험에서 살아남은 십여 마리의 쥐가 성공한 놈아, 성공한 놈아 하면서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봄이 오고 내가 승진을 한 뒤에도 나는 실험실 쥐들의 마지막 시끄러운 기침 소리에 밤잠을 계속 설치고 있었다.(쥐에 대한 우화)
외국에 나와서 보면 더욱 힘들다. / 삿대 없이 흐르던 가나한 나라, (일상의 외국 2)
하루도 그치지 않는 총소리, / 하루도 쉬지 않는 살인. (시인의 용도 1)
외국에서 한강을 보면 언뜻 우리 세대의 피투성이 손마디로 보이는 것도 탓할 수야 없지. (한강)
(……) 고국에 돌아오면 / 아직도 서울의 공기는 수상한 냄새를 풍기고 (자유의 피)
보이지 않게 밤마다 떠나는 우리들, /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밤마다 돌아오는 우리들. (밤 노래 2)
고통의 꼽추의 시대 (그 후의 강)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는 무자비한 권력에 짓밟힌 피의 흔적들이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전화 轉化 되었다는 점, 곧 그 자신의 얼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인이 조국을 떠나 있어서 아픔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상흔을 제 몸에 새겨진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절, 그는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안에 있었다. “고통도, 사랑도, 말 못 하는 / 섭섭한 이 시대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용도2) 시쓰기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 그렇기 때문에 시를 놓을 수 없는 절실함으로 바뀌었다.
둘째는 이 고통이 세계 전체가 앓고 있는 질병의 증상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조국의 현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캄보디아, 베트남,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레바논, 시베리아, 아르헨티나, 필린, 스페인 …… 어느 곳에서나 전쟁과 학살과 기아가 끊이지 않았다. 도처에 미만한 죽음과 죽임의 현장에서 시인은 조국을 보았다. 고통의 연대 連帶, 고통의 보편성, 고통의 슬픔을 보았다. 사랑의 나라가 겪고 있는 아픔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집에 실린 시다.
적혈구와 백혈구가 서로 싸우는 광장에 나가면 온몸이 어두워진다. 싸우지 말자고 웅성대는 우리들은 피의 찌꺼기, 혹은 혈소판, 피의 찌꺼기는 작다. 피의 찌꺼기는 많다. 흘러다니는 피의 찌꺼기는 모양이 제가끔이다. 쉽게 뜨는 피의 찌꺼기는 의견이 비슷하다. 피의 찌꺼기는 아프고 억울한 상처를 아물게 한다. 많은 피의 찌꺼기가 죽고 또 죽어서 상처를 아물게 한다.
- 피의 생리학, 2부
“피의 찌꺼기” 를 고통받는 우리 자신이라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피는 죽음이며 생명이다. 피는 혈연이며 고통이다. 그런데 그 피의 찌꺼기가 모여 죽어서, “상처를 아물게 한다”. 우리는 서로 싸웠으나 서로를 고쳤다. 우리는 희생당했으나 우리 자신이 생명이었다. 우리는 한 핏줄이며 그래서 서로 아팠다. 우리는 상처받고 죽어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 이제 사랑의 나라는, 시인의 사적 체험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나아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도 생생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지극함의 체험이며, 순수한 고양의 순간이다. “뻘밭 넓은 서해안에서도 / 남해안에서도, 또 동해안에서도 / 파도들은 너나없이 모국어만 하데.” (파도의 말 1) 모국의 파도는 모국어로 치고, 이국의 파도는 이국어로 친다. 사랑의 나라가 바로 여기에, 내 말이 형상을 얻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여전히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처음 만난 파도는 두 손 내밀면서 / 반갑다, 반갑다며 몰려오더니 /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 잘 가라, 잘 가라 중얼거리며 / 나를 자꾸 멀리 밀어버리데.” (파도의 말 1) 내게로 오던 파도가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밀어버리고, “돌아서기 시작한다”. (파도의 말 2) “그 시절의 부드러운 젖가슴 닫은 채 / 떨리는 무늬 고운 한숨만으로 / 한 줄씩 긴 수평선 되어 말없이 나를 꾸짖데.” (파도의 말 1) 나는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다. 사랑의 나라는 내게 잠깐 모습을 보여주고는, 나를 바깥으로 밀쳐냈다.
돌아왔구나, 하고 친구가 말했다.
오래도록 나가서 떠돌며 살더니
이 일 저 일 털어내고 맨손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나를 잡아준다.
그런데 나는 정말 돌아온 것일까.
나 살던 동네도 모습 찾기 힘들고
알던 사람들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 귀향, 1부
앞에서 말했듯이 이 귀향에는 시간의 차원이 결합되어 있다. 시인은 살던 동네가 변했고, 지인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월이 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날은 저녁부터 밤새 비가 내렸다.
소름 끼치게 혼자 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체질인 것을 알았다.
어떻게 남보다 많이 젖지도 않고
속내의 나를 모두 보일 수 있으랴.
그날은 떠난 날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숨쉬는
신선하고 정결한 단어를 찾으려고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낚싯줄을 던졌다.
- 귀향, 2부
이 비는 내 바깥의 공간만 적신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비가 내렸다. 젖는다는 것은, 먼저 겪는다는 것이며 나중까지 겪는다는 것이다. 남보다 많이 아프고 많이 슬퍼야 한다는 것, 그게 시인의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은 탈향의 날이지만, 이상한 가역 반응에 따라, 귀향의 날로 바뀐다. 자신이 “소름 끼치게 혼자” 있어야 하는 체질이라는 있어야 하는 체질이라는 고백은, 시인에게 고국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운명이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언어( ‘言語’ 이면서 ‘言漁’ 인)를 낚기 위해서 그는 “가보지 못한 곳 을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왠지 밤잠을 설쳤을 뿐이다.
얼굴과 머리는 늙어 낙엽으로 날리지만
한 평 침대에 누운 저 꽃 잠 깨기 전에
재갈 물린 세월아, 모두 잘 가거라, 잘 가거라.
- 귀향, 3부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마음을 이곳에 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있는 저쪽과 마음을 둔 이쪽이 자리를 바꾸었다. 이 가역 반응 때문에, 시인은 고국에 있을 때에는 먼 저쪽의 몸을 생각했고, 이국에 있을 때에는 먼 이쪽의 마음을 생각했다. 삶을 한바탕 긴 꿈이라 했던가. 나는 이곳에서 이국에서의 신산한 삶에 대한 며칠간의 꿈을 꾸었을 뿐이다. 자고 나니 평생이 흘렀다고 했던거. 나는 이미 늙었으나 이 또한 긴 꿈의 시퀀스 가운데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는 시간은 / 왜 이렇게 애타게 조용할 때일까. / 왜 이렇게 높고 추운 곳만일까. (알래스카 시펀 3) 그 시간은 꿈의 시간이면서,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현실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나라와의 이 간격과 거리가 시인을 서성이게 했고 꿈꾸게 했고 시 쓰게 했다. “참 멀리도 나는 왔구나, / 산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 강물도 흙이 되어 흐르지 않는다. / …… / 여백도 지워진 이 땅 위의 밤에 / 차고 외로운 잠꼬대인가 / 창밖에서 떠는 작은 새소리, 빗소리.” (밤비) 창밖의 빗소리를 “잠꼬대” 로, “작은 새소리” 로 듣는 밤이 시인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너무 먼 이쪽’ 의 삶을 집약하는 두 가지 소리다. 시인은 꿈에서도 그리운 이곳에 대한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간적인 상거(相距)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을 멀리 떠나오면서 시인은 이후의 모든 시간을 측정하게 만드는 특정한 한 시절을 두고 왔다. 마종기의 시적 연대기에서, 그 시절은 이전과 이후를 규정하는 기원(紀元)의 역할을 했다. 실낙원 이후에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그 시절을 잃어버린 이후에 마종기 시의 내력이 적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대칭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말했다.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 시간은 언제나 불가역적인 것이어서, 진자처럼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시인에게는 시간이 겹겹이 놓인 주름이다. 과거의 어느 한때와 현재의 어느 한때가, 단 하나의 감각으로(상투적인 비유로 말하자면, 마들렌 과자 하나로) 복기된다. 그러나 적어도 마종기의 시에서, 두 개의 시간은 대조될 뿐 겹치지 않는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에서 먼저 옮긴다.
한때는 우리도 따뜻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명륜동 집에서 매일 머리 맞대고 얼간 꽁치로 저녁을 먹고, 모여 앉아 텔레비 방송극도 보고 가끔은 식후의 과자도 나누어 먹었다. 십 년이 겨우 넘은 시간 - 십 년의 폭탄은 우리를 산산이 깨뜨리고 나는 한쪽 파편이 되어 태평양 건너에서 굴러다닌다.
그렇다. 파편이라는 뜻을 버릴 수 없다. 긴장의 순간에 빛나던 시간은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소리낼 수도 폭파될 수도, 불을 지를 수도 없어서 자유로운, 자유로워서 아름다울 수 없는 침전의 생활을. 그러나 한낮에도 미지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는 파편의 뜻을 버릴 수 없다.
- 중산층 가정, 부분
아버지는 금곡에 묻히셨고, 어머니는 신혼 시절 골목길을 소요하시고, 남동생과 여동생과 나는 미국으로 건너와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은 “폭탄” 이었고, 폭탄에 맞은 우리는 “파편” 이었다. 한번 깨진 가족은 뭉칠 수가 없다. 자신을 가족이라는 유기체의 한 조각으로 그려내고 있는 시인에게, 명륜동 집에서의 한때는 옛날에 점화된 불꽃이었다. 거기서 멀리 떨어져 나온 그는 “자유로워서 아름다울 수 없는 침전의 생활” 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그는 ‘너무 먼 이쪽’ 에 유폐되어 있었던 셈이다.
불가역적인 시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다. 예를 들어 시집 ‘평균율 2(1972)’,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에 나뉘어 실린 ‘선종 善終’ 이후 연작은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시편들이고, 시집 이슬의 눈(1997)은 사고로 죽은 동생에 대한 시편들이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와 ‘그 나라 하늘빛(1991)’ 에 실린 수많은 장삼이사들에 대한 조사 弔辭 역시 그렇다). ‘이슬의 눈’ 에서 뽑았다.
너는 죽고 나는 아직 살아 있따지만
너는 웃고 있겠지, 나를 놀리면서
형, 사실은 네가 죽고 내가 산 거야.
그렇지, 그렇게 유리창같이 환하게
너는 그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산 것과 죽은 것이 서로 보이는구나.
없는 것이 보이는 무지개같이
있는 것이 안 보이는 네 혼백같이 -
- 동생을 위한 弔詩 - 외국에서 변을 당한 壎 에게
6부 ‘있는 것이 안 보이는’ (부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대한 테마가 시간의 차원에서도 변주되고 있는 셈이다. 동생은 보이지 않지만 나와 함께 있고, 나는 내 모습을 유리창에 비춰보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네가 없는 여기는 ‘너무 먼 이쪽’ 이다. 이 길고 아름다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새 한 마리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작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나뭇가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풍경이 혼자서 어두워집니다.
- 동생을 위한 弔詩 - 외국에서 변을 당한 壎 에게
11부 ‘남은 풍경’
제망매가 가 같은 가지에 난 잎들로 형제를 비유했다면, 여기서는 나뭇가지와 한 마리 새로 형제를 그렸다. 동생은 잠시 가지에 앉았다가 푸른 하늘로 날아갔다. 남은 나만 그 없는 무게를 못 이겨 흔들린다. 아니, 떨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흐느껴 울고 있다. 이 흔들림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탄식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꿈과 현실의 접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물고기의 집은 물,
새들의 집은 하늘,
내 집은 땅, 혹은 빈 배.
물고기는 강물 소리에 잠들고
새들은 달무리에서 잠들고
나는 땅이 식는 몸서리에 잠든다.
평생 눈 감지 못하는 물고기는
꿈속에서 두 눈 감고 깊이 잠들고
잠자는 새들의 꿈은 나무에 떨어져
달 없는 한밤에 잠든 나무를 깨운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 내 집, 부분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에 제목을 준, 바로 그 시다. 새와 물고기는 물과 하늘에 제 집을 짓지만, 내 집은 땅이거나 빈 배다. 내가 ‘나무’ 에 빗대어진 까닭이다. 나무로서 나는, 지상에 뿌리박고 살거나 내 몸을 내어줘 배를 엮었다. 물고기는 꿈속에서만 눈을 감고, 새는 꿈속에서만 착지한다. 나 역시 꿈속에서만 새들의 몸을 받아낸다. 새들이 꾸는 나무의 꿈은, 비상해야 하고 비상할 수 밖에 없는 제 운명을 거스르는 정주(定住)의 꿈이다. 거기에 전체의 한 조각이 되어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 자신의 꿈이 얼비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잃어버린 다른 조각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하고 있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앞 시에서 보았듯, 새가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사는 곳을 달리하는 전체의 작은 파편들이었다.
그런데 죽음으로 이행한 삶, 혹은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이 이와 같은 구도를 갖게 되면서, 시간이 가진 보편성의 차원이 열린다. 그동안 마종기의 시에서 개별적인 시간들은 시원(始原)을 이루었던 특별한 한 시간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계량화되었다. 그곳을 떠나온 지 10년이 되었다거나, 그 시절을 잃어버린 지 20년이 되었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제 현재는 그 시절의 그늘이거나 예시다. 나는 격절된 시간을 살아낸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시절의 일부를 살아왔던 것이다.
천 년을 산 나비 한 마리가
내 손에 지친 몸을 앉힌다.
천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
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것을
나비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그해에 내가 말없이 그대를 떠났듯
내 몸 안에 사는 방랑자 하나
손 놓고 깊은 노을 속으로 다시 떠난다.
뜨겁고 무성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뒤뜰로만 돌아다니는 노란 나비.
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까지
늙어 그늘진 내 과거였다니!
이제 무엇을 또 어쩌자고
노을은 날개를 접으면서
자꾸 내 잠을 깨우고 있는가.
- 캄보디아 저녁 1, 전문
시간에 대한 시인의 깊은 사색이 나비와 나의 교감과 상응(相應)을 낳았다. 호접몽(胡蝶夢)의 변주라고 해도 좋을 이 시에서, 예전의 나였을 나비가 지금 내게로 왔다. “천 년 전” “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방랑자는 특정한 “그해에” 사랑하는 이들을 놓아두고 떠났으나, 이제 내 몸을 찾아 내게로 돌아왔다. 나비는 물론 노을 속으로 “다시 떠난다”. 떠남이 시인에게 아로새겨진 운명이었다. 시인은 이별을 선택한 게 아니다. 그는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도 자신이 떠남으로써 말이다. 그 사건이 천 년 동안,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 마저 “늙어 그늘진 내 과거” 였다. 여기엔 이중의 동일시가 있다. 첫째, 내 손이 꽃이었듯 저 돌은 내 몸이었다. 둘째 흙이 되어가는 지금의 저 돌은 “늙어 그늘진” 지금의 내 몸과 같다. 그러니까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나는 늙고 어두웠던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저 돌처럼 낡거나 늙었다. 실낙원 이전에는 역사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시인의 시적 연대기가 시작되지 않았다. 이 말은 물론 시인의 개인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도미 이전에도 시인은 ‘조용한 개선(1960)’ , ‘두 번째 겨울(1965)’ 이라는 개인 시집을 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편들을 실낙원 이전의 체험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이때 시들을 예수의 탄생이 기원의 전과 후를 나눈 것처럼, 그리고 구약의 이야기가 신약의 예시로 기능하는 것처럼, 그렇게 읽어야 한다. 해부대 위에 놓인 시신에게 수줍어 눈 못 뜨는 소녀야 (해부학 교실2) 라고 시인이 부를 때, 죽은 후의 삶을 죽기 전의 삶으로 번역했던 그 시선으로 말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나비는 노을로 변환된다. 이제는 앙코르와트만이 아니라, 노을이 펼쳐진 곳에서는 어디서나 천 년 전 나를 떠났던 내 안의 내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노을은 내 잠을 깨운다. 내가 꽃이었던 꿈, 내가 돌이었던 꿈, 그리고 ‘귀향’ 을 읽으면서 보았듯 내가 멀리 떠나 있었던 그 꿈이 깨어난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기에 없었으나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다. ‘귀향’ 에서 몸과 마음을 태평양의 이쪽과 저쪽에 나누어 두었다면, 여기서 시인은 오래전과 지금을 꿈과 현실로 뒤섞어둔다. 한 꿈을 깨면 다른 꿈이고, 한 삶을 겪고 나면 다른 삶이다. 시인은 이 유랑의 삶 / 꿈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내내 지상을 꿈꾸지만 하늘에서 살아야 하는 새처럼. 그래서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이제 마종기 시의 주체가 타인과 맺는 관계에 대해 살필 차례다. 마종기의 시에는 ‘너, 당신, 그대’ 가 무수히 등장하는데, 그 시어들은 개별 시의 문맥에서 매우 다르게 쓰인다. 이것은 시인의 시가 타인과의 무수한 관계에서 파생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종기 시의 어조는 단순한 독백이 아니다. 마종기 시의 문제를 일기체나 수필체라고 말할 수 없다. 늘 특정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기나 수필은 나의 정념에서 비롯한다. 대상은 이 정념을 비끄러매어 두는 정박지일 뿐이다(예컨대 내가 슬플 때, 그는 떠난다). 그러나 마종기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정념을 적는다. 그래서 시인의 정념은 대상의 움직임이 낳은 필연적인 반응이다(예컨대 그가 떠났기에 나는 슬프다). 더욱이 그의 시는 미묘하게 음악적이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에서 한 편을 옮겨 적는다.
1
날씨 때문에 호남 쪽 여행을 취소하고
친구 넷, 하룻밤 아무 데나 가자며 떠난
늦은 오후의 춘천 가는 길.
이 낮은 산이 저 낮은 산으로 이어지고
산과 산 사이를 다듬어 채우는 비안개.
산 밑을 따라가는 강줄기 사이에서
구질스런 풋정만 신음 소리를 내는구나.
옛날인가, 아버지의 산소도 지나온 지 오래고
경춘선 정도의 기차가 동행의 기적을 울리네.
내 친구 의사 짐에게는 흥겹게 캠프 케이지로 가는 길,
오래 구겨진 몸으로 춘천 가는 길.
2
안녕하세요, 당신
몇 장의 바람이 우리를 지나간 뒤에도
상수리나무는 깊이 잠들어 코 고는 소리를 내고
우리도 그렇게 태평한 하룻밤을 가지고 싶네요.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몸 저리는 아픔이겠지만
낯선 풍경 속에서 아직도 서성거리는
안녕하세요, 당신
그 어디쯤, 생각과 생각 사이의 공간에서
귀를 세우고 우리들의 앞길을 엿듣고 있는
같은 하늘 아래 근심에 싸인 당신,
당신의 탄식이 문득 우리를 불 밝혀주네요.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를 -
너에게 주노라, 너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 춘천 가는 길, 전문
1부만 살펴보자. 의미상으로는 1부를 ① 여정의 시작(1~3행), ② 여로의 풍경(4~7행), ③ 여행의 성격(8~11행)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은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② 에서는 산과 강, 비안개와 강물 소리가 대구를 이루며(행이 씌어진 순서에 따라 AaBb 형식이다), ③ 에서는 “아버지의 산소” ( ‘중산층 가정’ 을 보면 산소는 금곡에 있다 )와 지친 내 몸이 “동행의 기적을” 울리는 기차와 흥겨운 “친구 의사 짐” 과 대조를 이룬다(이번에는 행이 씌어진 순서에 따라 ABab 형식이다). ① 과 ③ 의 뒷부분이 통일을 이룬 것은 2부로 넘어가기 위한 장치다( “ …… 춘천 가는 길” ). 음악에 주의하며 읽어보자. ① 은 정보 제공이 목적이므로 3행 전체가 단숨에 읽히고( “ ……취소하고 / ……떠난 / ……춘천 가는 길” ), ② 는 일행이 경춘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므로 느리고 평탄하고 규칙적으로 읽히고, ③ 은 옛 사연과 지금의 흥겨움이 대조되고 있으므로 느리게 진행되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한번에 읽힌다(초점이 마지막 행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이 이 여정을 진정으로 요약한다). 시행들만 놓고 읽을 수도 있다. 1 · 4 · 8행의 끝에 위치한 반폐모음 半閉母音 은 여정을 잇고( “취소하고, 이어지고, 오래고” ), 3 · 10 · 11행의 끝에 위치한 울림소리는 여정을 닫고( “……길”), 5 · 6 · 10행의 끝에 위치한 반모음(半母音)들은 여운을 남긴다( “비안개, 사이에서, 울리네” ). 호흡을 늘이고 모으는 이런 음악성은 마종기의 시가 산문의 행갈이에 가깝다는 주장의 반례(返禮)다.
2부에 나오는 “당신” 은 일차적으로는 선친이겠지만, 나를 아끼고 근심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의 인격화(人格化)이기도 하다. 당신의 근심과 탄식이 내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를” 준다.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의 이 이행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와 혹은 산 자가 죽은 자와, 혹은 자식이 부모와 맺는 관계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마종기 시의 ‘너, 당신, 그대’ 는 추상이 아니라, 내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구체적인 인물들에서 비롯되어, 보편의 차원으로 고양되는 인물들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 몇몇 모습을 살펴보자.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 꿈꾸는 당신, 전문
나와 한 침대를 쓰는 당신이 밤새 떨고 돌아눕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 하나하나의 행동에서 내가 채워주거나 덮어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당신의 속에 들어가 당신을 달래고 싶어하고, 당신이 겪었던 “시고 매운 세월” 에 아파한다. 아내일 것임에 틀림없는 당신에게서, 나는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빈 공간을 발견한다. 그런데 내가 없는, 나를 떠나간 아내의 꿈이 사실은 내 꿈이 아니었던가. “멀리 떠나며 /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일이 내 일이 아니었던가. 아내 역시 사랑하는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이쪽에 몸을 두고, 꿈에서 사랑하는 저쪽을 찾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닌가. 수십 년의 세월이 밀쳐낸 너무 먼 이쪽의 삶이, 나처럼 안타까웠던 것이 아닌가. 나와의 격절에서 생겨난 안타까움은 어느새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끼리의 연민으로 바뀐다. 아내는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나와 함께 느끼고 생각하고 슬퍼하는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당신의 골수를 열 달이나 받아먹고
어머니, 내가 생겨났습니다.
동생들도 당신 뼈에 구멍만 뚫어
해 지난 갈대같이 속 빈 육신,
골다공증으로 늙으신 어머니.
당신 뼈가 얼마나 가벼워졌으면
바람까지 들락거리는 큰길 사이로
먼 데 어디 날아가실 준비까지 하시는지.
- 골다공증, 1부
어머니에 대해 자식이 하는 일이 뼛골을 빨아먹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뚫어놓은 구멍 때문에 너무 가벼워져서, 먼 데로 날아갈 준비가 끝났다. 여기에 부가된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은 2분의 내 직업과 겹쳐서 배가된다. “나는 덱사 스캔과 간단한 숫자 계산으로 수많은 골다공증을 진단해주고 돈을 벌었다.” 나는 그 일로 돈을 벌었으나, 정작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그때가 되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일기는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 것을 덮을 때가 되었다.
돌아보면 구멍 많은 당신도 가엾고
바닥 터진 내 지난날도 가엾다.
숨지 마라, 죄지은 지상의 모든 구멍들
암, 다시 보면 세상에 가없지 않은 게 없지.
- 골다공증, 3부 부분
어머니 몸에 뚫린 구멍은 “내 지난날” 의 허방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발 디딜 바닥이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자식을 여럿 낳은 지금에 와서야 나는 어머니의 골다공증과 내 구멍이 같은 구멍임을 알았다. 어머니 역시 당신의 몸 안에 ‘너무 먼 이쪽’ 을 숨겨두고 계셨던 셈이다.
네가 떠나고 난 후에야
내게도 땀이 있었다는 것
어렴풋한 오한으로 기억한다.
추운 겨울도 아니었을 텐데
외투 입고 목도리 두른 너른 수면에
소금기는 어디로 모두 사라지고
누구의 땀에서도 짠맛이 나지 않았다.
땀이 지구를 더 어지럽게 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항구의 언덕
병약한 바늘에 찔린 피부,
그 수많은 구멍을 통해 땀이 솟았다.
생수에 젖은 소금이 솟았다.
갈증의 몸에서 눈물이 솟았다.
내가 다시 솟았다.
너를 만난 피부에서만 땀이 났다.
감추어놓은 절망이 터져나온 연옥,
소금의 단호한 결정체가 물이 되었다.
돌 속에 흐르는 땀까지 뽑아
돌 속에 살아 있는 고백까지 뽑아
떠나는 너에게 묘비명으로 보낸다.
- 땀에게, 전문
제목을 참조하면 “너” 는 땀이겠지만, 문맥에서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너를 만나서 땀을 흘리고, 너를 떠나보낸 후에 오한으 ㄹ느꼈다. 땀은 너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오한, 눈물, 갈증, 절망, 고백” 의 표징이다. 이 2인칭을 내가 떠나온 ‘사랑하는 중심’ 에 있던 모든 사람들, 나아가 그 중심 자체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너를 만난 피부에서만 땀이 났다.” 땀은 내 긴장과 절망과 슬픔의 결정체였다. 돌(소금)이 물에 녹아 땀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뽑아 다시 돌(묘비)로 만들어 너를 기념했다. 시인의 시가 바로 그 묘비명이다. 거기엔 너를 향한 간절한 고백의 말들, 너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말들이 적혔을 것이다.
마종기 시에 나오는 타인들이 2인칭이라는 것은, 그들이 내 호명(呼名)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며, 나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며, 그로써 내 모든 정념(아픔에서 시작하여 동감과 연민으로 끝나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너, 그대, 당신’ 은 사랑하는 나라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제유가 된다. 통상 2인칭은 모든 대상들으 ㄹ추상화하는 역기능을 갖는다. 대상들은 2인칭의 늪에 빠진 후에, 개별성을 잃고 두루뭉술해진다. 반면에 마종기 시의 2인칭은 대상들의 구체성을 시인 자신과 맞대면시키는 절박함과 핍진함의 소산이다. 그들은 내가 보고 부르고 만질 수 있는 대상들이다. ‘너무 먼 이쪽’ 에서 불러낸, 너무 먼 저쪽의 사람들이다. 그들을 부르는 일 자체가, 그들을 내 안에 초청하는 일이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름 부르기) 물론이다. 혼자일수록 이 호명은 더욱 간절하고 간절할 것이다. 우리는 단독자였으나, 이 호명을 통해 하나가 된다. “처음에는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 우리가 만나 서로 허물을 안아주면서 / 말의 물길을 통해 경계가 무너지는 섬.” (다도해를 보며)
마지막으로 마종기 시의 주체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무엇에 빗대어,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그는 ‘너무 먼 이쪽’ 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도마뱀의 끊어진 꼬리를 두 개나 가지게 된 날 밤, 나는 내 머리가 없는 것을 알았다. 처음 가졌던 건, 내 아버지가 주신 머리가 없는 것을 알았다. 고국의 친구가 그랬을까. 하느님같이 큰 손이 그랬을까. 머리를 잘 세워 생각을 옳게 고쳐주려고 내 머리를 잡았던 것인가. 나는 귀찮은 참견이 싫어 내 머리를 끊어주고 도망치고 말았던가. 머리 없는 몸뚱이와 사지만으로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숨어 사는 도마뱀. 가끔은 내 머리가 그리워진다. 잘려나간 내 머리는 지금쯤,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 도마뱀, 부분
도마뱀은 천적에게 잡히면 제 꼬리를 끊어주고 도망가버린다. 제 몸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약삭빠르게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게 머리가 없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의 일부를 희생해서, 사랑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떠나왔는데, 정작 머리를 거기에 놓아두고 온 것이다. 사랑하는 그곳에 마음을 주고 사는 삶, 모든 생각과 그리움이 그곳을 향해 있는 삶, ‘너무 먼 이쪽’ 에서 다만 이리저리 휩쓸리는 몸의 삶이 여기에 있다. 시인이 “잘려나간 내 머리는 지금쯤,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라고 자문할 때, 시인의 골똘함은 머리를 두고 온 저쪽에 대한 생각으로 아련하다. 악어도 같은 계열의 동물이다.
또 먹기만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픈 것에도 의미가 있다지만 해질녘이면 삭정이 가슴이 조인다. 풍경들이 점점 멀어지고 무엇이 살아 있다는 신호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꿈의 제일 밑층에 살던 냉혈 동물이 불면증으로 신음한다. 머리에 두 개의 충혈된 눈을 달고 악어 한 마리 집 앞의 호수에 떠오른다. 악어 우는 소리를 밤마다 들으며 선잠에서 깨어나 불치(不治)의 냄새로 아침까지 헤엄쳐 간다.
- 악어, 부분
그럴 수밖에. 머리를 놓아두고 몸으로만 영위하는 삶이니, “먹기만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고 적을 수밖에. 그러나 아픔은 몸으로 겪는 것이어서, 이 생게망게한 삶을 함께하는 것은 그 고통뿐이다. 악어는 “꿈의 제일 밑층에 살던 냉혈 동물” 이다. 먼 그곳에 대한 꿈을 꿀 수 없는 날은, 내 안의 저 밑에서 차가운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 악어는 “물에서도 땅에서도 산다. 고국과 외국에서 오락가락 살고 있는 나도 눈 감고 사는 파충류, 또는 양서류인가”. (2연) 수륙 양서의 삶을 사는 악어는 그리운 이를 고국에 두고 외국에 터전을 잡아 사는 나와 닮았다. 나는 악어 고기를 튀겨 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악어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어가 사람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다.(4연) 마침내 내 안의 악어가 나를 부르고(5연), 나는 눈물을 흘린다. “흰 낮달을 올려다보며 살아낸 60 몇 년의 악어의 유랑, 찢어져 피 흘리는 악어의 손과 발, 참다가 넘쳐 흘러나와 약이 된다는 한밤의 악어의 눈물, 그 두 뺨 뜨거운 후회 밤마다 내 호수를 채운다.”(7연) 일생을 유랑하며 살아온 나(정주할 곳을 떠나왔기 때문에, 이국의 집은 여인숙과 같은 곳이다) 역시 악어다. “악어의 눈물” 은 위선자가 흘리는 거짓 눈물을 뜻하는 말이다. 제 자신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에 빗대는 이 혹독함은, “뜨거운 후회” 와 만나서 집 앞의 호수를 눈물로 가득 채운다.
‘너무 먼 이쪽’ 의 삶을 사는, 살아야 하는 자신에 대한 자화상은 이외에도 여럿이다. 자식을 분가시킨 후 휑뎅그렁한 집에 사는 자신을 “집 없는 노후의 새” 로 빗댄 것이 나 (새에 대한 명상), “기다림” 에 지친 “어지러웠던 내 평생” 을 “이름 모를 나무” 에 견준 것이나(풍경화), “솔잎 내 유독 강한” 나무가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 임을 알아보고, 상처 많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상처 4) 모두 그렇다. 이 자화상들은 깊은 자성(自省)의 산물이자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치지 않는 사랑의 산물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기로 한다.
왜 그렇게도 매일 외울 것이 많았던지
밤샘의 현기증에 시달리던 나이,
큰 바오밥 나무를 세 개나 그려
소혹성 몇 번인가를 가득 채워버린
그 그림 무서워하며 헐벗은 날을 살았지.
그 후에 가시에도 많이 찔리고
허방에도 많이 빠지고
녹슨 못을 잘못 밟아 피 흘리면서
창피한 듯 눈치껏 피해만 다녔지.
나는 그렇게 살아냈어. 너는?
하느님이 제일 처음 심었다는 나무,
뿌리가 하늘을 향해 물구나무선 채로
늙은 의사가 되어서야 지쳐서 만난
아프리카 초원의 크고 못난 다리,
안을 수도 없어 어루만지기만 했는데
밀가루 같은 추억이 주위에 흩어졌어.
밥이 되는 열매와 야채가 되는 잎,
나이테도 아예 없애고 둥치만 커지는
주위로는 대여섯 개 문이 닫혀 있는데
안내원은 더위에 덮인 목소리를 뽑으며
이것이 아프리카의 수장 樹葬 이라고 했지.
큰 바오밥을 만나니 무섭기보다는 목이 메인다. 둥치를 뚫고 나무에 구멍을 만들어 시체를 그 속에 밀어 넣고 판막이로 입구를 못질해 막으면, 열대의 초원에 우뚝 선 바오밥은 시체를 잠재워준다. 껴안고 녹여서 몇 해 안에 제 몸으로 받아들여준다. 못질한 막이도 어느새 구별되지 않는다. 천 년 이상 이렇게 사람을 안아주었으니 얼마나 많은 시체가 한 나무에서 살다가 나무가 되었을까.
나무가 되어버린 인간들은
남은 살과 피로 열매를 만들며
추억을 수액에 섞어 마신다.
인간이 나무 속에 들어가는 동네,
잡초까지 이상하게 물구나무선다.
둥치의 긴 척추가 우리들의 날같이
귀환의 낮과 밤을 비추어준다.
축복처럼 아프게 행복하다.
- 바오밥의 추억, 전문
그동안 말해왔던 모든 테마가 이 시에 다 들었다. 바오밥은 무시무시한 고독과 슬픔을 견디고 자란 나무이며, 수많은 상처를 받아낸 나무이며, 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마저 끌어안은 나무이며, 그 모든 ‘너무 먼 이쪽’ 의 삶을 추억으로 바꾸어낸 나무이며, 마침내 “귀환의 낮과 밤을” 비추는 나무다. 이 나무에 자신을 빗대면서, 드디어 시인은 지나온 모든 세월과 떨어져 살았던 모든 거리와 죽음으로 잃었던 모든 이들을 끌어안는다. 끌어안고 귀환한다. 저 붙박인 나무처럼, ‘제자리’ 에 서서. 아, “축복처럼 아프게 행복하다”. 나도 아프게, 행복하게, 그의 귀환을 축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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