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을 자꾸 넓어지지요
여행
어느 골목 창틀에서 본 대못 하나
집에 가져다 물잔에 기울여 세워놓았더니
뚝뚝 녹가루를 흘리고 있다
식당에서 먹다 버린 키조개 껍데기
뭐라도 담겠다 싶어 집에 가져왔는데
깊은 밤 쩌억쩌억 비명 소리가 들리기에
두리번거리다 안다
물 밖에 오래 나와 있어 조개의 껍데기가 갈라지고 있는 것을
나는 털면 녹 한줌 나올는지
공기로 나를 바싹 말린 뒤 내 몸을 쪼개면 쪼개지거나 할는지
녹가루를 받거나
갈라지는 소리를 이해하는 며칠을 겨우 보냈을 뿐인데
집에 다녀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토록 마음이 어질어질한 것은 나로 인한 것인지
기어이는 숙제 같은 것이 있어 산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나는 뒤척이면서 존재한다
옮겨놓은 것으로부터
이토록 나를 옮겨놓을 수 있다니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청춘의 기습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거짓이
세상을 덮어버릴까 두려워서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파먹다가 안쓰럽게 부스러기가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에서
당신도 압축된 거짓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오래 물들어 있었던 탓이겠지요
우리가 마주 잡았던 손도 결국은 내가 내 손을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
그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인생의 절반이라는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려다 길을 잃었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냄새를 따라 내려서 그렇습니다
광채는 사그라들고 공기는 줄어들고 나는 마비되었습니다
이별의 원심력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사라지기 위해 아이슬란드 폭포에 와 있습니다
바깥의 일은 어쩔 수 있어도 내부는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감당하기로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아이슬란드에 남습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시인 이병률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이 있다.
2006년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힘 동인이다.
이병률 시인의 말
어쩌면 어떤 운명에 의해 아니면 안 좋은 기운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시 詩.
그럼에도 산에서 자라 바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은 이 나무는,
마음속 혼잣말을 그만두지 못해서 그 마음을 들으려고 가는 중입니다.
2017년 9월 이병률
우리는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 척합니다.
누구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겠지만 당신만은, 방에서 나와 더 절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김소연 시인
시를 읽고서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의 말을, 나는 지금껏 허투루 들어왔는가 보다. 아니, 위로라는 말이 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어딘지 불편했다. 시의 지위가 행사할 힘은 위로가 아닐 거라고 믿어왔다. 위로가 행사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라고 치부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위로는 어쩐지 인간의 정신을 쨍하게 만드는 방향과는 정반대에 놓인, 향정신적이고도 흐물흐물한 종류의 작용인 것만 같았다. 위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시간이 인간에게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럴 때에는 그 어떤 문장도 곤혹스럽기만 하다는 것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제대로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 일어난 거의 모든 불행이 어쩌면 고통에 대하여 내가 무지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번잡한 여러 상념과 복잡하디 복잡한 시에 대한 욕망들을 허물 벗듯 벗어가던 지난 계절 내내,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
지난 계절의 나는 천천히 천천히 마음을 준비해가는 임종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지켜왔다고 믿어온 내 삶의 온갖 수칙을 하나하나 버렸고, 내가 판단해왔던 것들과 하나하나 결별했고, 내가 간직해왔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허물어갔다. 모든 것이 삭거나 부서지거나 하여 소멸된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워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벼랑 너머로 굴러 떨어졌어도 /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돌” 처럼, 이상한 정지 화면 속에 오래도록 붙박여 있는 사람. “감정을 시작하고 있는지 / 마친 것인지를 모르는 것” 과 같은 상태가 되어가는 사람. 이 호방한 듯도 하고 의연한 듯도 한, 용감해 보이기도 하고 숙연해 보이기도 하는 사람. 이 시집 속에서 내가 느낀 시인의 모습이다. ……
시인의 절제란, 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바를 가장 잘 건사하기 위해서 시인이 반드시 취해야 할 도리라는 것을 이병률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절제에 대한 의지(말을 삼가하고 싶다는 의지)는 이 시집에서 자주 목격된다. “심장을 다독이고 다독여서 / 빨래 마르는 동안만큼은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을 하게 될 때에 이병률은 이 다짐에 다다르기 위하여 한 편의 시를 써내려 가진 않는다. 이 다짐의 문장이 비록 시의 끝부분에 적혀 있지만, 이병률의 삶은 이 다짐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걸로 읽힌다. 이 다짐도 이병률적으로 말하자면, “시작하고 있는지 / 마친 것인지를 모르는 것” 이다. 이병률적으로 말하자면, “병에 걸리” 는 것일지도 모르고 “이렇게 미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마음으로 시작을 하게 될지 마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되어 사람답게 살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다짐이라고 했지만, 숱한 낙담 끝에 오는 다짐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다짐은 시어일 뿐만 아니라 곧장 행위에 닿게 된다. 이 다짐은 선택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최종의 마음이다. 시를 잘 써서 시인이 아니라, 이 최종의 마음이 종내 시가 되는 사람만을 나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
시는 누구의 것인가.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요란할 리도 없고 확고할 리도 없는 이 은은한 장면 속에서 나는 허공에다 눈길을 뻗으며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좋은 시는 누가 결정하는가. 좋은 시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 “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내가 쓴 것>의 마지막 연이다. 시인 이병률은 어쩔 도리가 없는 순간들에 대한 자기만의 자세를 자주 드러내는데, 이에 대해 이병률은 마치 ‘단지, 내 소관이 그러할 뿐’ 이라고 뒤로 물러서듯 말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좀더 명확하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자세는 시를 쓰는 자의 소신이거나 신념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꺼이 겪으려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자세라고. 시인 이병률이 인간을 믿고 있다는 걸, 이 시집을 읽고 겪어나가면서 새삼스레 느꼈다. 인간을 경유해서 믿음을 쌓아왔다기보다는 그것과 별개로, 인간에게서 믿음을 체험해보았건 아니건 간에 그는 끊임없이 인간을 믿고 있는 것 같다. ……
이병률이 사는 집에 간 적이 있다. 많은 시인이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다. 매트리스 하나가 동그마니 놓인 그의 침실과 스탠드 불빛 하나가 켜져 있던 그의 작은 서재를 나는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이병률이 만들어준 갖가지 음식을 가운데에 놓고 시인들은 재잘재잘 즐거워했다. 늦게 온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이병률은 또 음식을 내왔고, 누군가 잔이 비었다고 하면 냉장고에서 맥주를 또 꺼내다 주었고, 누군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면 커피를 내려주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잔칫집 분위기가 났다. 생선 굽는 냄새와 전 부치는 냄새가 현관 바깥까지 진동했던 기억이 있다. 그 집에 둘러앉아 식구처럼 재잘대던 그날의 시인들이 누구누구였는지 선명하게 기억난다. 모두들 지금보다 어렸거나 젊었을 때다. 지금처럼 우리가 소원하게 지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때다. 그때 그가 차려준 음식들을 잘 먹었던 그 시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세월이 지나서 소원한 사이가 되어버린 우리들은 각자 어떤 마음일까. 변했거나 변하지 않았거나, 가끔은 그날의 그 집을 아마도 나처럼 기억할 것 같다. 끊어진 인연과 멀어진 인연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빗금처럼 지나가는 사이, 우리 모두는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자연스레 모든 인연이 달라져갔고 바뀌어갔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부엌과 가까운 귀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꾸중하거나 화제를 주도하거나 대접을 받으며 편히 있곤 하는, 후배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느 선배 시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적게 말하고 적게 웃는 슴슴한 모습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함께 밥을 먹자고 만날 때에도 그랬다. 음식은 풍족하게 주문하고 말수는 적었다. 늘상 물잔을 채워주고 수저를 놓아주는 일을 차지할 뿐이었다. 헤어질 때에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제 갈 길로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건이 별로 없었던 그의 집처럼 그는 헐렁하게 웃고 헐렁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아마 그런 모양으로 걸어가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서 있는 사내도 목격하게 되었을 것이고, 대못 하나도 줍게 되었을 것이고,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까는 순간의 향기도 맡았을 것이다. 그의 천가방 속에는 식당에서 챙겨간 키조개 껍데기 하나가 들어 있었을 것이고, 도서관 사물함 열쇠 같은 게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국을 끓이다 말고 가방 속의 키조개 껍데기와 도서관 사물함 열쇠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이 슴슴한 듯 보이는 문장들을 모아서 육중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그는 책상에 앉아 벽을 바라보며 시를 적었을 것이다. ……
가장 아껴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용기 있게 말해야 할 단어가 ‘우리’ 라는 단어라고 이제 나는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어떨 때는 남용되거나 오용되고 어떨 때는 의미를 소실한 듯 사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단어이다. 드넓은 복수형으로 쓰이지 않고 단 두 사람으로 쓰일 때에만 겨우 제 뜻을 표상해내는 듯 유약해진 단어이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민감한 단어이다. 이 유악하고 민감한 단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의 방향이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병률은 이런 단어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하게 다룰 때가 더러 있다. “우리라는 말도 이제 힘이 없습니다” 라고 적고야 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병률이 이 문장을 적어둔 자리의 맥락 속에서 이 씁쓸하고 쓸쓸한 문장은 야릇한 힘을 얻는다. 애써 우리를 우리라고 위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과 우리를 우리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우리일 수밖에 없다는 안전한 결속. ……
문장을 정말로 능란하게 다루려면 그 문장의 깊이만큼 깊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문장을 한 걸음 앞에 던져놓고서, 그 문장과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문장을 쓴다. 그래서 문장은 곧 서약과 다름없다. 이병률이 한번도 직접적으로 적어둔 적은 없지만, <바다는 잘 있습니다> 곳곳에는 서약에 갈음하는 문장들이 불씨처럼 숨어 있다. 자신이 쓴 시와 더 겹쳐지고 더 닮아가는 그가 가장 분명하게 다짐을 해둔 문장을 오래 들여다본다. ……
그의 시는 대단한 결기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냉소나 환멸로 손쉽게 치환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래도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으냐 눙치려 들지도 않는다. 낙담의 자리에서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 “힘을 모”으는, 은은하고 든든한 모습으로 그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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