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 川 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 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거울 저편의 겨울 4
- 개기일식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강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 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한강 시인의 말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 2013년 11월 한강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해설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
조연정
말과 동거하는 시인
막스 피카르트의 철학 에세이 ‘인간과 말’ 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 소설가 배수아는 이 진지한 산문집이 “말과 동거하는 인간” 을 위한 책이자 결국 “글을 쓰는 인간, 곧 작가의 영혼을 위한 책”일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란 누구인가.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해갈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시대의 변화와 가장 무관한 장르로 생각해온 문학조차 점차 장르 자체의 고유성을 잃어가고 문학 종사자들의 수도 줄고 있기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비효율적으로 다루려는 문학적 행위와 관련된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거나 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사실은 말과 관련된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대체 불가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능력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멋지게 초과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만큼은 그 대체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한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마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꿈속에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음’ 과 더불어 놀라운 사유를 창조해내고, 말할 수 없음’ 과 더불어 언어 너머 심연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 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말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처럼 기능적인 것으로 퇴화한 언어를 붙잡고 그로부터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언어는 시인에게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 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그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퍼 올리는 작업은 유혹적이지만, 시인은 말과 더불어 자기 안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덧붙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같은 곳). 시를 쓴다는 것은 심연을 열어젖히는 행위인 동시에 심연을 메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같은 유혹과 불안 사이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느 정도는 언어를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와 달리 시인은 언어를 결코 수단화하지 않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저 유혹과 불안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이다.
시인 한강의 첫 시집을 읽는 자리에서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과 욕망에 대해, 그리고 말과 더불어 시인이 경험하는 환희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왜일까. 에둘러 가보자. 한강은 이제껏 여덟 권의 책을 출간한 등단 20년차의 소설가이다. 물론 그녀가 소설가로 등단하기 한 해 전에 이미 시인으로서 문단에 출사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소설가 한강이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을지 모른다. 늦게나마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면서 새삼 시인으로서 한강을 읽어야 하는 자리이지만 소설가 한강을 완전히 지우고 그녀의 시를 읽어내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 그녀의 소설작업을 잠시 되짚어보는 것도 좋겠다. 주로 인간 삶의 진실과 관련하여 언제나 근본적인 질문을 제출하곤 했던 한강의 소설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어김없이 고통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분명한 사실은 재차 강조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인물들이나 그러한 인물들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에게서 어떤 결기마저 감지될 정도로 한강의 인물들은 일상의 건강한 삶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생리적 예민함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적 세계에 대한 부적응을 증명하는 인물로부터, 급기야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파괴하면서까지 이 세계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강력한 거절의 의지를 드러내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한강의 인물들이 보여준 고통의 양상들은 날로 진화해왔다. 뿐만 아니라 한강은 그 고통의 기원으로부터 구체적이고도 특별한 불행들을 점차 소거해왔다. 고통의 기원을 텅 빈 자리로 남겨놓음으로써 한강 소설은 인간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인간에 대해 쓰고 있다”(강지희, 작가인터뷰 - 고통으로 ‘빛의 지문 指紋’ 을 찍는 작가)라고 말한 그녀가 고통받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진실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과 동거하는 인간’ 의 고통이 아니었을까.
인간에 대한 탐색은 언어에 대한 탐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지어주는 유일한 종차가 바로 언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모든 특징들이 이 언에서 파생된다. 그런 점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등장하는 한강의 근작 장편 ‘희랍어 시간’ 은 한강의 글쓰기가 인간과 언어에 대한 본격적 탐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예로써 중요하다. 그간 한강 소설이 제기해온 여러 질문들이 이 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말과 동거하는 인간 의 고통에 관한 것으로 압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고 있는 남자는 눈앞의 모든 이미지를 상실한 채 관념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이다. 이미지 없는 관념의 세계는 온전히 말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말을 잃은 여자는, 정확히 말해 모국어로 말할 수 없게 된 여자는 침묵의 세계 안에 있다. 이처럼 이미지와 소리를 상실한 남자와 여자는 암흑과 침묵 속에서 언어 그자체와 투명하게 대면한다. 이들이 지닌 언어는 각각 한 가지의 물질성을 상실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오히려 더 순수한 것으로 거듭난다.
“심해의 숲” 이라는 제목 아래 씌어진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흐사 빋도 소리도 없는 곳으로부터 인간이 최초로 말을 길어 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희랍어 시간’ 은 타락한 언어의 한계보다는 순수한 언어의 능력에 집중하는 소설인 셈이다.
한강의 감각적인 문장이나 그녀가 그려내는 강렬한 이미지에 매혹된 우리는 그녀의 소설에 언제나 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왔다. 그녀의 소설이 시적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옳다. 물론 이때 ‘시적’ 이라는 말의 의미를 재점검 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통해 다양한 감각을 재현하는 것만을 가리켜 시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그것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해야 한다. 시의 언어보다 순수하지 못한 소설의 언어로 이미 시적인 것의 본질을 관통해버린 한강은 과연 어떤 시인일까. 그녀의 첫 시집을 읽어보자.
영혼의 동지 同志 인 나의 육체
한강의 시에서는 마치 그녀의 소설 속 고통받는 인물들의 독백인 듯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이 흐르고 피가 흐른다. 육체의 아픔을 노출시키며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을 읽는 우리라면 고통의 원인에 관심이 많겠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고통이 드러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한강의 시는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 에 관한 열렬한 증언이자, 더불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 나는 살아 있” (피 흐르는 눈) 다는 사실에 대한 냉정한 응시로 읽힌다. 전자에 관한 시들은 주로 시집의 앞부분(1부)에, 후자에 관한 시들은 주로 뒷부분(5부)에 실려 있다. 영혼의 부서짐을 경험했던 순간이 시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으로 다가왔을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수치의 순간일 수도 있고,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환멸의 순간일 수도 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영혼의 순도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부서짐을 어떤 형태로든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부서짐에 대해 애초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한다. 아마도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일 것이다.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전문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이다. 밥을 먹던 ‘나’ 에게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 는 사실이 문득 환기된다. 그렇게 무언가가 영원히 지나가버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나’ 는 그저 밥을 먹는다.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깨달음 뒤에도 지속되는 일상적 행위의 수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마치 밥 먹듯 반복된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 는 애매모호한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 라든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 라고 써야 자연스러웠을 문장이다. 하지만 이처럼 진행형의 문장과 완료형의 문장을 포개놓으면서 위 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조짐이 지속되는 삶의 쓸쓸함을 보여준다. 이 짧은 시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읽게 될 이 시집의 화자가 대단히 민감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은연중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 같은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즉 영혼의 부서짐에 대한 분명한 실감은 깨어 있는 영혼에 대한 말하면서 그 상처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영혼의 상처가 회복 불능의 것이고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의 삶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그런 사람에는 분노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무기력과 체념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회복기의 노래)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회상)라는 질문이 제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을 절망 속에 방기할 수 없는 영리한 사람들은 남은 삶을 위해 영혼의 상처를 애써 봉합하려 한다. 그러나 한강의 화자들은 고통과 마주하는 일을 피할 생각이 없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생각도 없다. 한강에게 상처의 고통을 지속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 된 듯하다.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이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니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 그때, 전문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 저녁의 소묘4, 전문
‘그때’ 라는 시를 보자. 험난한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건너온 그 시절이 그저 “허깨비” 에 불과했다는 듯 삶의 위기는 쉼 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를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안간힘을 쓰며 삶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밀겠지만,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다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마는 잔인함이 우리의 삶 안에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이 시의 화자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특별한 불행이 반복되는 누군가의 불운한 삶을 보여주려는 것이 시인의 목표는 아니다. 특별한 불행과는 무관하게 삶과 전면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민감하고도 강한영혼과 허약한 육체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자신의 “악력” 으로 스스로 “손뼈” 를 바스러뜨리는 모습은 강한 영혼과 약한 육체를 동시에 상징한다. ‘저녁의 소묘 4’ 의 ‘나’ 역시 자신을 이루는 가장 연약한 부분들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나 는 무엇인가 “반짝” 이는 것을 발견한다. 저 “반짝” 거리는 것을 깨어 있는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타락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한강의 화자들은 그 불화를, 즉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픔을 주로 육체의 고통을 통해 드러내곤 한다. 상처받은 무구한 영혼의 존재가 피 흘리는 육체를 통해 체화되는 형국이다. 한강의 세계관은 육체를 영혼의 그릇으로 생각하는 고전 철학의 그것에 가깝다. 인간의 육체는 보잘것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 허상으로 인해 오히려 영혼의 존재가 더 숭고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육체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다. 타락한 세계로부터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강은 말하는 듯하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 파란 돌, 부분
시인이 실제로 꾸었던 꿈속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십년이 지나서도 다시 떠오를 만큼 생생하고도 인상적이었던 그 꿈속에서 ‘나’ 는 죽어 있다. 아, 죽어서 좋았는데 라고 해맑게 말하며 죽음을 기꺼워하는 ‘나’ 의 모습이 이 시의 첫번째 반전이라면, 투명한 냇물 안에 놓여 있던 희고 둥근 조약돌을 줍고 싶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을 아프게 깨닫고 있는 모습은 이 시의 두번째 반전이다. 죽은 채로는 냇물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돌을 건져 올릴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나’ 는 다시 살고 싶어진다. 내가 꿈으로부터, 아니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리려 했던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그돌 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 “파란 돌” 이 꿈속에서 죽은 채로 기뻐하는 ‘나’ 에게 “다시 살아야 한다” 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워주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보잘것없는 돌멩이를 향해 보잘것없는 팔을 뻗고 싶다는 보잘것없는 욕망으로부터 삶의 의지가 생겨난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죽어서 좋았” 다고 말하는 ‘나’ 에게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삶을 통해서만 영혼의 소유자(“눈동자처럼 고요” 하고 해맑은 “파란 돌” 은 영혼의 상징으로 읽힌다)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삶 속에 이미 구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구원인 셈이다. “영혼의 동지 同志 인 나의 육체”(캄캄한 불빛의 집)가 흘리는 피눈물을 그저 감내하는 것만이 타락한 세계에 처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한강의 시는 삶을 관통하는 불꽃 같은 고통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실제적인 원인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나무의 잎사귀를 들여다보며, 얼굴에 내리쬐는 햇빛과 마주하며 인간이 수시로 영혼의 아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왜일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달리, 그리고 한곳에 붙박여 있는 나무와 달리 인간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인간은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없는 언어를 가졌다. 언어와 더불어 인간은 영혼의 존재가 되었다. 한강의 시를 읽는 우리는 이제 언어와 영혼을 동의어로 취급해야 한다. 육체를 피 흘리게 함으로써 세계와 불화하는 무구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했듯, 한강의 시는 다른 한 편에서 일상의 언어를 피 흘리게 함으로써 침묵으로부터 최초의 언어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복원해내려고 한다.
언어의 기원, 어둠의 그림과 침묵의 노래
인간의 말이 순수해질 때 그것은 그림과 가까워진다. 다시 한 번 막스 피카르트를 인용해보자. 그에 따르면 그림의 침묵은 “말의 어머니” 이다. 그림은 “인간이 말로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에 대한 기억”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의 침묵에 대항하면서 말이 “최초의 현존” 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말을 배우기 이전 아이의 영혼이 그림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이처럼 침묵에 맞서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려는 순간의 말은 온전히 진실된 것이었다. 그러나 침묵의 그림을 해석해내려는 말은 이미 타락한 것이 된다. 막스 피카르트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꿈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꿈의 그림을 훼손한다” 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파괴된 말’ 을 사용하여 ‘파괴된 그림’ 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훼손된 언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그 언어를 통해 진실한 말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세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한강은 한 인터뷰에서 소설의 인물로 미술가를 자주 호출하는 이유에 대해 “언어에 대한 고민 때문에 미술에 매력을 느껴온 것지도 모르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해석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침묵의 이미지인 미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지속하지만, 그림은 말할 수 엇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능어로 전락한 일상어를 통해 그림의 침묵에, 즉 말이 생겨나기 직전의 그 침묵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최초의 진실된 말을 복원할 방법이 인간에게 있기는 한 것일까. 위의 인터뷰에서 한강은 연달아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저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오직 언어로 뚫고 나아가고 싶어요. 언어라는 것이 저에게 주는 어떤 고통이 있는데, 그것과 싸우는 게 앞으로 제 숙제가 될 것 같습니다.” 언어가 주는 고통과 싸우는 것, 즉 일상의 언어에 대해 불편한 이물감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말이 지닌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희랍어 시간 ’에서 암흑의 공간에 있는 남자와 침묵의 공간에 있는 여자는 바로 이 같은 최소한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에서 우리는 이 두 남녀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저녁의 소묘’ 와 ‘새벽에 들은 노래’ 라는 연작시는 그 제목만으로도 흥미롭게 읽힌다. 곧 어둠으로 뒤덮일 저녁의 공간에서 (듣지 않고) 그림을 보는 사람, 이내 눈앞의 모든 것이 분명해질 새벽의 공간 속에서 (보지 않고) 노래를 듣는 사람, 즉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보려하고 빛 속에서 오히려 듣고자 사람은 모두 언어의 물질성을 활용한 일상적 소통의 익숙함을 거절한 자들이다. 시집의 첫 문장에 놓인 <시인의 말>에서 한강은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라고 적었다.
어둠을 보고 빛을 듣는 그 불편한 세계가 그녀에게는 왜 투명한 세계가 되는 것일까. 순수한 관념으로서의 언어와 마주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투명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로 제시되는 것은 주로 “텅 빈 두 눈” (해부극장)과 “혀가 없는 말” (해부극장 2)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저녁의 소묘)라고 적기도 했다. 피투성이의 고통과 더불어 말 자체도, 그리고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영혼도 비로소 진실할 수 있다고 시인은 굳게 믿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도시에서 씌어진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에서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닌 존재로서의 언어와 진실하게 마주하는 시인의 모습이 환기된다. 이제껏 발 디디고 살던 곳과 밤낮은 물론 계절까지 정확히 반대인 낯선 공간에서 시인은 자꾸만 눈을 감는다. 낯선 공간에서 씌어진 시들이 주로 그곳의 풍경들을 신기한 눈으로 스케치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흔히 타지를 방문한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은 소리에 둔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분절되지 않은 소리의 덩어리로 감지될 뿐이다. 마치 침묵의 공간에 있는 듯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침묵 속에서라면 눈앞에 있는 사물들이 더 명징해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명징하고도 낯선 풍경속에서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경험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마치 “거울 뒤편” (거울 저편의 겨울 7 - 오후의 미소)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곳에서 시인이 마주하는 것은 주로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 (같은 시) 하는 모습이거나 “눈먼 남자 둘” 이 나란히 걷는 모습(거울 저녀편의 노래 8)이다. “지구의 핵” (거울 저편의 겨울)을 사이에 두고 내가 살던 곳과 정반대편에 위치한 그곳에서 시인은 주로 침묵과 암흑을 만난다.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 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 거울 저편의 겨울 4 - 개기일식, 부분
시인은 “달의 원” 과 “태양의 원” 이 정확하게 겹치는 개기일식처럼 지구 반대편의 도시가 “나의 도시” 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신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개기일식의 순간에는 태양이 달의 그림자에 온전히 가려짐으로써 한낮의 시간에도 암흑을 경험하게 해준다. 한강은 지구 반대편에서의 거울 보기를 이 같은 개기일식의 암흑에 비유한다. 흔히 낯선 곳에서의 우리는 시차와 거리감을 분명히 감지하며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이고도 명료하게 점검해보곤 하지만, 이 시의 ‘나’ 는 시차와 거리감이 무의미해진 공간에서 오히려 자기 안으로 맹렬히 침잠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타자화된 ‘나’ 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울 없이 맨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이때의 응시는 “완전하게 응시를 지” 울 정도로, 즉 “얼음 처럼 차가운 “거울” 의 표면을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물론 그 뜨거운 응시는 “피투성이” 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마치 해석 불가능한 꿈속에 있는 듯 어떤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는 응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 저편의 겨울 9 -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를 연달아 읽어보자.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맹렬하게 플라맹코를 추고 있는 사람의 “이글거” 리는 눈빛 속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마치 “태양 또는 죽음” 처럼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 보려는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공포 또는 슬픔” 이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직접 보려는 사람처럼 마주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보고자 하는 “피 흘리는 눈” (피 흐르는 눈) 앞에서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침묵과 어둠의 공간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의 존재이다.
한 사람의 영혼을 잘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 마크 로스코와 나 2, 부분
선이 아닌 단지 면으로 이루어진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추상화를 마주하고 있는 심정을 한강은 “어떤 소리도/광선도 닿지 않는/심해의 밤” 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으로 그려낸다. 그 침묵과 암흑의 공간에 놓여 “내가/나라는 것도” 잊은 채 시인은 천천히 자신의 실핏줄 속으로 번져오는 “당신의 피” 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피” 를 감지하는 그 생생한 느낌이 바로 누군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영혼의 만남을 위해서는 소리도 빛도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명명한 “당신” 은 과연 누구일까. 1970년 11월에 태어난 시인은 1970년 2월에 양쪽 손목을 칼로 그어 죽은 화가와 자신이 죽음과 생명 사이 (마크 로스코와 나 - 2월의 죽음)에서 비슷한 모양의 영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소개되는 일화는 ‘바람이 분다, 가라’ 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당신” 은 내가 하나의 점으로 잉태되던 순간 죽음을 선택해버린 화가이다.
내가 생겨나던 그 순간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나’ 의 명료한 삶이 결국 불가해한 어둠(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을 은연중 일깨워준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삶이 탄생하고 어둠으로부터 빛이 탄생했다. 이 시의 화자가 이러한 사실을 거대한 추상화의 침묵 속에서 깨닫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우리는 언어가 그림의 침묵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소리도 빛도 없는 공간에서 ‘나’ 의 실핏줄에 스며들고 있는 “당신 영혼의 피” 를 우리는 언어의 영혼이라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 새벽에 들은 노래,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에 실린 두번째 시이다.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가장 간결한 말로 이루어진 시에 속하지만 어쩐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썼을 것만 같은 시다. 빛과 어둠의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이 비친다. 절반쯤 죽은 넋은 이제는 껍데기로만 남은 타락한 언어를 가리키는 것일까.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가 가진 넋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인은 반쯤 죽은 언어의 넋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가만히 “입술을 다문다.” 언어가 타락한 세계를 애써 거절하는 방법은 오로지 침묵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가 주는 고통을 뚫고 나가는 것을 숙명으로 삼는 시인의 의지가 이러한 소극적 행위에서 멈출 리 없다. 자신의 피 흘리는 육체를 담보로 세계의 타락을 증명하고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시인은 이제, 죽은 말에 대한 애도를 넘어 그 죽은 말을 되살리는 방법까지 생각해보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입술을 꽉 다문 채로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이라고 천천히 말해보는 이 시의 나 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를 연상케 한다. 말을 배울 때 우리가 처음 접히는 것은 오로지 재귀적 용법만을 갖는 명사들이다. 그 무엇의 이름도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인 말들의 존재를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과 언어의 넋이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말과 동거하는’ 시인의 숙명이자 환희라고 이 간결한 시는 말해주고 있다. 일상의 언어에 익숙해진 혀를 녹인 이후에 비로소 천천히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들이 모여 비로소 시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이 시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죽은 나무에 손을 뻗는 글쓰기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는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한강이 거의 20년 만에 묶는 첫 시집이다. 한강이 오랫동안 써 온 시를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그녀에게 소설보다 시가 먼저 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가 아주 천천히 씌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 허리를 접고 / 무릎을 부루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지워진 단어” (심장이라는 사물)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한강은 시인이 된 이후부터 줄곧 언어와 한몸이 되어 언어의 타락을 앓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고통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껏 한강의 소설이 보여주었던 상처받은 영혼들은 침묵에서 진실된 말을 건져 올리려는 시를 쓰는 한강 그 자신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이 시집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마치 태양을 쏘아보듯 형형한 눈빛을 드러내보이던 인물들도, 꿈속의 이미지에 몰입하던 인물들도, 그리고 침묵의 그림과 마주한 채 천천히 붓질을 하던 인물들도 모두 시인 한강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에 그림과 말은 분절되지 않는 침묵의 공간을 그 기원으로 공유하고 있다. 말과 동거하는 인간으로서 한강은 침묵의 그림을 그리는 시인이자, 그러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소설가이다. 암흑과 침묵 속에서 시를 쓰는 한강이 있고,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소설가 한강이 있다.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의 실재가 궁금했던 사람들은 이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를 펼치면 된다.
이 시집에 안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 - 영혼’ 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죽은 나무를 향해 부서진 손을 뻗는 듯한 한강의 고통스러운 글쓰기 작업은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될 것이다. 살아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달의 그림자에 가려 붉은 테두리로만 존재하던 태양이 개기일식이 끝나는 순간 다시금 짗을 내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강의 더딘 작업속에서 훼손된 언어와 영혼이 본연의 빛을 되찾는 순간을 분명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친다.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 저녁의 소묘 5,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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