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무언가 부족한 저녁
여기에 앉아보고 저기에 앉아본다
컵에 물을 따르기도 하고 술을 따르기도 한다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 저녁이다.
저녁에 대한 이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차로에서, 시장에서, 골목길에서, 도서관에서, 동물원에서
오래오래 서 있고 싶은 저녁이다
빛이 들어왔으면,
좀더 빛이 들어왔으면, 그러나
남아 있는 음지만이 선명해지는 저녁이다
간절한 허기를 지닌다 한들
너무 밝은 자유는 허락받지 못한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모여드는 저녁이다
시멘트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검은 나방들,
나방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눅눅한 날개 아래 붉은 겨드랑이가 보이는 저녁이다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
덤불 속에서 낯선 열매가 익어가는 저녁이다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 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 …… 쌍용자동차
75피트 …… 현대자동차
462피트 …… 영남대의료원
593피트 …… 유성
1,545피트 …… YTN
1,837피트 …… 재능교육
2,161피트 …… 콜트-콜텍
2,870피트 …… 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무끼는 손들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물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들, 부서진 문장들
그들이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 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상처 입은 혀
너는 혀가 아프구나,
어디선가 아득히 정신을 놓을 때
자기도 모르게 깨문 것이 혀였다니
아, 너의 말이 많이 아프구나
무의식중에라도 하고 싶었던,
그러나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가버린,
그 말을 이제야 듣게 되는구나
고단한 날이면 내 혀에도 혓바늘처럼 돋던 그 말이
오늘은 화살로 돌아와 박히는구나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음을 지나야
얼마나 뼈저린 비참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혀의 뿌리와 맞닿은 목젖에서는
작고 검고 둥글고 고요한 목구멍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이 말이 아니다
독백도 대화도 될 수 없는 것
비명이나 신음, 또는 주문이나 기도에 가까운 것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 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거리는 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아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이생에서 우리가 주고받을 말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러니 네 혀가 돌아오더라도
끝내 그 아픈 말은 들려주지 말기를
그래도 슬퍼하지 말기를,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별처럼 박혀 있을 테니까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나희덕 시인의 말
한 손은 사랑에게, 다른 한 손은 죽음에게 건네려 한다. 아니다. 사랑과 죽음을 어찌 한 손으로 감당할 수 있으랴.누추한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여린 손등은 죽음 앞에, 거친 손바닥은 사랑 앞에.
- 2014년 1월 나희덕
떠난 자는 떠난 게 아니다. 불현듯 타자의 얼굴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그들은 떠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고, 끝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것들은 대체로 부재중이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
어떤 상실의 경험은 시가 되는 것을 끈질기게 거부한다.
그러나 애도의 되새김질 역시 끈질긴 것이어서 몇 편의 시가 눈앞에 부려져 있곤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려는 불가능한 호명, 시.
해설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말
남진우
죽음의 나무
흔히 시인들은 시집 첫머리에 자신의 시적 지향이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담은 ‘서시’ 성격의 작품을 배치해두곤 한다. 나희덕의 일곱번째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의 제일 앞장에 실린 ‘어떤 나무의 말’도 그런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 어떤 나무의 말, 전문
초월적 존재를 향한 호소와 간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생명력의 화려한 개화를 지향하는 에로스적 충동이 아니라 소멸과 쇠락을 향한 음울한 죽음충동을 표출하고 있다. 한 그루 나무로 설정된 화자는,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마른 가지의 이미지를 통해 더 이상 외계로 뻗어 나가는 운동이 불가능해졌음을 토로한다. 그에게 다시금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는 입김이나 옷깃 같은 외부의 자극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는 잎사귀나 꽃을 피우는 대신 차라리 내부로의 유폐를 꿈꾼다.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 퇴각한 채 무감각한 상태, 내적 세계에 봉인된 상태에 머물기를 희망한다.이러한 과정의 최종 국면은 스스로 죽은 자의 시신을 담는 관 棺 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나무의 남근적 형상은 무언가를 담는 관 棺으로 변주되면서 빈 구멍의 여성적 형상이 된다. 동시에 그 관은 담는 주체와 담기는 대상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안과 밖,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진, 완벽하게 밀폐된 죽음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피어나고 나부끼는 생명의 약동 대신 천천히 고사 枯死 해서 텅 빈 껍데기로 남는 상징적 자살을 택하고자 한다. 그것은 조용하고 완만한 죽음이며 물질적, 육체적 현존을 거부하고 내면으로 끝없이 침잠하는 오랜 여정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 그려진 나무는 신화속에 등장하는 죽음의 나무 Totenbaum 의 계보를 잇고 있는 존재이다. 그는 살아 있는 상태로 화석이 되었으며 사자 死者 를 영원한 잠으로 인도하는 뗏목 - 배 - 교량이다.
감미로운 생명의 유혹을 거부하고 죽음의 부동 상태, 그 영원한 휴식을 갈망하는 이 시에 두드러진 것은 삶의 ‘덧없음 transience’ 에 대한 감각이다. 소멸이 숙명인 존재에게 나부끼는 황홀 로 요약되는 과도한 생명의 환희는 부담이나 억압으로 작용할 뿐이다. 화자는 외부와의 교섭을 거절한 채 한사코 자기 안의 차단된 영역, 보호받는 영역내에 머물고자 한다. 번잡하고 소란스럽고 혐오스러운 삶 - 세계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오직 순수한 죽음충동에 헌신하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 저변에 단지 견인주의나 금욕주의적 취향을 넘어서는 우울증의 징후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쪼개질 수조차 없이 가늘어진 마른 가지의 형태가 말해주고 있듯이 화자는 현재 창조적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돼 있다는 느낌에 빠져 있다. 유기체 특유의 감각과 밀도를 상실한 존재는 실존적 무력감에 직면해 있으며 산 채로 무덤 속에 들어온 듯한 공허감에 사로잡혀 있다. 차디찬 죽음의 세계로 접근해가는 화자의 발언은 우울증의 황폐한 내면 공간에 얼어붙어 있는 화자의 무의식을 말해준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말라거나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말아달라는 화자의 기도는 단지 의례적 다짐이나 수사적 호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에로스적 향유에 대한 그 어떤 조짐이나 흔적도 단호히 부인,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불모성을 지향하는 의식은 역으로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강한 에로스적 친화와 생명력 넘치는 세계에 대한 욕망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그런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화자가 가진 무의식적 불안을 시사한다. 즉 죽음충동에 매혹을 표명하는 화자의 반리비도적 입장은 에로스적 충동에 몸을 던지려는 욕망의 유령적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황홀하게 피어나고 싶고 나부끼고 싶은 화자의 욕망이 자기 처벌, 자기 단죄의 형태로 회귀했을 때 위 시의 엄숙하게 고양된 허무주의로 현상한다. 정작 “당신” 의 입김이나 옷깃이 스쳤을 때 자신의 감춰둔 에로스적 열정이 어떻게 분출할지 몰라 화자는 두려워하고 있다.
이처럼 죽음충동으로 무장한 주체는 죽음충동으로 위장한 주체이기도 하다. 화자는 모든 향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지만 바로 그런한 태도 -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에로스적 향유를 거절하는 것에서 향유를 누리고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다른 향유’ 는 나무라는 비극적 대속자의 초상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 나무는 욕망의 불, 관능의 불, 생명의 불이 서서히 꺼져가는 상황에서 운명이 자신에게 맡긴 배역을 묵묵히 수임하는 존재이다.
뿌리 - 뱀 - 뿔
나희덕의 시에서 무의식이 그려나간 궤적을 살펴보기 위해선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식물 이미지를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데뷔작 제목이 ‘뿌리에게’ 라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에게 식물 이미지는 아주 각별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주체와 타자가 친밀하게 몸을 뒤섞는 에로스적 세계를 표상하던 존재에서 점차 주체와 타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가 생기고 이러한 분리가 초래한 정신적 외상의 여러 징후들을 대변하는 존재로 그 모습을 달리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랑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던 식물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삶의 유실과 소진을 의미하는 나무 이미지가 전면화되고 있다.
대지에서 움트고 성장하는 식물은 흔히 부활의 생명을 상징해왔다. 이러한 지상적 생명력의 화신인 나무가 그녀의 최근 시에서 죽음의 화신으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 세 시편의 비교를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뿌리에게’ , ‘가을이었다’ , ‘뿌리로부터’ 이 세 작품은 대략 10년의 간격을 두고 발간된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로서 연륜의 깊이와 더불어 조금씩 변화해온 시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1)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 뿌리에게, 부분
(2)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에서 뱀이 울고 있었다. 방울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한 울음소리. 아닐 거야. 뱀이 어떻게 울겠어. 뒤돌아서면 등 뒤에서 뱀이 울었다. 내가 덤불 속에 있는 것인가. 뱀이 내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에 가려 뱀은 보이지 않았다. 덤불은 말라가며 질겨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자고 내게 말을 거는 것일까. 산길을 내려오는데 울음소리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뱀은 여전히 덤불 속에 있었다. 가을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다음날에도 산에 올랐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을 들여다보면 그쳤다 뒤돌아서면 다시 들리는 울음소리. 덤불이 앙상해질 무렵 뱀은 사라졌다. 낯선 산 아래서 지낸 첫 가을이었다.
- 가을이었다, 전문
(3)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족므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 뿌리로부터, 부분
나희덕의 초기 시 세계를 집약하고 있는 (1)은 “연한 흙” 으로 설정된 화자의 입을 통해 대지와 삭물의 부드럽고도 은밀한 친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지는 “착한 그릇” 이 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존재의 터전이 되어주며 “밝은 피” 라고 표현된 수분을 공급해 그 식물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이 어머니 대지는 심지어 “나를 뚫고 오르렴” 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파괴, 자기 소멸까지 불사하는 가없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식물의 뿌리가 땅속 저 깊은 곳으로 뻗어나가고 푸른 줄기가 햇살에 반짝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피를 뽑아주고 살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한 흙의 이러한 자발적 희생 덕분이다. 물론 그 희생에 일방적으로 고통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에 떤” 다거나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 노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흙의 절대적인 헌신 이면엔 서로 다른 존재가 교감과 합일을 통해 누리는 관능적 향유가 숨어 있따. 식물의 성장과 더불어 “단단해지는” 대지의 살이 다시금 “어느 산비탈 연한 흙” 으로 일구어지는 신생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흙과 뿌리 사이의 길고도 지속적인 사랑이 빚어내는 상호 순환의 운동에서 기인한다. 대지가 식물을 품고 길러내듯 식물은 다시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숨결이 뒤섞이고 피가 삼투하는 역동적 과정은 무기물과 유기체 사이의 거리가 무화되고 개별자가 만유 萬有 와 구분되지 않는 천진한 미분화 상태를 구현한다.
이러한 시인의 상상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충만성의 환상이다. 대지의 수고로운 노동은 흙과 식물 사이의 긴밀한 유대를 낳는다. 모자지간인 동시에 연인 사이이기도 한 이들은 “깊은 곳” 에서 서로 감싸고 뻗어나가며, 흘려보내고 마시며, 상대방의 몸이 곧 자기 존재의 뿌리인 시간을 살고 있다. 역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빈 그릇 이 되어주는 존재, 목마른 타자에게 물을 대주는 먼우물이기도 하다. 뿌리가 목마른 것 만큼이나 연한 흙 역시 뿌리를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지 위로 뚫고 오르는 줄기의 상승 운동이 실은 지하로 뻗어 내려가는 뿌리의 하강 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상상력과 연결된다. 식물이 솟아오르고 뻗어 내려가며 공간적 확장을 하는 동안 대지는 갈구어진 연한 흙에서 단단해진 살로, 다시 산비탈의 연한 흙으로 시간적 순환을 거듭한다. 따라서 이 시의 화자가 사랑 고백의 형태를 빌려 전하고 있는 충만성의 환상은 타자 앞에 자신을 개방하는 존재의 무한한 수용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한 흙에 뿌리내린 식물은 유아기의 공생적 어머니에게 안긴 아기 이미지를 환기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는 탐색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뿌리에게 는 개별적 존재와 세계 사이의 상호 교류와 부단한 생성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이 시인의 나무 이미지는 이와 상반되는 성향을 드러낸다. 모성이나 생명사상과 관련지어 주로 이야기 되어온 시인의 상상력은 더 이상 연하고 부드러운 수용성의 공간으로 인도되지 않고 어둡고 공허한 소멸의 공간으로 치닫는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1)에서의 어머니와 그녀의 젖먹이 아이처럼 천진한 미분화 관계를 유지했던 대지와 식물은 (2)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점차 불모성으로 경도되는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이 시는 가을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말해주듯이 모든 것이 조락과 소멸로 이끌리는 운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1)에서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 던 나무는 (2)에서 “말라가며 질겨지고 있” 는 덤불로 변해 있다. 생명의 푸르름을 상실한 나무는 앙상해지면서 그 존재성을 박탈당해가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환청속에서 듣는 뱀의 울음소리는 말라 죽어가는 덤불이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소리는 모든 죽어가는 존재, 시들어가는 존재가 살아 있는 화자에게 타전하는 은밀한 신호에 다름 아니다.
표면적으로 (2)에는 뿌리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식물의 뿌리가 일반적으로 대지 아래 숨어 있듯 이 시엔 뿌리가 가시적 지평 위로 드러나 있지 않다. 대신 그 뿌리는 다른 형태로 시에 현전한다. 상상력의 비약이 조금이나마 허락된다면, 이 시인의 데뷔작에 나왔던 뿌리가 이 시에선 뱀 이미지로 변신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뱀은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대지적인 동물로서 “식물계와 동물계를 잇는 연결선” 이다. 즉 뱀이 동물화된 뿌리라면 뿌리는 식물화된 뱀이다. 식물의 뿌리처럼 뱀은 지하의 어둠 속, 망자들의 왕국에 거주하는 주민이다. 그의 느린 움직임은 어두운 지하세계의 내면적 광대함을 말해준다. 이렇게 본다면 (2)에서 뱀이 우는 소리는 뿌리가 우는 소리, 가을이 깊어갈수록 점차 앙상해져가는 덤불의 뿌리가 지하의 어둠 속에서 사행 蛇行 하며 내는 소리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서 여전히 덤불 속에 있는 뱀은 바로 그 덤불의 뿌리, 덤불이란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는 출발점이자 회귀점이다. 그런 점에서 (2)에서 뿌리의 매복은 여러겹의 차원에 걸쳐져 있다. 뿌리는 뱀이라는 전혀 다른 종으로 변신해 시에 숨어 있으며 보이지 않는 그 뱀 - 뿌리는 소리로서 겨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다가 그마저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뱀은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에서 울고 있으며 화자는 세계 이편에서 그 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뱀의 사라짐은 대지의 심층으로의 잠행이, 내밀성에 대한 충만한 환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세계 속에 화자가 버려졌음을 나타낸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성숙해가는 존재들, 그 존재들 간의 자연스러운 친화와 소통이 허락되는 세계, 이 모든 것이 점차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 시에서 말라가며 질겨지는 덤불은 사계절의 순환과 그에 따른 생명의 부활을 예고하지 않고 모든 유기체의 활동과 신진대사가 멈춰버린 후 광대한 침묵과 부동 상태로 수렴되어가는 과정을 가리켜 보인다.
(2)는 “가을이었다” 라는 구절의 반복이 암시하듯이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화자가 느낀 감회를 극화한 작품이다. 그 뱀 / 덤불은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그 소멸의 슬픔을 향유하고 있다. 청춘기를 지나 완만하게 자신을 확장해가던 존재도 어느 순간 서서히 자진 自盡 하면서 무화해가는 여정을 밟지 안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뱀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이를 미리 애도하는 울음소리이며 어머니인 대지와의 근원적인 접촉을 상실한 지상의 존재가 내는 애통의 소리이다.
(3)이 보여주는 것은 이처럼 대지로부터 탈주한 존재가 상승의 극점에서 느끼는 비탄의 감정이다. 화자는 자신이 한때 “뿌리의 신도” 였지만 지금은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다고 말한다. 뿌리로부터 온 존재가 어느 순간 자신을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존재로 상상하게 된 데에는 삶 / 죽음에 대한 전도된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삶으로부터, 근원으로부터, 모성으로부터 달아나는 자이다. 지하의 생명력을 나타내던 뿌리는 땅속에 수동적으로 묻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파고드는 존재였다. 그 뿌리는 머나먼 과거로, 깊은 심층으로 뻗어내려가며 죽음의 영지에서 환한 생명을 길어내었다. 그러나 대지의 자력에 끌려 내려가는 뿌리와 달리 허공으로 수직 상승하는 길을 택한 줄기는 오히려 그러한 생명을 향한 운동의 끝에서 “하염없이” “희박해” 지고 “흩날리” 는 소멸의 운명 앞에 당도한다. 지하의 뿌리 대신 지상의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잎으로 현전한 나무는 무한히 텅 빈 허공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존재가 된다. “뿌리는 신비한 나무인즉, 지하의 나무, 뒤집힌 나무다” 라는 바슐라르의 명제를 다시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지상의 나무, 무한 허공을 향해 상승하는 나무는 뒤집힌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허공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줄기와 가지는 바로 “밝은 피” 를 제공해주는 모성적 대지와 단절된 채 시들어가는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뿌리는 허공을 달려나가는 뿔, 불교의 오래된 경전에 나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질주하기를 꿈꾸는 무소의 뿔이 된다. 한때 뱀으로 은밀히 변장해서 출현한 뿌리는 여기선 다시 뿔이라는 동물적 존재의 일부로 변신해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현존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 - 뿔은 유기체 특유의 생명력과 유연성을 잃어버린 채 시들어가고 쇠락해가는 단계를 밟아나간다.
시인은 이처럼 식물적 이미지에 흔히 수반되는 근원회귀, 뿌리로의 돌아감이라는 연상의 궤적을 따라가지 않고 정반대되는 충동을 향해 몸을 던진 존재의 비극을 투시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 조건에 포박된 피조물이 감내할 수 박에 없는 숙명에 대한 경건한 드러냄인 동시에 그것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이다. 즉 뿌리 - 뿔로 표상되는 헐벗음 · 메마름 · 사라짐에 대한 시인의 매혹 - 시인 자신이 한 산문에서 마른 열매에 비유한 건조의 방식 - 저편엔 존재의 석화와 무화가 궁극적으로 초래할 죽음에 대한 욕망이 가로놓여 있다. 그는 축축한 생명력과 타성적 현존 대신 생명의 물기가 다 빠져나간 다음의 건조한, 방부 처리된, 사후의 평안을 그린다. 그가 당신 이라는, 한때 지상적이었지만 이제는 초월적 위치에 올라가버린 청자를 향해 건네는 말에는 체념과 달관, 안타까움과 허허로움이 공존하고 있다.
느린 죽음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나희덕의 시에서 식물 이미지는 근원회귀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극적인 방향, 즉 허공으로의 가뭇없는 사라짐을 꿈꾸는 방향으로 전개돼왔다. 위로의 상승은 성장의 당연한 귀결이지만 나무에게 구원이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불모의 차가운 세계에 직면케 하며 자기 존재의 근원과의 격절을 가져온다. 그런 의미에서 허공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나무줄기는 시인이 무의식 속에서 치르는 자기 처벌의 한 양식이라 볼 수 있다. 자기만의 내적 세계에 유폐된 채 주체는 느린 죽음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은 한 정신분석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도달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사랑의 상실을 애도하는 삶” (스리스테바 ‘부성, 사랑, 그리고 추방’)이다. 외상적 사건에 직면해서 자기 자신을 공물 offering 로 바치는 검은 미사를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는 우울증의 징후를 띠고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주체는 상시적으로 병리적 애도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유기 우울증 abandonment depression 에는 대상 살실의 비탄과 자기 홀로 버려지고 남겨졌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있다. 우리는 이번 시집 곳곳에서 리비도가 부여된 대상을 포기하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상실한 타자를 떠나 보내는 심리적 여정을 그린 시편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2분에 실린 상당수 시편들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하직한 “너” 라는 존재에 대한 애도를 연작의 형태에 담고 있다.
너는 잔에 남은 붉은 포도주를
도로에 다 쏟아버렸다
몇 방울의 피가 가로수에 섞이고
유리조각들이 아침 햇살에 다시 부서졌다
빛의 쐐기들이 눈에 박혔다
핏자국마다 이슬이 섞여
잠시 네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너와 함께 듣던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른 풀 위로 난 바퀴 자국,
황급히 생을 이탈한 곡선이 화인처럼 찍힌 아침
- 그날 아침, 부분
황급히 생을 이탈한, 아마도 근친으로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애도는 교통사고 현장을 확인하고, 유품을 인도받고, 시체보관소를 찾아가고, 고인이 살던 집을 방문하고, 묘비명에 쓸 구절을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거듭 반복 재생된다. 화자는 사라진 대상에 중독돼 있으며 상실한 대상의 방어적 이상화에 골몰해 있다. 교통사고 현장에 난 핏자국을 묘사하며 “너는 잔에 남은 붉은 포도주를 / 도로에 다 쏟아버렸다” 라고 표현한 것은 사자를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으로 본 상상의 결과이다. 피가 동물성 포도주라면 그의 피흘림은 대지에 바치는 헌주라 할 수 있다. 시체보관소의 침대에 누운 사자의 몸을 만져보며 “피부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피부의 깊이) 라고 말할 때 화자의 비탄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삶과 죽음 사이의 먼 거리, 그 깊은 심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불가능성은 주체를 텅 비게 만들며 끝없는 정서적 허기 상태에 몰아넣는다. 이들 애도 시편은 상실과 고독의 바다를 항해하는 영적 오디세이의 노래로서 나/ 타자의 융합 상태에서 떨어져나온 주체의 ‘상처 입은 홀로 있음’ 의 느낌을 증언한다. 그것은 다음 구절이 의미하듯 고통스러운 순수 고독의 지점, 존재의 무화 지점으로 수축되는 내면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방
거기 춥지 않아? …… 어둡지 않아? ……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어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 불투명한 유리벽, 부분
교통사고 당시 산산조각 난 차량의 유리 조각은 단단한 유리벽이 되어 삶과 죽음, 나와 타자 사이에 자리 잡는다. 그 벽은, 이번 시집에서 다채롭게 변주되듯이, “수평으로 된 수직” 이며 “통로인 동시에 장벽” (국경의 기울기)으로서 쪼개지는 순간 “열린 눈동자” (벽 속으로) 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아주 좁은 계단)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벽은 견고한 차단·유폐·봉인의 상징이지만 한순간에 균열이 가거나 내파되어 다른 세상을 향해 열린 틈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주체의 내면의 심층에 자리 잡고서 그녀의 영혼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하고 실존적 무력감에 직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그녀는 간신히 힘겹게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the capacity to be alone 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혈육의 죽음을 노래한 이들 시편 외에도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이 타인의 죽음이 초래한 슬픔을 기리고 있다. ‘식물적인 죽음’ 처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떤 시인의 죽음을 추모한 시도 있고 ‘아홉번째 파도’ 처럼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남긴 사건에 대한 감회를 담은 시도 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애도 대상에 대한 점착성의 리비도를 점진적으로 철수하는 과정이지만 거기엔 죄의식과 자기 처벌 욕망이 뒤따른다.
그러기에 시인은 ‘추분 지나고’ 라는 시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를 보여줄 수 없지만 / 그가 없다는 것도 보여줄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고통을 “어둠이 등뼈에 불을 붙이고 / 등줄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라고 표현하고 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난다고 그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밤이 지나면 / 독수리가 간을 쪼러 다시 찾아오겠지만” 이라는 구절이 말해주듯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겪은 내밀한 고통을 끝없이 반복해서 겪어야 한다. 자기애적 상처에 대한 극도의 민감성에서 벗어나 상실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이처럼 프로메테우스의 열정과 수난을 되풀이하는 과정이다. 대상의 상실이 남겨놓은 공백을 아물게 하는 사랑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
분리와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성과 전체성을 찾고자 하는 화자의 욕망은 주위에 펼쳐진 사물이나 스쳐 지나가는 사건에서 사랑의 미세한 징후를 포착해낸다. 자기 파괴적인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정체되고 폐쇄적인 심리 상태에 갇혀 있는 주체에게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여는 순간이 찾아든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능력이며 그런 능력의 회복은 힘든 노력에 의해서만 간혹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고갈된 에너지와 정서적 허기에 처해 있던 주체 앞에 친밀성과 충만성의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드물기는 하지만 이 시집에서도 공허와 무 無 를 향해 달려가는 정서와 대극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상상력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시편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타자의 부재가 남긴 공백을 채우는 부드러운 에로스의 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흙과 물기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풀의 신경계는 뻗어간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풀은 풀과 흔들리고 풀은 풀을 넘어 달리고 매달리고
풀은 물결기계처럼 돌아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을 때까지
풀의 신경섬유는 자주 뒤엉키지만
서로를 삼키지는 않는다
다른 몸도 자기 몸이었다는 듯 휘거나 휘감아들인다
가느다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따
- 풀의 신경계, 부분
무한 상승 도중에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나무의 형상과 달리 위 시에서 풀의 부드러운 운동이 보여주는 것은 끝없는 생산과 자가 번식의 풍경이다. 풀들은 뒤엉키고 휘감으면서 소용돌이를 이루며 퍼져나간다. 다시 바슐라르를 끌어들이자면 풀은 제아무리 똑바로 서 있다 하더라도 멀리서 보면 수평으로 펼친 선을 형성한다. 이 풀의 수평/수직 운동이 지닌 유구한 의미에 대해선 한국 현대시사만 더듬어보더라도 이미 숱한 탐구의 선례를 만날 수 있다.
나무의 수직적 단일성을 배반하는 풀의 수평적 확산은 대지를 에로스의 물결이 흘러넘치는 열정적인 생성의 공간으로 만든다. 나와 타자가 공생하는 이 공간은 시인의 데뷔작 ‘뿌리에게’ 를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타나토스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기쁨을 탈환하기 위한 존재의 분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시의 결구 “풀은 너무 멀리 간다 / 더이상 서로를 만질 수 없을 때까지” 가 말해주듯이 풀의 수평적 확산 역시 종국엔 분리와 유기의 타나토스적 영역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풀의 운동이 보여주는 친밀성과 충만성의 환영적 진실은 그 자체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식물의 에로스적 결합보다 더 눈물겨운 결합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메바의 움직임을 들 수 있다. 시인의 시에서 뿌리로 상징되는 식물적 근원회귀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퇴색한 것과 달리 다음 시는 동물적 근원회귀라 할 수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직되고 단절된 뿌리나 고목의 가지와 달리 아메바의 섬모는 부드럽게 헤엄치면서 서로를 끌어안는다.
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부분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 /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낸 것뿐이다 /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라는 구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삶 속에는 태고의 신비가 드러나는 많은 기적이 순간이 숨어 있다. 그것은 진화론적 도식에 입각해서 보자면 퇴행이지만 거대한 존재의 연쇄가 빚어내는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래서 “물에서 뭍으로 옮겨 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쳤지만 지금도 우리 인간은 “팔과 다리가 없어도 / 지느러미가 지느러미를 만지던 걸 기억” (당신과 물고기) 할 수 있다. 하등한 원생동물에서 고등한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삶은 우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만남과 사랑의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휠체어와 춤을’ 에서 화자는 춤을 출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휠체어에 앉은 사람에게 춤을 청한다. 휠체어에 탄 채로 최선을 다해 춤을 추는 그의 감동적인 모습은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 다. 화자는 자신과 그가 어울려 빚어내는 춤의 동작에 대해 “찢어진 땅을 꿰매는 풀처럼 / 갈라진 파도를 합치는 바람처럼 / 한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을 데려왔” 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시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에서 도로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여자 노숙자는 “하나밖에 없는 담요” 로 개를 감싸주며 그 개를 안고서 잠을 청한다. “잠든 개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 이 온기가 남아있는 동안은 견딜 만하다고 중얼거리” 는 그녀의 모습에서 소외되고 버림받는 존재들의 슬픈 유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음 시가 될 것이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들어왔고
치킨샐러드를 먹던 남자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울다 웃다 울다 웃다
두 남자는 마침내 끌어안고 키스를 길게 나누었다
남자의 혀와 남자의 혀가 엉기는 동안
침과 침이 섞여드는 동안
그들의 입속에서 밀려다니고 있을
닭가슴살과 양상추와 파프리카와 콘플레이크,
누르스름한 머스터드 소스,
서로의 혀와 팔에서 풀려난 그들은
남은 치킨샐러드를 먹어치웠고
정작 먹먹해진 것은 체스판 이쪽의 관찰자였다
- 밤 열한 시의 치킨샐러드, 부분
늦은 저녁 시간 낯선 이국 도시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조우하게 된 이 사랑의 장면은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소수자인 두 인물이 빚어내는 애틋하면서도 간절한 순간에 대한 담백한 소묘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혀끝으로 다른 혀를 찾고” 있는 풀이며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아메바이다. 그들이 입속에서 떠다니는 음식물 만큼이나 그들의 사랑은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조야하게 질척거리며 지속될 것이다. 밤 열한 시를 가리키는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겹쳐졌다 분리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키스는 덧없으면서도 더없이 숭고한 삶의 진실을 상연하고 있다.
도래하는 말
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부분
결국 사랑이란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 말을 넘어서는 세계의 현존 앞에서 시인은 “자꾸 말을 더듬고 / 매순간 다르게 발음하는 의성어들이 끓어오르” (풀의 신경계)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말을 하는 것을, 말을 계속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목구멍에서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 “말이 말이 아니” 게 되어버린 세상에서도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별처럼 박혀 있을” (상처 입은 혀)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무언가, 아직 오지 않는 것” (무언가 부족한 저녁)을 기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은 바로 어느 날 그를 찾아올 목소리이며 궁극적으로 그가 쓰고자 하는 한 편의 시일 것이다.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부분
이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말은 당연 말 馬 인 동시에 말(언어)이다. 아마도 인어공주로 여겨지는 화자는 지금 죽음으로부터, 무의 바다로부터 귀환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다. 시 쓰기란 한때 그 안에 존재했으며 그로부터 출발한 언어를 다시 세계로부터 돌려받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 과정은 역으로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온 세상의 말들을 다시 한 마리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존재의 시원인 바다에서 시인이 만나는 무수한 말들과 그가 내보낸 한 마리 말, 이들의 상호순환적인 움직임은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이란 구절이 말해주듯 무의 허공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도약을 의미한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을 재현해줄 수 있는 기표의 도래를 무한히 예감하며 기다리는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무에서, 무로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이다.
진화의 축을 거슬러 아직도 “아가미와 지느러미의 시절을” (당신과 물고기)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새-여자” 이자 “물고기-여자” (들리지 않는 노래)이다. 무한 허공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는 나무에서 저 무의 바다 앞에 선 여인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는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 의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 (진흙의 사람) 이 숨어 있다. 삶의 어떤 단계에 도달하면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시기가 도래한다. 죽은 자들의 고요한 침묵과 평화를 교란하지 않고서 그들을 삶의 공간으로 불러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나희덕의 시는 그 지점을 향해 조용히 한없이 다가가고 있다.
'시 좀 읽어볼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시영 시집 - 나비가 돌아왔다 (3) | 2024.11.01 |
---|---|
류근 시집 - 상처적 체질 (5) | 2024.10.12 |
한강 시집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9) | 2024.09.20 |
류근 시집 - 어떻게든 이별 (9) | 2024.09.10 |
이병률 시집 - 바다는 잘 있습니다 (9) | 202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