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이시영 시집 - 나비가 돌아왔다

HUSH 感나무 2024. 11. 1. 20:15

 

 

 

 

 

이시영 - 2021 - 나비가 돌아왔다

 

 

 

 

 


 

 

 

 

 

목월 木月 선생

 

성심여고 후문에서 산천동 깔그막 용산성당 올라가는 길, 누가 뒤에서 이 군!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키 큰 목월 선생이 거기 서 계셨다. 이 군, 시는 그렇게 쓰면 안 된데이. 반가움에 왈칵 달려갔더니 선생은 안 계시고 웬 낯선 청노루힐빌라.

전차 종점 가까운 원효로4가, 낡은 제과점 봉투를 든 선생께서 길을 건너고 계셨다. 선생님! 하고 불렀더니 돌아서시며 이 군인가? 들어가제이. 거기서 가까운 맑은 2층 목조 적산가옥.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 다다미방에 앉으며 말씀하셨지. 이 군, 시는 그렇게 쓰면 안 된데이. 지난주 드린 시에 일일이 붉은 밑줄 친 노트를 돌려주며 하시던 말씀.

오늘도 산천동 그 고갯길 오르며 문득 돌아본다.  이 군! 하며 부르는 소리 있을 것 같아.

 

 

 

 

 

 

 

 

 

 


 

 

 

 

 

호미씻이

 

백중을 얼추 앞두고 만벌매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그 집 머슴을 사다리에 태우고 주인집으로 향한다. 땡볕 아래 고된 초벌매기 두벌매기에 등이 휘어진 일꾼들이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놀이였다.

그날 해가 반 뼘쯤 남아 있을 무렵, 들가운데 논에서 출발한 사다리가 작은 머슴 낙식이 형과 큰 머슴을 태우고 우리 집 사립을 밀치고 들어서자 우렁우렁한 일꾼들의 목소리에 온 집 안이 흥성거렸다. 이때 주인은 통 크게 막걸리 몇 통과 돼지고기, 호박적 같은 것들을 내놓아 그들을 대접해야 하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밖을 한번 흘끗 내다보고는 사랑방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호미씻이에 들떴던 사람들이 두세두세 흩어지고, 얼굴에 숯검정 칠까지 한 낙식이 형이 송아지 같은 눈을 뜨고 한동안 마당 끝에서 서성거리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밤 나는 이슬이 내리는 평상에 누워 초롱초롱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커서는 절대로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돈암탕

 

어스름 무렵 북의 남대현과 남의 김훈이 백두산 밑 삼지연 려관 마당에서 만났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둘이 돈암국민학교 동기일 거라고 말해주어도 처음엔 서로 서먹하기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김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남대현을 향해 정릉천 쪽에 있던 돈암탕 알아요? 하고 물으니 남대현이 그 동네에서 제일 높던 빨간 굴뚝? 하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둘은 그날 밤 삼지연 매점 안 들쭉술을 다 마셔버려 남의 술꾼 이문재를 무척이나 섭섭하게 했을뿐더러, 다음 날 새벽 아무런 준비 없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천지에 오른 김훈은 자동차 시트로 온몸을 감싸고 매서운 추위에 오돌오돌 떨어야 했다.

 

 

 

 

 

 

 

 

 

 

 

 


 

 

 

 

 

듣는 사람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재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탑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긋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삭주구성

 

삭주구성 하면 제일 먼저 소월의 물로 사흘 배 사흘 /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 리 로 시작되는 <삭주구성>이란 시구절과 그가 한때 동아일보 구성 지국장을 했다는 것, 그리고 삭주가 고향인 리영희 선생이 국민학생 때 란도셀을 메고 그 앞을 지났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2005년 민족작가대회 차 평양 갔을 때 북의 문인들에게 백석의 행방을 물었더니 모두들 뜨악해 하는데, 그중 한 분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해 준, 삭주로 간 이후론 소식이 뜸하다는 것, 협동농장에 배치된 그의 농사 솜씨가 형편없어서 염소치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염소치기라면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 붙잡힌 후 아이들에게 먹일 게 빵과 옥수수밖에 없다는 아내의 편지를 받고 옥사한, 네루다가 아꼈던 서른한 살 서글서글한 눈매의 미겔 에르난데스라는 시인이 떠오르고, 또 하나, 백석의 단란했던 시절의 가족사진에서 본 둘째 아들의 모습이 젊은 백석을 그대로 빼닮았었다는 것도 생각난다.

 

 

 

 

 

 

 

 

 

 


 

 

 

 

 

나의 서울아산병원 방문기

 

잠실 시영아파트에 살 때 둔덕 건너 풍납동에 들어선 아산병원을 볼 때는 그저 흰 건물 하나가 들어섰구나 라고 심드렁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렀나. 아내를 데리고 3개월에 한 번씩 드나들 때마다 그곳은 병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도시. 직원 수만 7천여 명에다 세계 7대 병원 중 하나란다. 신관 주차장 B3에 주차해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B1에 오르면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 온갖 열대 과일이며 베이커리, 명품 음식을 파는 푸드 코트가 이어진 긴 회랑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동관 저층 엘리베이터 앞. 그런데 식당가에서 마주치는 휠체어 탄 환자와 보호자 들, 그리고 유모차를 끌고 나와 쇼핑하는 듯한 젊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동관 4층 정신건강의학과 김성윤 교수 예약 시간은 오후 1시 45분. 내방객들은 많고 적은 수의 간호사들은 코로나19 때문에 환자와 보호자 들을 일일이 체크하느라 정신없었다. 짧은 진찰 끝에 처방전을 받아 입구에 설치된 기계에 바코드를 찍고 계산하고 약국을 지정하면 이번엔 동관 후문. 여기서 가장큰현대아산약국 안내원을 찾아 그가 호출한 차량에 탑승하면 한참을 굽이돌아 정말 큰 현대아산약국. 입력된 약을 타고 계산을 하고 뜨거운 믹스커피 한 잔. 약국 차로 돌아와 손소독제를 바르며 신장내과, 청년당뇨검사실, 채혈실 등이 늘어선 신관 긴 복도를 걸어 이제 B1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B1 끝에서 한참을 기다려 주차장 B3.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확인하여 차를 찾은 뒤 이번엔 주차 요원의 도움으로 앞뒤를 가로막은 덩치 큰 SUV 차량들을 밀쳐내고 B3를 빠져나오는 데만 30여 분. 차는 올림픽대로를 따라 천호동 쪽으로 가다가 유턴하여 올림픽대교를 탄다. 거기서 다시 강변 도시고속도로로 연결된 두번째 출구를 찾아 나가면 드디어 마포행. 휴우, 오늘 나의 서울아산병원 방문기는 여기서 끝난다.

 

 

 

 

 

 

 

 

 

 

 


 

 

 

 

시인 이시영은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신인작품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월, 바람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호야네 말, 하동 시선집 김 노래, 짧은 시,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시 읽기의 즐거움 등이 있다. 1980년 창작과비평사에 편집장으로 입사하여 23년간 일했고, 2006년부터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지훈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임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의 말

 

1994년에 무늬를 내고 무려 27년 만에 다시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낸다. 이 시집의 시들은 내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몸과 마음이 기진했을 때 시를 떠올리곤 했다. 무늬에 이어 기꺼이 해설을 맡아준 김주연 선생께 고마움을 표한다. 1970년대 청진동 가락지 시절 이후 그는 늘 나의 든든한 배후였다.

 

2021년 10월 이시영

 

 

 

 


 

 

 

 

  해설  

박 匏 의 긴~ 생애

김주연 문학평론가

 

 

 

순수의 회복은 가능할까. 시인 이시영은 나지막하게 묻는다. 그러나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에서 답은 벌써 주어져 있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잠시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함께 물어보아야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세상이 수직 이동한 지는 벌써 한참 지났고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생활 현실 속을 바야흐로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가 현실을 지배하는 가운데 카톡이나 페이스북 따위가 삶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작은 스마트폰 속의 영상과 글자 들이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한다. 악의적인 댓글 등의 문자 폭력으로 소위 극단적 선택 을 하는 사람들조차 줄을 잇는다. 드론과 무인 자동차 등이 사람들의 일자리에 들어서고 있으며, 낭만의 물레방아 자리에는 갖가지 성범죄와 고소 고발이 난무한다.

 

요컨대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되고, 더 급격히 보기 힘들어졌다. 인간과 자연 원래의 모습이 순수라면, 그 순수는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순수는 과연 회복 가능할까. 아니, 회복될 필요는 있는 것일까. 앞의 질문은 이시영의 것이고 뒤의 질문은 나의 것이다.

 

 

강변에 나비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것은 세계가 변하는 일이다

 

- 나비가 돌아왔다 전문 -

 

 

표제작이기도 한 짧은 삼행시 ‘나비가 돌아왔다’ 는 바로 이를 질문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물음과 답이 함께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시는 이미 강변에 나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제, 보고하고 있다. 더불어 강변이나 나비에 무심하게 살아온 우리의 마비된 감성과 몸을 툭 하고 건드린다. 나비가 강 따위 자연에는 무심한 채 우리 속의 아픔과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 있던 몸이 순간 움찔한다. 강변이나 나비쯤 ‘잊고’ ‘잃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문득 기억이 조금 살아난다. 그들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마치 고향처럼 정서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아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이 시집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늘하게 일러준다. 자, 그렇다면 시의 제3행이 말해주듯 그것은 과연 세계가 변하는 일 일까. 사라진 나비가 돌아왔다는 것은 자연을 몰아내었던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 자연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말해준다. 엄청난 변화다. 그러나 이것은 이시영 안에서의 변화다. 아니, 이시영에게서는 처음부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인의 마음이다. 하여간 그는 나비가 돌아왔다고 반가워한다. 이 반가움은 자연 친화적인 시인이 그동안 자연을 상실해온 현실에 대해 불만의 세월을 지내왔음을 반증한다. 자연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이 시집의 풍성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서늘하다.

 

 

평택 들판의 황혼 녘, 할아버지 한 분이 염소를 끌고 가다 줄을 놓치자 이번엔 염소가 온 힘을 다해 할아버지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참 아름다운 저녁 한 장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 KTX에서, 전문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꽂히는 아침, 제비들이 처마 끝에 두 발을 얌전히 오그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 처서 處暑 전, 전문

 

 

닭들은 그 둥주리가 어디에 있든 간에 푸드득 날개 치며 사뿐히 마당에 내려앉아 자기가 금방 저기에 눈부신 뜨거운 알을 낳았음을 큰 소리로 알린다

 

- 알, 전문

 

 

인용 시들은 자연을 반가워하는 단시라는 특징 이외에도 그 자연물이 염소, 제비, 닭 등의 동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동물은 꽃, 나무 등의 식물, 그리고 돌멩이 따위의 광물과 달리 훨씬 능동적인, 움직이는 자연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시영의 동물은 역동적인, 거친 힘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제비들은 두 발을 얌전히 오그리고 앉아 있고 닭들은 사뿐히 마당에 내려앉 는다. 염소를 끌고 가다 줄을 놓치는 할아버지 대신 온 힘을 다해 할아버지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염소의 모습이 예외적으로 힘차게 보일 정도다. 즘생 이라는, 힘이 기대되는 동물을 제목으로 삼은 시에서도 고양이 한 마리의 에고이스틱한 모습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비록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행동 대신 명상을 즐긴다. 예컨대 늙은 오리의 명상 을 보자.

 

 

오리는 아침부터 물 위에 떠서

바다가 젊은 바다를 밀고 가듯

조용히 자기 자신을 한번 밀고 가보는 것이다

 

- 늙은 오리의 명상, 전문

 

 

이시영의 시는 따라서 길이가 길 필요가 없다. 동물의 어떤 움직임을 가볍게, 짧게 스케치해도 거기에 동물의 일생을 함축하는 그리하여 결국 생명의 기미를 포착하는 순간이 시화 詩化되는 것이다. 생명의 귀중함을 통한 자연의 존중은 식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조용히 순간을 관조하는 시인의 기질은 오히려 이쪽에서 더욱 일체감을 일구어낸다.

 

 

나는 박꽃이 있는 여름 시골집이 좋았다

박꽃은 넝쿨을 타고 올라가 초가지붕 위에 커다란 박들을 굴렸다

가을이 오면 저것들은 푹푹 삶아진 뒤 속이 텅 빈 바가지가 되어

겨우내 정지간 시렁 위에서 덩그렁덩그렁 울릴 것이다.

- 박꽃, 전문 -

 

 

이 시는 역시 짧은 길이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박의 긴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오묘함과 강인함, 그 질서를 드러내주는 탁월한 의미의 울림을 자랑한다. 박은 박꽃 넝쿨을 뻗혀 박을 만든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치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은 동물의 그 어떤 움직임보다 괄목할 만하다. 넝쿨이 뻗어나가는 모습, 그 얼마나 가관의 역동성을 보여주는가. 그렇게 도달한 가을날, 박은 아낌없이 그 내용물을 내놓는다. 그 어느 헌신과 열매가 이와 같으랴. 그리고 마침내 박은 자기를 모두 비운다. 그러나 이 비움은 공허하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이 시의 백미를 이루는 마지막 행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겨우내 정지간 시렁 위에서 덩그렁덩그렁 울릴 것이다

 

 

농가에서 흔히 휴업, 폐업, 동면의 계절로 이야기되는 겨울이 여기서 깊은 아름다움으로 살아난다. 그 아름다움은 덩그렁덩그렁 거리는 울림 속에서 싱싱하게 살아난다. 속이 빈 박의 소리는 실제로도 텅 빈 울림을 갖는데, 시인은 바로 그 울림을 덩그렁덩그렁 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이 울려주는 그 소리는 박을 통해 모든 사람의 귀와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데, 게다가 그 놓여 있는 곳이 바로 정주간 시렁 ‘위’라고 하지 않는가. 그곳은 바로 밥이 만들어지는 곳,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해주는 경건한 장소이다. 이 짧은 시의 촌스러운 울림이 담고 있는 엄중한 메시지가 문득 우리 모두를 일순 심각하게 뒤돌아보게 하는 이유다. 이처럼 박과 같은 식물을 통해서 주는 시적 교감의 감동은 시집 구석구석에 은밀하게 배어 있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물음 형태를 통해 우리를 깊은 사유로 이끌기도 한다.

 

 

봄면댁 안마당에 살구꽃 피었다

누가 있어 살구꽃 줍나?

봄면댁 뒷마당에 복사꽃 피었다

누가 있어 그 복사꽃 줍나?

 

- 봄면댁, 전문

 

 

목화밭 사잇길로 걸었네

가지 않은 길

목화밭 사잇길로 걸었네

아직 오지 않은 길

목화밭 사잇길로 걸었네

끝내 사라지지 않을 길

 

- 목화밭, 전문

 

 

봄면댁 에 나와 있는 풍경은 살구꽃과 복사꽃이 봄면댁이라는 집 마당(안마당 혹은 뒷마당)에 피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그림과도 같다. 그러나 이때 소중한 것은 화가에게 그렇듯이 시인에게도 그 모습이 포착되었다는 점,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다. 자연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현대인의 눈에서 그 자연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라져왔는가. 그러나 이시영의 눈에서 그 자연은 이 순간을 통하여 살아 있다. 특이하다고 할 것은, 그 순간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을 시인이 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묻는다. 누가 있어 살구꽃 줍나? 누가 있어 그 복사꽃 줍나? 

 

누가 는 물론 인간 아니겠는가. 여기서 누가없는 인간 이다. 자연 앞에서 부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은 시인에 의해 실재하는 인간으로 되살아날 것을 재촉받는다. 부재의 한탄이자 실재를 향한 조용한 외침이다. 살구꽃이나 복사꽃을 줍는 인간은 거의 없어졌지만, 시인 이시영에 의해 그 부활의 가능성이 이제 살짝 엿보이게 된 것이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괜찮은 시를 통해 열린다는 것을 여기서 알게 된다. 두번째 시 목화밭 도, 거창하게 말한다면, 비슷한 세계관 위에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목화밭 사잇길로 걸었네 라고 당당하게 자연과의 동행을 표명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을 걸었다는 진술에서 시인의 의연함이 드러난다. 아직 오지 않은 길 이라거나, 마지막 행 끝내 사라지지 않을 길 이라는 단호한 표현을 보면 시적 애매모호성마저 거부하는 자연과의 악수가 든든해 보인다.

 

시적인 서정이 좀 부족한가? 아니다. 그러한 시적 배려는 목화밭 사잇길 이라는 처음부터의, 그리고 반복되는 3행의 운율을 통해 충분히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사잇길 은 목화밭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의 사잇길 이라는 겹치는 뜻, 즉 중의성을 내포한다. 원숙한 중진 시인의 경지가 슬쩍 비치는 아름다운 배치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 아예 제외되고 오리의 세계가 그려지고 있는 두 편의 시 호수늙은 오리의 명상 은 절대시 絶對詩 (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시 라는 20세기 전반 일부 독일표현주의 시인들의 시) 에 가까운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작은 새끼 오리 한 마리가 잠수하면서 일으키는 물결무늬가

이처럼 드넓고 둥글게 퍼져나가니

이따만 한 우주가 품을 벌려서 그들을 꼬옥 안을 수 밖에

 

- 호수, 전문

 

 

호수늙은 오리의 명상 두 편이 모두 오리를 관찰하면서 씌어진 작품인데, 첫번째 시는 물결을 일으키는 오리의 아름다움과 능력에 대한 것이며, 두번째 시는 오리의 자기 성찰에 대한 시인의 관조이다. 공통된 것은 오리라는 동물이 지닌 자율적인 세계를 시인이 조용한 놀라움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결무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시인은 우주가 품을 벌려서 그들을 꼬옥 안 는다고 오리의 안과 밖을 예찬한다. 오리로 표상되는 자연의 위대함이 그 충분한 이유를 밝혀 보여준다.

 

 

 

상실된 자연의 순수성을 조용히 그리워하고, 담백하게 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시영의 시를 ‘정태적인 물상의 풍경’이라고 간단하게 칭송하고 지나가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의 시에는 무엇보다 역사의 왜곡과 허위에 대한 적발이 있고, 고단한 삶과 인생에 대한 달관의 유머와 풍자가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자연과 문명의 대립, 역사의 부조리에 대한 통한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에도 결코 그것을 무겁지 않게, 슬프고 비탄스럽지 않은 울림을 잔잔하게 던진다. 그것이 슬프다. 가령 참새네 가족  게 장수들이란 참!’  납품업자들! 등을 읽으면 인생의 깊은 바닥을 거쳐 나온 해학의 목소리가 우리를 문득 경건하게 한다. 가령 참새네 가족 은 그 한 편이 짧은 우화다.

 

 

아기 참새 세 마리가 날벌레 한 마리를 잡아 서로 제 것이라고 우기며 다투다가 그것마저 휭하니 하늘로 날려버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른땅을 쪼고 있는 강변의 오후

 

- 참새네 가족, 전문

 

 

짧은 서사를 지니고 있는 이 시는 시적 관찰자와 대상의 주체화, 그리고 간명하게 묘사하고 진행하는 시적 어법(이른바 포에틱 딕선 Poetic diction)이 어울려 가슴 찌르는 한 폭의 서정성을 완성하고 있다. 참새 세 마리가 날벌레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제 것이라고 다투는 모습 - 다투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시적 관찰자가 된 시적 화지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찰자의 판단과 묘사에 독자들은 슬그머니 동화된다. 이른바 객관의 주관적 이행이다. 그사이 날벌레는 휭하니 날아가버리고 참새들은 마른땅만을 쪼고 있을 뿐이다. 어느 강변의 오후 풍경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게 지나간 순간의 자연은, 그러나 엄청난 교훈을 던져준다. 

 

무심한 듯한 정력학 靜力學의 세계에 담긴 고요한 싸움, 그리고 무위의 모습으로 그려진 동력학 動力學이 보여주는 강한 암시의 교훈. 이시영의 이 에피그램 Epigram 의 기법은 가벼우면서도 무섭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진지함, Ernst의 가벼운 leicht 초월이 거기에 있다.

게 장수들이란 참! 이란 시도 재미있다. 재미 속에 숨어 있는 시퍼런 교훈의 엄중함. 그 교훈을 감추고 표면에서 왕래하는 시의 재미. 두 가지 능력을 함께, 짧게 운행하고 있는 시인의 유머 정신이 놀랍다.

 

 

연평 근해에서 잡혀 온 앞발 없는 꽃게 둘이 무거운 투구를 등에 인 채 너른 수족관 안을 천천히 옆으로 이동하는데, 이마에 뿔처럼 돋은 두 눈빛만은 겨울 바다처럼 쌩쌩하여 흐릿한 아침을 시퍼렇게 비추다.

 

- 게 장수들이란 참! , 전문

 

 

이 시의 요체는 제목에 있다. 내용에는 한 군데에도 언급되지 않은 게 장수들을 향하여 왜 시인을 혀를 차고 있을까. 앞발이 부러진 채 잡혀 온 게들의 두 눈빛이 쌩쌩한 것을 보고 시인은 문득 전율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 전율은, 가깝게는 생명 무시를 다반사로 하는 우리네 식생활과 환경을 백안시하는 오랜 악습에 대한 안타까움으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보면, 참새네 가족 에서처럼, 인생에 대한 진지한 경구가 거기에 담겨 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멀쩡한 생명에 대해서 주검의 칼날을 휘두르는가. 식생활을 포함한 우리의 일상이 사실상 이 같은 폭력으로부터 유래하고 있지 않은가.

산 채로 잡혀 온 게들을 보면서 이마에 뿔처럼 돋은 두 눈빛만은 겨울 바다처럼 쌩쌩하여 흐릿한 아침을 시퍼렇게 비추다 라고 묘사한 시인의 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게 장수들이란 참! 하고 힐난과 개탄의 음성을 뱉은 시인을 향하여 나는 오히려 시인 이시영이란 참! 하고 찬탄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러나 역시 이시영 시의 본질은 자연과 사람의 친화에 있고, 이는 오늘날 자연을 희화화하고 파괴하는 새로운 시의 경향들이 주목하고 반성해야 할 중요한 지점임을 강조하고 싶다. 시집을 열면 만나게 되는 첫 작품 누님을 생각함 을 보자.

 

 

누님은 잘 계시는지 몰라

우리 둘 이복이지만 동복보다 더 가까웠던 60년

전주 덕진 수목장 햇볕 잘 드는 언덕에 90 평생 외로웠던 뺨 대고 고이 누우셨으니

오늘 밤 별빛도 그 뺨에 사뿐 내리리

 

누님을 생각함, 전문

 

 

자연스럽게 두 대목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이복 동복 가리지 않고 가깝게 지냈던 남매의 정. 그것은 인간적 정이기도 하지만, 시와 문학의 세계가 펼쳐지는 공감의 통일의 유대이기도 하다. 이시영의 시에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내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공감과 통일로 하나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이에 대해서는 곧 다시 살펴보겠다). 다른 한 대목은 자연과 사람의 친화를 보여주는 끝부분, 오늘 밤 별빛도 그 뺨에 사뿐 내리리 라는 곳이다. 시인은 순수가 상실된 것들, 그중에서도 자연의 회복을 강조했던 만큼 여기서도 자연과 사람, 양자의 친화라는 측면에서 다시 주목될 필요가 있다.

 

자, 이제 공감과 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돌려보자. 이복과 동복을 한 형제라는 범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껴안는 시인의 통합 감각은 세상살이의 모든 면에서 두루두루 적용된다. 가장 넓은 차원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모습은 지금껏 보아온 바와 같거니와, 이념과 종교의 차원에서도 시인은 그냥 경계를 넘어 그저 무념하게 걸어가거나 바라본다.

 

 

그런데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김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남대현을 향해 정릉천 쪽에 있던 돈암탕 알아요? 하고 물으니 남대현이 그 동네에서 제일 높던 빨간 굴뚝? 하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둘은 그날 밤 삼지연 매점 안 들쭉술을 다 마셔버려 (……)

 

- 돈암탕, 부분

 

 

남과 북의 문인들이 만나던 때의 한 장면을 이시영은 이런 식으로 포착하고 묘사한다. KTX에서 속 할아버지와 염소가 서로 끌고 끌려가는 장면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는 공존, 화해, 통합 등의 단어가 아예 씌어지지도 않는다. 다소 원시적이며 원향적 原鄕的 인 감성 안에서 대조적이며 이질적인 두 상황이나 요소가 슬그머니 하나가 되는 것. 이시영 나름의 능력인데, 거기에는 원래의 심성 위에 통합에의 강한 소망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질성을 동화시킨으로써 통일의 화평을 지향하는 마음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부드럽게 나타난다. 다소 뜻밖이다.

 

 

채플 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토익 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목사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셨다고 한다. 바로 그때 목사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도 좀 듣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나?” (……) “아저씨는 누구신데요?” (……) 목사님이 가만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아침밥 먹고 그 밥값 하러 온 사람일세!”

 

- 아저씨, 부분

 

 

아내의 방 책상 위에 A4 용지 크기의 코팅된 글씨가 세워져 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

“구원해줘요! 나 갈게.”

몇 년전 일찍 세상을 뜬 상태가, 임종 직전 수녀인 동생 상숙과 나눈 대화다.

너무 짧다.

 

- 너무 짧다, 전문

 

 

해쓱한 얼굴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국립암센터 교차로

한 정숙한 어머니가 두터운 성경을 들고 전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길을 건너다 말고 나는 그분의 너무도 선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쳐다보다, 전문

 

 

드물게도 이 시집에는 기독교와 관계된 세 편의 시가 있따. 그러나 이 시들은 기독교 신앙의 어느 부분을 다루고 있지 않고, 물론 그에 대한 찬반의 논의로 개입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특이한 것은 기독교 신자나 교역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우리 문학이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다는 관습을 고려할 때 이례적이다. 나로서는 이 역시 공감과 통일이라는 이시영의 시학이 보여주는 관용의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하고 싶다. 가령 시 아저씨 에서 목사가 자신을 하나님 주신 밥 먹고 밥값하러 나왔다고 대답하는 융숭함이라니 - 그 융숭함은 보통 목회자의 언행을 도그마틱 Dogmatic 한 것으로 바라보기 일쑤인 일반적인 시선을 넘어서는 따뜻한 관대함과 넉넉한 시심이다. 시는 여기서 목회자와 일반인, 종교와 대중이 필경 하나임을 말해주는데, 과연 이시영 시의 푸근한 영역이다.

 

두번째 시에도 기독교에 대한 수용과 아쉬움의 양가감정이 거부감 없이 녹아 있다. 아내, 상태, 상숙 세 사람의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임을 소개하면서 너무 짧다 는 마지막 시행을 통해 그들의 대화가 짧다는 것인지 인생이 짧다는 것인지 혹은 통합의 순간이 짧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대로 그 메시지의 긍정적 수용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세번째 시에서 노상 전도 하는 여인을 가리켜 너무도 선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 적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너무도 선해 보인다. 기독교와 관계된 그의 이러한 관용 또한 세속과 종교의 화해라는 차원에서 주목되며, 더 넓게는 자연과 사람의 하나됨이라는 이시영 시의 본질적 틀에서도 이해된다.

 

서정시는 그 본질이 추억 Erinnerung 에 있다는 E. 슈타이거의 시론이 있지만, 이시영 시의 많은 부분은 추억, 혹은 기억을 그린다. 그러나 그 추억은 그곳으로 함몰되는 퇴영 아닌, 현재성의 모티프와 에너지가 되는 서정성으로 연결되는 힘이다. 이시영은 이러한 힘을 동양적인 감수성의 바탕 위에서 행한다. 시 안에서 모든 경계가 스르르 없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양적이지만, 현재성으로 스스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때로 옛이야기, 그와 결부된 장소나 물건이 길게 설명되는 경우가 있으나, 추억이 유발한 불가피한 현상일 수 있다(지나친 서사로 흐르는 일은 경계될 필요가 있따). 병들고 아픈 역사적 내상과 시인 자신의 상처를 말없이 함께 포개어가면서 반세기 넘도록 조용히 시업에 매진해온 이시영 시인의 원숙은 우리 민족서정시의 전통 위에서 이룩된 의미 있는 성취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