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황동규 시집 - 봄비를 맞다

HUSH 感나무 2024. 11. 7. 19:33

 

 

 

 

황동규 - 2024 - 봄비를 맞다

 

 

 

 

 


 

 

 

 

터키 에베소에서 만난 젊은이

 

이십 년 전 터키 에베소에서

노래하듯 원 달러 원 달러 건강한 목소리로

사진첩 내밀던 젊은이

팔고 갈 때 보니

관광객들 앞에서 봬주지 않던 절름발

심하게 절름절름.

지금 생각해도 그 청년

탁자 한 귀퉁이에 아슬아슬 놓인 찻잔 같다.

살 사람들 앞에서 그만큼 절름절름댔으면

사진첩 몇 권씩은 더 팔았을 텐데.

하나 그게 바로 인간이

자기 삶 사는 법도 아닌가?

 

숨을 잠시 멈춘다.

무언가에 마음이 주춤주춤.

나는 초년 고생도 불고 다니는 사람,

지난날을 헤집다가 그 젊은이 만나면

찻잔보다 마음이 먼저 엎질러진다.

 

 

 

 

 

 

 

 


 

 

 

 

생각을 멈추다

 

몸과 마음 고단해 조금 늦게 나선 산책길,

해 아직 남아 있을 하늘 쪽을

뭉게구름이 두텁게 막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 집 방구석에 무얼 가리고 있던 병풍처럼

하늘 한편을 가리고 있다.

전에 가렸던 것은 어린 나와 가까웠던 아이의 몸,

등 오싹해도 병풍 뒤가 궁금했지.

지금 구름이 가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허둥지둥 날고 있는 늦둥이 기러기 몇?

오늘 하루를 잊지 말자는 듯

천천히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아니면 지평선에 튕겨 어쩔 줄 모르는 해?

생각을 멈춘다.

엇박자 되더라도 가림 없이 살자,가

일찍이 내가 택한 길이지만

가릴 게 도통 없는 삶은 또 얼마나

접어서 골방에 세워둔 병풍처럼 슴슴할까?

 

 

 

 

 

 

 

 

 

 


 

 

 

 

조각달

 

닷새 전만 해도 제철 과일처럼 싱싱했던 그

아차 하는 순간 세상 밖으로 나갔다.

사는 동안 내가 말빚 톡톡히 진 친구.

빈소에서 쐬주 몇 잔 하고

돌아와 독주 두 잔 거푸 들이켜도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뜬금없이 창가에 앉아 있는 밤.

깜빡 정신 차려보니

하늘에 조각달 하나 박혀 있다.

눈 비비며 더듬는다.

오래전, 그래 참으로 오래전 어느 가을밤

아무리 해도 마음이 마음에 잡히지 않아

밤하늘 올려다봤을 때 처음 만난 조각달,

그 달이 전처럼 양끝 날카롭게 세우고 묻는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지?

대답 못해 머뭇거리자

그는 지금 한 점 혼불 되어

태양풍을 타고 있다.

지구에서 그와 두 번 세 번 헤어지지 말게.

 

 

 

 

 

 

 

 

 

 

 


 

 

 

 

어떤 동짓날

 

무슨 꿈이 이래?

새벽꿈에 질질 끌려다니다 눈떠보니

아직 밤이다.

일곱 시가 훌쩍 지났을 텐데

동향 창도 아직 캄캄이다.

눈뜨면 아침! 시동 걸 동지 며칠 남았지?

사흘, 나흘?

이런, 언제부터 동짓날 보채는 몸이 되었나?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번 동짓날 사당3동엔

바람이 불다 말다 할 것이다.

까치와 비둘기 들이 아파트 현관까지 날아와

땅을 쪼다 갈 것이다.

저녁엔 서달산

나무들이 높이 쳐들고 있는 빈 가지에

빨간 해가 걸릴 것이다.

동짓날답겠지.

 

하지만 바로 4년 전

이번처럼 보채던 날은 아니었지만 바로 동짓날,

그 빨간 해를 눈부시게 바라보던 다람쥐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 안 했어.

내가 그만 섰지.

순간 위험하다! 소리가 들렸어.

누가 왜 위험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지.

다람쥐 하나가 나무 아래 서 있었어.

목숨보다 더 한 것이 앞에 있다는 듯

내가 열 걸음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고개를 해 쪽으로 향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내가 덩달아 환해졌어.

 

 

 

 

 

 

 

 

 

 

 

 

 


 

 

 

 

태안 큰 노을

 

가을날 태안에 일보러 갔다가

큰 노을을 만났다.

섬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점점 굵어지던 붉은 수평선

하늘과 바다를 조금씩 덮어가다가

확 풀린다.

바다를 날던 새들이 하늘 속을 날고

바다 한가운데

길고 넓은 새 물길 하나 태어나

하늘보다도 더 밝게 출렁거린다.

달아날세라 꽉 붙잡고 놓지 않던 생각들

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이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밝은 물길에 뛰어들어 어깨춤 춘다.

마음이 빈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이때다!

이 노을 한 장 떠가지고 쾌히 떠날 채비하니

이런! 한두 장으로 떠가기엔

너무 환하고 장쾌한 노을.

 

 

 

 

 

 

 

 

 

 

 


 

 

 

길 잃은 새

 

우유 같은 안개가 창밖에 가득 낀 날

늦세수하고 방에 들어오니

머리와 목이 까만 새 곤줄박인가?

창턱에 앉아 있었다.

유리 한 장 사인데 바싹 다가가도

그의 프로필 꿈쩍 않네.

안개 속에 길 잃고 헤매다

뇌에도 안개가 꼈나?

하긴 길 잃고 정신없이 날아다녔으면

모처럼 앉게 된 곳에서 꿈쩍하고 싶지 않겠지.

근데 하필 왜 내 집 창턱?

오래된 아파트,

집집이 창틀에 꽉 찬 창 새로 해 달아

달리 앉을 곳 찾기 힘들었겠지.

 

나도 76년 전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서울,

오자마자 길 잃고 안개 속처럼 헤맸어.

오전부터 처음 보는 길을 걸었는데

저녁에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

당시 흔치 않던 탑골공원 벤치,

얼마나 반갑고 반가웠던가!

거기서 숨 바로잡고 이모님 댁 찾았어.

 

그후 길 잃고 헤매다 만난

벤치, 정거장, 카페, 인간의 품,

나의 삶 처처에 박혀 있는 반가움들이여,

그대들 하나하나가

길 잃고 정신없이 헤맬 때 사는 끈 새로 잡게 한

따끈따끈 손길들!

 

새가 안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생각을 잠그며 거실로 간다.

아기 새 빼고 길 잃어보지 않느 새 어딨어?

잘 잠기지 않아 찻물 끓인다.

 

 

 

 

 

 

 

 

 

 


 

 

 

시인의 말

 

4년 전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를 상재할 때 앞으로는 좀 건성건성 살아도 되겠구나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늙음이 코로나 글러브를 끼고 삶을 링 위에 눕혀버린 것이다.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 한 인간의 기록이다.

책을 같이 만들어준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주간에게 고맙다는 말을.

 

- 2024년 봄에 황동규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해설 -

 

환한 깨달음을 향하여

- 황동규 시인의 최근 시작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

 

장경렬 문학평론가, 학술원 회원

 

 

 

하나, 시인의 깨달음 앞에서

 

황동규 시인은 이번 시집 봄비를 맞다 에 담긴 시인의 말 에서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 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코로나바이러스놔두지 않 는 탓에 예상과는 달리 건성건성 살 수 없었던 자시느이 최근 삶을 권투 시합에 빗대고 있거니와, 이 비유를 더욱 감칠맛 나게 하는 것은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라는 간투사일 것이다. 이는 노년에 이른 예이츠 Yeats 가 남긴 시 자아와 영혼의 대화 A Dialogue of Self and Soul 에서 자아살아 있는 인간이란 눈멀고 자신의 배설물을 들이켜는 존재 이나 도랑이 불결한들 어떠리? / 그 도랑 속의 삶을 온통 다시 산들 어떠리? 라고 외칠 때 내비쳤던 삶을 향한 유쾌한 긍정을 감지케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 간투사에는 예이츠의 시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무언가도 있으니, 이는 다시 눕혀지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여유의 마음이다. 이 여유의 마음이 전경 前景 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봄비를 맞다 가 노년의 쉽지 않은 삶에 대한 기록 임에도 이 시집에서는 그런 유형의 기록에 으레 드리워져 있을 법한 우수의 그늘도, 자기 연민의 그림자도 짚이지 않는다. 마치 예이츠의 또 다른 시 청금석 Lapis Lazuli 에 등장하는 도인 道人, 반짝이는 눈 으로 속세를 응시하는 환한 마음과 맑은 정신의 도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하지만 도인 은 속세를 초월한 존재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번 시집이 증명하듯, 시인은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환한 깨달음에 또는 이피퍼니 epiphany 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번 시집에 표제를 제공한 봄비를 맞다는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예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 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

 

- 봄비를 맞다, 전문

 

 

이 세상에 /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니! 시인의 이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봄비를 맞다 도 앞서 언급한 예이츠의 자아와 영혼의 대화 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극적 劇的 대화 로 이루어진 시일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후자가 자아영혼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듯, 전자도 시인(또는 시적 화자)시인의 마음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진단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의 마음이 시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봄비를 맞다 의 첫째 연과 달리, 둘째 연은 시인이 생각 에 잠겨 이어가는 독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 연의 시적 진술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화체 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시인이 이어가는 생각 속의 독백은 곧 자신의 마음 을 향해 건네는 무언 無言 의 말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봄비를 맞다 의 분위기와 자아와 영혼의 대화 의 분위기를 비교하는 경우, 양자가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자아와 영혼이 서로 충돌하는 입장을 일방적으로 밝힘으로써 조성된 긴장감자아와 영혼의 대화 를 지배하는 분위기라면, 이 같은 긴장감이 전혀 짚이지 않는 것이 봄비를 맞다 의 분위기임에 유의하기 바란다. 사실, 봄비를 맞다 의 분위기를 감싸고 있는 것은 시인의 안위를 염려하는 시인의 마음과 그런 마음의 조언을 듣는 체 마는 체 하면서도 듣고는 이마에 손을 얹어 보는 시인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유대감이다. 단언컨대, 이때의 유대감은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마운 아내 (그날 저녁)와 아내의 혼잣말 새삼 귀담아 (혼불) 듣는 시인을 서로 잇는 끈과도 같은 것, 이면서 하나 로 존재케 하는 끈과도 같은 것이다. 다소 거창한 표현을 동원하자면, 이는 보들레르 Baudelaire 가 말하는 교감 correspondance 에 상응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봄비를 맞다 의 경우, 이 같은 유대감 또는 교감은 시인과 시인의 마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인과 자연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었다면 어찌 죽은 나무가 산 잎 을,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 을 내미 는 경이로운 정경이 시인의 눈에 포착될 수 있었겠는가. 아울러 어찌 이 세상에 /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는 환한 깨달음에 시인이 이를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어찌 고목속삭임 이 시인의 심이 를 울릴 수 있었겠는가. 대상과의 거리를 의식하거나 쥋와 객체 사이에 교감이 아닌 긴장감이 지배하는 경우, 누구도 기적과도 같은 정경에 눈을 뜰 수도 없고 환한 깨달음에 이를 수도 없으며 자연의 속삭임에 마음의 귀를 열 수도 없다.

여기서 잠깐 고목속삭임 에 새롭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봄비를 맞다 에 대한 우리의 시 읽기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따지고 보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 어떻게 막겠나?” 라는 수사적 물음은 단순히 고목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고목이 터뜨리고 있었던 연두색 잎 들은, 풍성하지는 않지만 정갈한 잎 들은 자연의 나뭇잎들을 지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노시인의 사심에서 샘솟듯 솟아오르는 시편 詩篇 들을, 어찌해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시인의 시편들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요컨대, 봄비를 맞다 는 시인의 환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 시인 동시에, 시인이 내려놓고 건성건성 살 고자 해도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 시 창작 이라는 평생의 과업에 관한 시일 수도 있다.

 

 

 

둘, 시인이 건네는 깨달음의 궤적을 더듬어

 

황동규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시인과 자연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는 정경을 담고 있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이들 시편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깊고 환한 시적 인식 또는 깨달음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은 인식론적 함의를 가늠케도 한다. 여기서 몇 예를 들기로 하자.

 

 

(1)

바람이 이는가, 시야 가득 꽃잎들이 날려 왔다.

두 손 내밀어 받았다.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잘 잡히지 않았다.

이런! 애써 내밀지 않은 머리에

꽃들이 스스로 내려앉는군.

이거 괜찮네.

꽃잎 계속 내려앉는 머리를 들고

옆에 떠 꽃 속을 돌아다녔다.

 

- 사월 어느 날, 제11-19행

 

 

(2)

남은 내 삶에도 혹시 불길이 댕긴다면

저렇게 탔으면!

 

그 생각 읽었다는 듯

샛노랗게 타는 큰 불덩이 하나 던지듯 날아와

어 어 하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와닿기 바쁘게 활활 타는 불

헝클어진 마음을 정신없이 태워주네.

태워라, 마음 텅 비게.

 

불 속에 흰 댕기 같은 게 어른거려 들여다보니

매듭 하나가 활활 타는 불 속에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태워! 그래도 꼿꼿이 버틴다.

그 버팀 생각을 웃돌아 언뜻 스치는 말 새겨보니

‘섭섭함은 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묻는다.

‘분노도 타는데 섭섭함은 안 타나?’

‘분노는 분노, 섭섭함은 고인 물, 물꼬를 트게.’

맞다! 하듯, 축대 위 불길이 한 번 펄럭였다.

 

- 불타는 은행나무, 제13-29행

 

 

(3)

달아날세라 꽉 붙잡고 높지 않던 생각들

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이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밝은 물길에 뛰어들어 어깨춤 춘다.

마음이 빈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 태안 큰 노을, 제11-16행

 

 

위의 인용 가운데 (1)은 산책길에 나선 시인이 시야 가득 날려 오는 꽃잎들 사이를 거니는 정경을 엿보게 한다. 시인은 일부러 두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꽃잎들 - 바람에 휘날리는 그 꽃잎들애써 내밀지 않던 머리스스로 내려앉는 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뜬다. 시인의 이 같은 눈뜸은 초월적 인식론을 일깨우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운 것이든 참된 것이든 이 세상의 소중한 그 모든 것은 마음이 의지와 욕망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 즉, 마음이 비워졌을 때 - 에야 비로소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편 다른 세상 불길처럼 정색하고 샛노랗게 타오르던 / 은행나무들집 발코니에서 홀린 듯 내다”(마음 기차게 당긴 곳) 보는 시인의 눈길을 감지케 하는 것이 (2)로, 홀린 듯 이라는 언사가 암시하듯 시인은 은행나무들이 펼쳐 보이는 장관에 흠뻑 매료되어 있다. 샛노랗게 타는 큰 불덩이 하나 가 시인에게 달려 들어 헝클어진 마음을 정신없이 태워 줄 만큼. 하지만 매듭 하나가 활활 타는 불 속에 버티고 있다. 이는 분노 조차 태우는 불길에도 끝내 타지 않는 섭섭함 으로, 이로 인해 시인의 마음은 텅 비워질 수 없다. 마음을 텅 비움은 인식 주체의 자아가 무화 無化 되는 경지를 말하거니와, 이는 초월적 또는 직관적 인식론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아의 몰입과 함께 자아가 대상과 하나 가 되는 이른바 무아 無我 의 경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시적 인식의 이상 理想 이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시인은 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이 지극하기 때문인지 시인의 생각을 웃돌아 언뜻 스치는 말 이 있다. 섭섭함은 고인 물, 물꼬를 트게. 바로 이 깨달음에 이른 시인이 어찌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맞다!

 

여행길에 찾은 어느 한 바닷가에서 목격한 큰 노을 에 매료된 시인의 내면 정경을 드러내 보이는 (3)에서 시인은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자신의 마음 이 비어 있음을 의식한다. 이러한 마음 비움이 가능했던 것은 꽉 붙잡고 놓지 않던 생각들멀리 떠나보내려 해도 꿈쩍 않던 생각들 조차 큰 노을 에 이끌려 다 같이 옷 붉게 해 입고 / 밝은 물길에 뛰어들어 어깨춤 을 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마음 비움 은 시인이 큰 노을하나 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 시편은 시인이 큰 노을 에 취해 말그대로 몰아 沒我 의 경지 에 이르렀음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초월적 인식론의 정점에 이르거나 다가가려는 부의식적 열망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황동규 시인은 아직 젊다. 하기야, 잎 계속 떨어뜨려 죽더라도 햇빛 받으며 죽으라고 / 며칠 전 거실에서 내논 고무나무가 / 저녁 해 향해 잎들을 번쩍 쳐들고 있 음을 보고 지금을 반기며 사는 것 (겨울나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인이라면, 어찌 젊음의 시절에 그러했듯 지금을 반기며 이 순간에도 열정적인 시적 탐구를 이어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시인이 노년에 이른 자신의 삶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 자신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시인은 다시 눕혀 지더라도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이어가는 것이 자신의 삶임을 명료하게 의식한다. 이는 특히 지워짐 또는 없어짐 이 깨달음의 단초가 된 시에서 확연하게 감지된다.

 

 

(1)

가만, 바다와 모래밭 구도가 바뀌고 있다.

바다에서 물새들이 날아오고

물이 들어온다, 물이.

 

곧은 금 굽은 금 가리지 않고

앞서 긋다 만 금부터 먼저

물결이 금들을 지우고 있다.

흔적도 없이.

나의 금도 이렇게 지워지리라.

긴장할 거 없다 몽상도 없다.

그어진 금 거두고 새 금 긋는 거다.

 

- 2022년 2월 24일 (목), 제26-35행

 

 

(2)

2년 이상 버티다가

봄꽃 질 때 나서니 지문이 없어졌다.

 

새 여권 신청하며 검색기에 엄지 올려놓고

아무리 눌러대도 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스크 벗어 들고 승강이 끝에 수속을 마친다.

찜찜하다.

 

손가락에 묻은 스탬프 액 물티슈로 지우며

생각을 헤치듯 구청을 나온다. 햇빛이 왈칵.

가만, 나도 모르게 세상 여기저기 찍어놓고 갈 물증을

지워버리고 살게 됐어.

홀가분하지.

느낌들을 가법게 밀며 걷는다.

 

-지문, 제6-17행

 

 

위의 인용 가운데 (1)이 담고 있는 것은 시인이 여행 도중에 찾은 또 다른 바닷가의 정경이다. 어느 사이에 바다와 모래밭 구도 가 바뀌어 물이 들어 오고, 물결곧은 금 굽은 금 가리지 않고 / 앞서 긋다 만 금부터 먼저 지운다. 그것도, 흔적도 없이 . 이를 응시하며 시인은 상념에 잠긴다. 나의 금도 이렇게 지워지리라. 하지만 인간이 남긴 - 삶의 흔적 - 이야 자기 자신의 것이든 자신의 뒤를 잇는 이들의 것이든 새롭게 그어지는 새 금 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지워지는 것이 순리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하는 한, 어찌 긴장할 거 있겠는가. 한편 (2)에서 시인은 어쩌다 지문 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다. 나이가 들면 없어지기도 하지만 지문은 내가 나 임을 증명해 주는, 대체가 거의 불가능한 수단이다. 그러니 어찌 지문이 없어짐에 찜찜 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내가 나 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제도 또는 통제의 전초기지 가운데 하나인 구청 에서 햇빛이 왈칵 비치는 바깥세상으로 나오자, 시인은 나도 모르게 세상 여기저기 찍어놓고 갈 물증을 / 지워빌고 살게 됐 음에 홀가분 함을 느낀다. 여기서도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환하게 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통제는 인간이 만든 제도뿐만 아니라 때로 천재지변이나 환란이 야기하기도 한다. 지난 2020년부터 최근까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사태는 엄청난 환란이 아닐 수 없었는데, 이로 인한 통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황동규 시인이 상재한 이번 시집의 적지 않은 부분(주로 제2부)은 이 환란의 시절을 헤쳐온 시인의 기록으로, 그의 삶을 특히 어렵게 했던 통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것이 속되게 즐기기 의 다음 진술이다. 속되게도 나 혼자서는 잘 즐기지 못한다. / 곁을 주는 사람이 엇으면 /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라도 대면할 수 있어야 / 마음 붙이지. 그런 시인에게 외부인과으 ㅣ만남이 금지된 상태의 집콕 - 집에 콕 박혀 있는 것 - 이 이른바 정언명령 定言命令 이던 시절 시인의 삶이 어찌 어렵지 않은 것이었겠는가. 환란의 시절을 보내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뜨리면

혼자 없음.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 코로나 파편들, 제11-13행, 제17-21행

 

 

추측건대, 시인은 혼자 있음 이라는 익숙한 표현과 혼자 없음 이라는 낯선 표현을 동원하여, 외로움을 느끼는 상태 또는 혼자임을 의식하는 상태에서의 혼자 있음외로움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 또는 혼자임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혼자 있음 을 구분하고자 한 것이리라. 사실 집콕 의 삶이란 일종의 가택 연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무튼,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니?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면, 이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지당한 사실 진술 이다. 하지만 집콕 의 삶이라는 맥락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띨 수 있거니와 환란의 와중에 이어갔던 집콕 의 삶을 기억해보자. 아마도 많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서도 환란의 시절 이전에 그러했듯 혼자임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때로 자신이 혼자임을 문뜩 절감하곤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외롭다? 에서 시인이 말하듯, 사람 못 보며 사는 삶에 외로움을 징하게 느 끼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마치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기라도 하듯 갑갑함과 답답함과 거북함에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어찌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는 깨달음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일 수 있겠는가.

 

 

 

 

셋, 시인의 마음과 함께하며

 

마음 비움 이 인식의 정점이라 해도, 지워짐 이 삶의 필연이라 해도,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는 깨달음으로 때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여정이라 해도, 어찌 그것이 삶의 전부일 수 있겠는가. 우리네 삶에는 비우기보다 오히려 채워지기를 바라는 허전한 마음 도 있고, 앞서 잠깐 비쳤듯 지워지는 것이 있으면 이를 채우는 것도 있으며, 비좁음과 불편함을 일깨우는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듯 살아 있는 어떤 것 들도 곁을 찾게 마련이다. 요컨대, 삶이란 결코 일방적인 일반화를 허락하지 않는 경이 驚異 인 것이다. 이를 엿보게 하는 것이 속 빈 나무 와 같은 이 몸 안으로 올빼미 한 쌍쯤 들어와 말없이 주인들처럼 살아주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 어느 사이에 이 몸 을 채우고 있는 세월에 밀려 내팽개쳐진 ( 잡새들 과도 같은) 나의 잡생각들 을 계속 머물게 하여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가려 주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렇나 시인의 마음을 재치와 해학과 여유를 후광처럼 거느린 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절창이 속이 빈 나무 일것이다.

 

 

이제 이 몸 나이테 꽉 차 터지기 시작한 나무,

살펴보니 잘 안 뵈는 속도 한참 비었다.

올빼미 한 쌍쯤 들어와

몸 절반 크기 얼굴 끄덕끄덕

말없이 주인들처럼 살았으면.

 

하지만 서달산 오르는 길의 집들

모두 빌라로 바뀌어

알 만한 새들 다 도망갔으니

어디서 올빼미를 모셔 온다?

 

언제부턴가 창밖에 장대비 퍼붓고 있다.

속이 빈 몸에 장대비, 아 생각난다,

이십 년 전인가

차 몰고 지리산을 한 바퀴 돌다

갑작스레 닥친 폭우에 와이퍼 있으나 마나

차 세우고 들어간 가게 옆에 서 있던

속이 빈 고목나무. 비 그쳐 나오자 그 속에서

새 한 떼가 나 몰라라 튀어나왔어.

 

가만, 장대비 마주하는 내 속도 그냥은 아니군.

세찬 빗줄기에 몸 둘 곳 몰라 하던

조그만 새 몇이 들어와

몸들을 녹이며 토닥거리지 않나?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마음 다잡는 놈도 있고

벽을 콕콕 쪼아대는 녀석도 있다.

잡새들! 다시 보니

아, 세월에 밀려 내팽개쳐진 나의 잡생각들!

신문 읽다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던 놈까지.

잡생각이면 어때?

새든 생각이든 모질게 퍼붓는 비바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가려주는 일,

살아 있는 자면 해줄 만한 일이 아닌가?

 

속이 빈 나무, 제6-35행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절창이 어디 이뿐이랴! 이번 시집의 작품 한 편 한 편이 우리의 마음에 느낌표를 찍어준 절창이 아닌가. 하지만 한 편만 더 논의 마당에 끌어들일 것이 허락된다면, 우리의 눈길은 이번 시집의 첫 작품인 오색빛으로 를 향해야 할 것이다.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 오색빛으로,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의 눈길은 몸 다 내주고전복 이 남긴 껍데기 를 향하고 있다. 즉, 있다가 없어진 것 을 대신하여 여전히 있는 것 또는 남은 것 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문제는 시인의 시적 진술이 관찰 대상의 현재에 대한 묘사와 기술 쪽보다 미래에 대한 추측과 기원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데 있다. 어찌 보면, 눈으로 관찰하는 일과 마음으로 상상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양자 사이의 편차는 시인의 진술에 일종의 중의적 中意的 의미가 개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데, 이는 전복 껍데기 를 보조관념으로 하는 원관념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지? 그리고 문제의 원관념은 시인다운 시인이라면 남겨야 하는 것, 몸 없어진 후에도 남아 있게 해야 하는 오색빛 으로 찬란한 시 세계가 아닐지? 이렇게 시를 읽는 경우, 우리는 앞서 언급한 시인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 LAlbatros 를 들먹일 수도 있겠다. 몸 없어진 후에도 오색빛 으로 찬란한 껍데기 를 남기기도 하나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 계속 기고 있는 존재가 시인이라면, 시인이란 어찌 보들레르의 말대로 창공의 왕자 임에도 현실 세계에서는 걷는 일조차 제대로 못 하는 알바트로스와도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오색빛으로 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동시에 암시하는 존재 存在, Sein 의 시이자 당위 當爲, Sollen 의 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시인다운 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자기 성찰의 시이자 어느 시인에게든 그가 마음 깊이 바랄 법한 바를 새삼 일깨워주는 소망의 시이기도 하다.

 

 

이제 논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이에 앞서 언급한 예이츠의 시 세계를 다시 끌어들이고자 한다. 사실 노년에 이른 예이츠가 펼쳐 보였던 시 세계에서 감지되는 삶에 대한 유쾌한 긍정과 열정은 황동규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도 여일 如一 하게 확인된다. 하지만 예이츠의 긍정과 열정 그리고 앞서 잠깐 암시한 긴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황동규 시인의  시 세계에 있으니, 이는 누구나 열망하나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와 다감함이다. 바로 이 여유와 온기와 다감함으로 인해 누구에게든 깊은 마음의 울림을 줄 것임에 틀림없는 다음 시를 함께 읽는 것으로 우리의 이번 논의를 끝맺기로 하자.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가만, 근자에 아파트와 빌라 들 가득 들어서

둘러볼 골목 별로 남지 않았군.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낮비 잠시 뿌렸는지 하늘과 숲이 밝다.

 

하직 인사 없이 헤어진 다람쥐가 나를 알아볼까?

약수터에 전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떠 있을까?

그런 호사스런 생각은 삼가기로 하자.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 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깊섶으로 되돌려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벤치 하나, 둘이 서로 얽히듯 서 있는 나무,

약수터가 지나간다.

하늘에 샛별이 돋는다.

이 별 뜨면 가던 걸음 멈추고

무언가 맹세하곤 했지.

참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까지.

 

- 그날 저녁, 전문

 

 

세상 뜰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로 산책길에 나서 콘크리트 바닥에 /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 무작정 앉아있는 할머니한테서 / 작은 밤 한 봉지 사 는 것과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 길에 굴러 들어온 돌멩이는 /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보내 는 것을 떠올리는 시인의 여유로우며 따뜻하고 다감한 마음에 어찌 누구든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 까지 걸음을 이어가겠다는 시인의 다짐만큼 삶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긍정이 절묘하게 담긴 시적 진술이 어디 따로 있을 수 있으랴. 모두가 뭉클해진 마음으로 이 절창을 거듭 되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