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시계
흉기가 되도록 뾰족해졌다. 그러나 어떤 시간도 공기와 같아서 삼켜야 하는 것. 꺽꺽, 네가 시간을 뱉었을 때,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무거워진 물방울이 떨어질 때, 함께 깨지고, 합쳐지고, 한 줄기처럼 흘러가자.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릴 수 없는 무게와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리지 않는 무게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너는 조금 일찍 떨어져도 돼. 어떤 새가 제 무게를 견디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겠니?
밤에, 나무에 깃드는 새와 아침에, 나무를 떠나는 새는 같은 새의 다른 가능성, 다른 꿈들. 어떤 시간은 새와 같아서 구부러진 발톱으로 붙잡고, 부리로 쪼고, 작은 몸통을 울리며 신기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아무것도 없고 망설임도 없는 것처럼 날아간다, 그때도 그랬지, 시끄럽고 끔찍한 소리를 낼 때도 우리는 귓속의 새소리를 이해하지 못했지. 새는 구멍으로 이루어진 짐승, 시간이 그런 가벼운 짐승 같아도, 물방울은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며 물방울 소리를 낸다. 그것은 참으로 끈질길 노크 소리 같구나.
문을 열어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무엇을 계속하겠다는 건가, 시간의 방문 너머, 누가 앉아서 다 듣고 있는가, 중간에, 누가 아파서 누워 있는가, 바야흐로, 누가 인간의 시간을 떠나려 하는가. 몸이 죽기 전에 몸이 아플 것이며, 가벼워지기 전에 무거울 것이며, 온 세상이 침묵에 빠지기 전에 물방울 소리를 들을 것이니, 맑은 물, 뾰족한 물, 정확히 우주의 급소를 찌르는 물. 그 이후, 너는 시든 입술에 단 한방울의 물도 축이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름 모를 바닷가
흰 개가 뛰어놀고 검은 개가 뛰어논다
흰 개는 검은 개를 보면 더 희고
검은 개는 흰 개를 보면 더 검은 것 같다
흰 개가 짖고
검은 개가 짖는다
나는 흰 개를 가리키고
또 저것은 검은 개라고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흰 개 소리와 검은 개 소리를 분별해 들을 수 없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밤새 생각하고
400킬로미터를 달리면서 핸들을 잡고 했던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어렸을 때 …… 모래밭에서 발자국 놀이를 했는데
쓰고 지운다고 생각했어다
흰 개가 짖고
검은 개가 짖고
나는 도무지 내 것 같지 않은 비명을 질렀다
잠의 방언
잠은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기침 소리가 없는 기침 같고,
바람 소리가 없는 바람 같고,
잠은 시력을 잃어버려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보는 것 같고,
검은 유리창처럼 창밖에서 나를 나누어 가지는 것 같고,
내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고,
잠은 목격자가 실종된 사건 같고,
잠은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저편의 전화기 같고,
아직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자가 허공에 대고 웅얼거리는 입술 같고,
잠은 의식을 잃어버려서 죽은 이의 침상에서 죽은 이를 일으켜 앉혀 나누는 다이얼로그 같고,
잠은 비밀번호를 잃어버려서 잘못 조합된 숫자들 같고,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르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뼈가 없는 것 같고, 그것은 안개의 뼈 같고,
철문 밖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것 같고, 지쳐서 잠드는 것 같고,
저 사람
그 해변에는 저 사람이라고 손을 들어 가리킬 수 있을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었다(저 사람과 저 사람은 동일인으로 모아지기도 하고,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두 번, 세 번, 열세 번을 스쳤어도 기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저 사람과 저 사람이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고 나는 다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갈매기를 빌려 모래밭에 앉았다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그 짓을 되풀이, 했던 것 같다. 나에게 해변은 …… 해변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처음에는 기쁨으로 그다음에는 슬픔으로 그다음에는 외로움으로 이끌며 멀어지는 시간의 곡선이다. 외로움이 저 사람의 형상을 잠시 빌렸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 사람 때문이라고, 이 모든 게 저 사람 때문이라고, 누군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서 나는 발각되는가. 그곳에서 나는 어두워지는가.).
이웃 사람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시자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고깃국물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것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바리처럼 짖을 때까지 나는 오후에 산책하고 고요한 새벽에 산책하는 삶을 살아왔다.
제때 가스불을 끄고 사랑을 끄고 희망을 끄고 살아온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곧 가스불을 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 어떤 젊은이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신은 위에 있고,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져 있어요.” 나는 다시 어떤 젊은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에코의 초상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시인 김행숙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9년 현대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와 산문집 마주침의 발명, 에로스와 아우라 등을 펴냈다.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강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인의 말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
밤에 날카로운 것이 없다면 빛은 어디서 생길까.
별이 못이라면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못,
누구의 가슴에도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
몇 개의 못을
내리쳐
나무 의자를 만든다.
누가 누구의 가슴에 앉았다 쉬어 갈까.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삐걱거리는 의자여,
지금은 이곳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주 작은 새여,
해설 -
존재 바깥에서 물결치는 ‘인간의 시간’
박 진
일렁이는 ‘에코의 초상’
김행숙의 시는 처음부터 타자를 향한 낯설고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녀의 시적 화자는 세계를 자기 앞에 재현하고 자신의 인식 지평 위에서 타자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원근법적 중심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사람” (타일의 규칙)이 되기까지 타자들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주체, 타자의 목소리들이 거침없이 횡단하고 타자의 흔적들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비표상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그러모아 내면성으로 통합하는 익숙한 서정적 발화와 구별되는 김행숙 시의 모호성과, 매록적인 이질성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시가 자기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타자되기 의 감행인 이유, 담론의 지배에 다시 종속되지 않는 곳에서의 글쓰기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새 시집 에코의 초상 에서도 김행숙은 타자의 목소리와 타자의 흔적들 속에서 주체의 임시적 단수성을 감지하며(저 사람, 두 사람, 모르는 목소리, 이름모를 바닷가, 아담의 잠옷, 소리의 악마 등), 로고스-팔루스 중심의 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다른 언어와 다른 사랑을 꿈꾼다(좋은 말, 상형문자 같은, 아 서사극, 새의 위치, 마른번개들, 트럭 같은 사랑 등). 이런 양상은 시집의 제목에도 암시돼 있다. 그녀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에코’ 의 운명을 시적 자아의 ‘초상’ 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누군가에게서 빌려 온 목소리로 말하고 타자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주체의, 초상 아닌 초상이다.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떠너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 에코의 초상, 전문
에코의 목소리는 그녀가 따라서 말해야 하는 수많은 타인들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들로 인해 아직 얼굴이 없는 그녀에게 “입술” 이 생겨나고, 그래서 그녀의 입술은 타인의 “입술들의 물결” 이 된다. “처음 보는 것 같고” “꿈에서 보는 것 같” 은 타인의 얼굴들, 주체가 파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타자의 비현전성이 에코의 초상을 비가시적이고 비동일적인 일렁임으로 만든다.
이 시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 은 “너의 마지막 얼굴” 조차 “어떤 얼굴” 로 희미하게 흩어져간다는 점이다. 김행숙 시의 화자는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너’ 의 얼굴마저 생생한 재현으로 붙잡아 고정하지 못한다. 주체의 이 같은 무능 혹은 실패 속에서 김행숙의 이번 시집은 ‘다른 시간’ 과 ‘다른 관계’ 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는 듯하다.
침묵과 망각, 그리고 ‘죽어감’ 의 시간
그러나 지금은 우선, 표제작인 ‘에코의 초상’ 을 좀더 따라가보자. ‘너’ 의 비현전이라는 결정적인 부재, 치명적인 결핍은 이 시에서 죽음의 형상과 맞물려 있다. “끝모를 장례 행렬” 과 “진흙” 같은 “눈동자” 와 “허공” 을 나는 “검은 새 떼들” 이 드리우는 압도적인 죽음의 분위기는 결국 “너의 마지막 얼굴” 을 휘돌고 있다. “아, 하고 입을 벌” 린 ‘너’ 의 마지막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얼굴 같” 지만, 그 벌어진 입술에서는 죽음 이후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거나 혹은 새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를 따라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는 끝내 죽음의 탄식이 흘러나오거나 차마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의 상실 위에서 말하고 있다. 입이 틀어막힌 채 우는 어린아이처럼.
‘에코의 초상’ 은 나르시스에 대한 에코의 비극적 사랑뿐 아니라, 나르시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에코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마도 그 덧붙여진 삶 sur-vie은 순수한 인내이자 지향 없는 기다림이며, 죽어감 그 자체로서의 삶일 것이다. 에코는 기억을 통해서도 사랑하는 나르시스의 얼굴을 다시 현재화 re-presentation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죽어감 / 삶은 재현될 수 없는 어떤 망각된 불행을 자신 안에서 참아내는 일과도 같다. ‘나’ 의 존재보다 더 사랑하는 타자의 비존재는 시작 없는 외상처럼, 기억에서조차 경험될 수 없는 영속적인 고통처럼, 끝없이 물결쳐 되돌아온다.
부재와 죽음, 침묵과 망각, 수동적인 참을성과 기다림의 시간 등은 이렇게 서로서로 공명을 일으키며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를테면 ‘소’ 에서 “우리는 방금 전까지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 어두운 뱃속에서부터 알던 사이 같다 …… 우리는 옛날 사람 같았다 / 가만히 느껴보면 / 죽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고 말할 때, 그녀는 결코 현재한 적은 없지만 외상으로 자국을 남긴 깊디깊은 “옛날” 의 망각된 죽음을 가만히 견디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담의 농담’ 에서 그녀는 극렬한 “통증” 을 동반하는 하염없는 “침묵” 과 기다림을 통과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봐야 소용없는 비현전의 시간 속으로 넘겨진다.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이 잘 안 됩니다. 말이 안 돼도 말을 하려고 애쓰면, 사람들은 걱정스레 묻습니다. 어디가 아픕니까? 그것이 복통이라면, 통하세요. 토하고 싶다면, 토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토할 것 같다면, 토할 것 같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무슨 냄새를 맡았습니까? 대체 무엇을 보았습니까?
……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만 자꾸 생각나서 침묵했습니다. 침묵이 길어지면, 긴 침묵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었다.가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 죽은 자의 것으로 석양 밑에 깔립니다. 친절한 그가 대신하여 이야길 시작하면, 나는 죽어서 어느 나르이 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 아담의 농담, 부분
이 시에서는 “말” 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말의 기나긴 “침묵” 속에서, 언제나 와 있지만 현전할 수 없는 죽음을 “기다리는” 참을성의 “시간” 이 숨죽이며 이어진다. 거기에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디는 눈부심 같은 게 있따. 또는 언어로 인해 입 벌리고 있는 심연을 언어로 건너야 하는 사람의, 찢김 속에서의 삼감 같은 것.
이런 것들이, 김행숙의 이전 시집들과 이어지면서도 구별되는 에코의 초상 의 독특한 표정이다. 특히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채 망각 속에서 끝없이 희귀하는 비현전의 시간은 이 시집에서 김행숙 시가 다다른 새로운 지점이다. 그런 시간성은 타인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정도 affection 이나 타자에 대한 수동적 정념 passion 과 촘촘히 얽혀들어 있다. 죽음과 시간의 이러한 교차는 얼핏 하이데거식(존재와 시간)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죽음을 향한 존재’ 의 불안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시간성은 존재의 서사를 거슬러서 코나투스(conatus:존재의 자기보존력)의 바깥을 향해 아스라이 뻗어나간다.
존재 바깥, 또는 탈-전체 des-astre의 시간
‘에코의 초상’ 에는 실제로 하이데거의 그림자가 어름거린다. ‘차이와 동일성’ 과 ‘존재의 집’ 같은 시 제목에는 하이데거의 영향이 직접 드러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반 反 영향이라 부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를 이 경향은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존재론의 사유와, 그 기반을 이루는 동일화의 체계 전체를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가령 차이와 동일성 에서는 재현 불가능한 타인( “손목” 으로만 나타났다 사라지는)의 얼굴의 물음표가 ‘나’ 의 자기동일성을 식별 불가능한 지점까지 몰아붙이는 동안, 차이가 동일성의 본질에서 유래한다는 동일성과 차이 (하이데거)의 중심 명제가 바닥에서부터 뒤집어진다.
또 존재의 집 에서는 현존재의 거주 가능성이자 세계 내 존재의 이해 가능성을 보장하는 언어가 어떤 한계에 이르러 침묵으로 으스러지면서, 세계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바깥dehors의 시간이 엄습한다.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
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입구에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기다리고, 끊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을 뜻한다
그 사람이 얼음의 집에 들어와서 바닥을 쓸면 빗자루에 묻는 물기 같고
원래 그것은 물의 집이었으나 살얼음이 이끼처럼 끼기 시작하고
물결이 사라지듯이 말수가 줄어든 사람이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
침묵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를
그런 입 모양은
표시했다
식사 시간에 그런 입 모양이 나타났을 때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그 사람은 숟가락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는데
그 숟가락은 무엇이든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기에 좋은 모양으로 패어 있고
구부러져 있따
숟가락의 크기를 키우면 삽이 되고, 삽은 흙을 파기에 좋다
물, 불, 공기, 흙 중에서 흙에 가까워지는 시간에
이를테면 가을이 흙빛이고 노을이 흙빛이고 얼굴이 흙빛일 때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입을 떠나지 않은 입을
아직은 입으로 말하지 않은 말을
침묵의 귀퉁이를
아직까지도 울지 않은 어느 집 아기의 울음을
- 존재의 집, 전문
아직은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은 “그런 입 모양” 과 더불어 알아챌 수는 없지만 갑작스러운 무엇이, 천체의 기울어짐과도 같은 전락의 신호가, 세계의 거주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어떤 바깥이 출현한다. “침묵” 은 바깥에 대한 강렬하고 재양 des-astre 같은 긍정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존재의 집 은 실상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동결하는 얼음의 집 이며, 존재의 존재함을 위해 타자들(자기안의 말 못하는 어린아이를 포함하여)을 살해하는 * 죽음의 집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 On tue un enfant” 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말은 오래전에 우리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말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자기 자신을 살해했음을 뜻한다. 이미 죽은 그 어린아이는 언어의 바깥, 기억의 바깥에 잔존하면서 끊임없이 되돌아오고, 우리는 그 어린아이를 거듭 살해함으로써만 의식적 ·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준상 해제, ‘한 어린아이’ , 모리스 불랑쇼, ‘카오스의 글쓰기’ , 박준상 옮김, 그린비, 2012 참조.
침묵은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죽음( “흙을 파기에 좋” 은 “삽” 과 “흙빛” 의 “얼굴” 등으로 암시된)을 향한 무한한 다가감이기도 하다. 존재가 언어를 통해 매 순간 실행하지만 결코 완수할 수 없는 살해 행위는 불가능한 죽음을 되풀이하는 일, 또는 끝없이 죽어가기를 계속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로 인해 ‘존재의 집’ 에는 한없이 연기된 채 임박한 죽음을 기다리는 참을성의 시간이 죄어들어온다.
수동적인 기다림과 죽어감의 시간은 현존재의 존재 지평인 근원적 시간(죽음을 향한 존재의 유한함)을 파열시킨다. 불안을 무릅씀으로써 자기를 앞질러 죽음을 전유하고, 미래로 자신을 기투하는 가운데 현존재의 전체성을 구현하는 하이데거적인 의미의 시간을 말이다. 이 시에서는 또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 죽는다’ 는 죽음의 단독성과, 이를 토대로 한 존재의 각자성이 철저히 의문에 부쳐진다. 죽음을 가장 고유하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으로 본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타인을 배제하는 고독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죽음은 오직 존재 사건이며 모든 의미는 존재 의미로 귀속된다.
반면에 ‘존재의 집’ 에서 현전하지 않는 이 불확실한 죽음( ‘나’ 의 죽음이나 “그 남자” 의 죽음조차도 아닌)은 개인적인 것이 결코 아니며, 그 의미는 ‘나’ 의 고유하고 실존적인 죽음으로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시에서라면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로 죽는다고, 차라리 “아직까지도 울지 않은 어느 집 아기의 울음” 으로 죽어간다고 말해야 한다.
익명적인 ‘공동의 인간’
이 같은 죽음/죽어감은 인간의 익명적 연속성 안네 나 자신을 기입하여 ‘나’ 를 모두에게 속한 자로 만든다. 언제나 의식 바깥에 있기에 망각을 통해서만 기억될 수 있는 불가능한 죽음(내 안의 이미 죽은/ 죽어가는 어린 아이)은 우리 모두에게 뚫려 있는 구멍이자, 상처 입은 비존재로서의 ‘공동의 인간’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손을 모으는 일을 했다
어느 날은 손이 뜨거웠다
권총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총의 환상이 사라지자
총에 맞은
검은 새처럼 손만 남았다
……
누구나 어린아이였지, 옛날부터
위험하게
……
저녁에 손을 모으면
누구의 손이라도 모두 닮았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부분
별이 못이라면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못, 누구의 가슴에도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입니다
빛을 비추며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서로서로 빛을 비추며 죽은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디서 날이 밝아온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 빛, 부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서 간절함으로 “부들 부들 떨” 리던 “손” 이 “총에 맞은 검은 새처럼” 죽음의 절망 속에 내버려질 때, 기억할 수 없는 먼 “옛날” 에 살해당한 내 안의 “어린아이” 가 다시 울기 시작한다. 말문이 막히는 어떤 한계 상황에서야 우리는 말 못하는 그 어린아이의 죽음이 나만의 결핍이 아니었음을 비로서 느끼게 된다. “누구나 어린아이” 로 죽었고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무언가를 간구하는 우리 각자의 모아진 손이 “모두 닮” 아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상처입고 고통받는 타인들과 ‘나’ 사이에 익명적인 공동의 몸이 들어서는 것이다.
‘빛’ 에서도 자기 가슴에 깊이 박힌 “못” 의 고통은 모두가 가슴속에 깊디깊은 못 池 의 심연을 품고 있음을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을 불러들인다. 못은 하늘에 박힌 “별” 이기도 하기 때문에 저마다의 가슴속 고통의 심연으로 “서로서로 빛을 비추며 죽은 아이를” 함께 찾을 수 있다. 끝내 “날이 밝아” 오지 않는다 해도 타인들과 함께 그 어린아이를 공동으로 품어 안는 그 어떤 삶은 끝없는 죽어감 가운데서도 우리를 존재보다 더한 것으로 열어줄 것이다. “밤에 날카로운 것이 없다면 빛은 어디서 생” (밤에)기겠는가. 이렇듯 찢김으로 인해 열리는 공동의 영역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 인간의 시간, 전문
이 시에서도 시간은 존재의 서사와 단호히 결별한다. 시간은 견고한 대지와도 같은 존재의 지평이기는커녕, “밟으면” 그대로 빠져버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물결” 과 같다. 그것은 또한 시작과 끝을 지닌 현존재의 유한성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기원도 종말도 없이 일렁이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그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존재의 행적’ 이 아니라 “인간” 을 공동의 “우리” 로 엮는 ‘관계의 사건’ 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시간” 은 결국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주체성의 얽힘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된다. 그 속에는 위태롭지만 무한한 “사랑” 의 가능성이 깊이 잠재돼 있다.
한편 시간의 “물결” 은 존재의 휴식을 방해하는 시간의 불안정한 동요를 암시한다. 물결치는 시간의 휴식 없는 일렁임( ‘에코의 초상’ 을 일렁이게 한)은 타자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자의 불안정을 인상적으로 환기시킨다. 타자가 동일자 안에서 자기충족적으로 이해되고 안정적으로 동화될 때, 생생한 현재로 다시 붙잡혀 동일자와 동시적으로 현존할 수 있을 때, 그 변함없는 ‘항상’ 속에서 시간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시간이란 ‘타자를 향한 동일자의 방향 전환’ 이자, 동일자가 타자를 끝내 포섭하지 못한 채 자기 안에서 감내하는 ‘참을성의 길이(통시성)’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이 익명적인 죽어감 속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인간의 시간’ 이다.
정념의 수동성과 타인의 ‘눈빛’
존재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동일자 안의 타자는 타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 뒤흔듦에는 외상적인 폭력의 측면이 있다. 타인인 누군가는 “폭군처럼 솟아서 시간의 차원을 뒤엎고 한 자락 그림자도 없이 침입하” (어딘가, 어딘가에는)며, 또 누군가는 “흉기가 되도록 뾰족해” 져서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 면서 “참으로 끈질긴 노크 소리” (물방울 시계)를 낸다. 타인은 그리 달갑지 않은 in-desirable 자이고, 그런 뜻에서 타인을 향한 쏠림은 바랄 만하지 않은 non-desirable 것에 대한 정념이다.
정념의 이 같은 수동성 ( ‘passion’ 에는 ‘passif’ 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따)으로 인해 우리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타인과 마주치고, 타인의 두드림에 타격을 입으면서 자기를 거슬러 영향을 받는다. 뜻하지 않게 때로는 내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 기도 하고,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 (잃어버려지지 않는 / 찾아지지 않는) 기도 하는 것이다. 주체의 이런 수동성(능동성과 대비되는 수동성보다 더한 수동성)에는 존재론이 전혀 사유할 수 없는 윤리적 가능성의 지대가 있다. ‘에코의 초상’ 에서 김행숙 시가 새로 마주한 ‘타인의 의미’ 도 바로 그 속에 깃들어 있다.
유리로 만든 것들은 우리를 속이기 쉽습니다. 저 창문은 액자 같고,
그곳에서 가장 먼 나뭇가지에라도
나는 걸려 있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그곳입니다.
당신의 눈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내 슬픔의 무게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구덩이를 팝니다.
많은 것들이 꺼질 듯 매몰되었습니다. 아앙,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닙니다. 나는 그림인 척해도 그림이 아닙니다.
……
모든 옆집의 창문 같은 그곳,
유리의 주인인 당신의 눈빛을 상상하면 나는 그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카펫에 누군가 주제를 정하고 문양을 찍는 것 같습니다.
카펫은 밟으라고 있는 겁니다.
이런 내 마음의 소리가 당신에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내 절망이 당신에게 스러질 듯이 원경 遠景 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찌푸린 눈빛처럼 내가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눈빛에 항상 걸려 있는 나의 살가죽을 쓰고 다니면 세상의 모든 옆집들
그곳에 당신이 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어느 이웃집 꼬마처럼 돌멩이를 손에 쥐면 그때 그곳이 생각납니다. 그곳에 돌멩이를 던진다면, 그것은
당신의 눈알을 당신의 얼굴에서 빼앗아 그 얼굴에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눈알을 으깨는 기분으로 나는 돌멩이를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는 그곳,
그곳에 당신이 있을까? 없을까?
- 타인의 창, 부분
유리로 된 “창문은 액자 같” 아서 바라보기 좋은 “그림” 인 양 우리를 속이” 지만, 그 창문은 실은 “타인의 창” 이고 바라보는 “눈빛” 의 “주인” 도 내가 아닌 “당신” 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 는 그림으로 바라봄의 대상으로 뒤바뀐다. 주격으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대격으로 전락한 나 는 내 자리를 ‘당신’ 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내 삶의 카펫에 누군가 주제를 정하고 문양을 찍는” 것처럼, ‘당신’ 의 시선에 따라 ‘나’ 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짜이고 형성된다. 그렇기에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그곳” 이다. “당신의 눈빛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는 아마 ‘나’ 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타인의 창문에서 “가장 먼 나뭇가지에라도” 그림으로 “걸려 있기로 결정” 한 ‘나’ 는, “그림인 척해도 그림이 아” 니다. 자신이 걸려 있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구덩이를” 파서 “많은 것들” 을 “꺼질 듯 매몰” 시키는 “내 슬픔의 무게” 때문이다. 이 무게는 자신의 고유한 코나투스에서 뿌리 뽑힌 물질의 무게 전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 뽑힘과 이를 견뎌내는 수동적인 참을성에서 존재 너머의 또 다른 주체성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동시에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 니다. 자기 밖으로 추락하여 구덩이에 매몰된 채로 “아아, 나는 멸망인 척해도 멸망이 아닙니다. / 나는 그림인 척 해도 그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이 신음 같은 탄식에서는, 고통속의 수동성이 지닌 어떤 윤리적인 것이 흘러나온다.
나아가 타인의 시선에 숨김없이 노출되는 일은 ‘나’ 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경험된다. “당신의 눈빛에 항상 걸려 있는 나의 살가죽” 은 보호 없는 노출이자 벌거벗음 그 자체이고, “당신의 찌푸린 눈빛” 앞에서 그 살가죽을 “쓰고 다니” 는 ‘나’ 는 자아 없이 헐벗은 자다. 더구나 그 시선은 “세상의 모든 옆집들” 에서 전방위적으로 ‘나’ 를 에워싸고 압박한다. 그래도 ‘나’ 는 ‘당신’ 의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 지지 못한 채 그 “돌멩이를 손에 꼭 쥐고”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다. 타인에 대한 정념 passion 의 수동성으로 ‘나’ 는 해를 입으면서 모든 수난 passion 을 감내하는 것이다.
타인의 근접성과 이웃 의 죽음
피할 길 없는 타인의 영향력을 이처럼 ‘옆집’ 의 근접성과 이웃 의 우연성에서 발겸함으로써, ‘에코의 초상’ 의 윤리적 가능성은 더욱 구체화된다.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신자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고깃국물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것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바리처럼 짖을 때까지 나는 오후에 산책하고 고요한 새벽에 산책하는 삶을 살아왔다.
제때 가스불을 끄고 사랑을 끄고 희망을 끄고 살아온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곧 가스불을 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 어떤 젊은이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신은 위에 있고,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져 있어요.” 나는 다시 어떤 젊은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 이웃사람, 전문
우발적인 타인의 두드림은 “이웃 사람” 의 죽음을 통해 ‘나’ 에게 찾아온다. 이웃에 사는 한 “독신자” 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마치 ‘나’ 의 벽을 쳐대듯이 존재의 고요한 휴식에서 ‘나’ 를 흔들어 깨운다. 이 당혹스러운 불안정은 ‘나’ 를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 진 어떤 젊은이로,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 는 존재 바깥의 익명성으로 돌려놓는다. “나는 다시 어떤 젊은이가 되고 싶지 않” 으며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는 욕구는 코나투스의 갑작스러운 해체에 저항하는 존재의 반발일 것이다.
‘나’ 를 이 같은 갈등과 동요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웃의 근접성이 촉발하는, 그의 죽음에 대한 ‘나’ 의 책임이다. ‘나’ 는 마치 기억할 수 없는 과거에 타인을 책임지는 자로 서임 敍任 된 사람처럼, 그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임으로 인해 ‘나’ 는 벌거벗었으며, 잘못이 없음에도 고발당한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나를 가리키며” 비난하는 “누군가” 의 손가락은 그 책임에 내가 유보 없이 노출되어 소환 당했음을 의미한다.
자기 존재 안에 안전하게 머물려는 욕구는 우리를 이같은 책임에서 서둘러 물러서게 하고, 자신이 직접 저지른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은 수많은 불행들에 대해 손을 씻게 만든다. 그러나 “제때 가스불을 끄” 는 일처럼 오직 존재에 대한 염려에만 충실한 삶은 “사랑을 끄고 희망을 끄고 살아온” 삶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옆집이 빈 집이면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 (8時가 없어진다면)는가?
‘불가능한 회피’ 의 고유한 흔적
그렇기에 김행숙은 ‘에코의 초상’ 에서 낯모르는 타인의 죽음들을 옆집 에서 일어난 ‘이웃’ 의 일로 받아들인다. “파도” 에 휩쓸려 “되돌아오” 지 못한 사람(저녁의 감정)과 “철길” 위에서 “자살” 한 사람(철길)과 “가스밸브를 오픈하” 며 “죽음” 을 선택한 사람(도시가스공사의 메아리) 등은 모두 ‘세상의 모든 옆집’ 에 사는 그녀의 이웃들이다. 하여 그 죽음들 앞에서 그녀는 매번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 고(저녁의 감정), “몇 번을 죽었다 태어나는” 사람이 되며(철길), “침묵에 가장 가까워” 진 “목소리” 로 익명적인 인간의 몸(도시가스공사의 메아리)과 만난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갖는, 면제되지 않는 책임일 것이다. 그런 책임은 현존의 과잉(주체의 자발성과 능동성)이 아니라 그것의 치명적인 결핍인, ‘수동성보다 더한 수동성’ 에서 나온다. 이럴 때 그 수동성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이자 상처 입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존재에 대한 염려로 귀착되지 않는 이 같은 주체의 주체성은 그저 재이고 티끌인 ‘나’ 를 찢어놓으면서 고양시킨다.
물론 이 책임 속에는 어떤 실패가 있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디는 수동적인 참을성은 그 속에 ‘인내하지 못함’ 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또 덮” (밤에)으며 존재 안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윤리적인 원자가 原子價 를 갖는 실패이며, 말해진 것의 윤리를 능가하는 윤리적인 실패다.
돌에 새겨진 모년 모월 모일의 날짜들이 무한 우주 속으로 흡입되는 광경을 나는 상상했다. 왜 나는 데려가지 않았어요? 왜 모든 것 속에 나는 없어요? 나는 무의미해져도 무가 되지 않고, 무감각해져도 무가 되지 않고, 무한해져도 무가 되지 않고, 커도 어른이 되지 않고, 불행한 이웃을 그리워해도 불행한 이웃이 되지 않고 …… 되지 않는 모든 게 진짜 나란 말입니까. 되지 않는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뭐라도 됩니까.
- 조용한 지구, 부분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몸통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꿈속에서만 날아다닙니다. 나는 폐허에서 약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 이 중에 하나는 약초고, 다른 하나는 독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노인을 만났어요. 꿈결은 뒤척거리면서 이런 미치광이 노인들이 시간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를 꾸미죠. 그때마다, 약초를 원했는데 독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약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어느덧 나는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쳤어야 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어요.
- 잃어버려지지 않는/찾아지지 않는, 부분
‘나’ 는 아무리 “불행한 이웃을 그리워해도 불행한 이웃이 되지 않” 으며, 타인을 향한 정념의 극한은 어느 순간 감당키 어려운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치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실패 속에서 ‘나’ 는 타인의 불행을 ‘나’ 의 일로 겪어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데 대한 절망적인 규탄(조용한 지구)과, “꿈결” 에서조차 “용서” 를 허락지 않는 기나긴 자책으로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 르는 “시간” (잃어버려지지 않는/찾아지지 않는)들 속에서 말이다.
회피하고자 애써도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의 흔적은 존재 안에 머물려는 집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 를 개별화한다. 이렇게 김행숙은 우리 모두의 ‘죽은 어린아이’ (부재하는 공동의 인간)에게 무한히 다가가면서도, 개별적인 ‘나’ 로서의 그녀 자신이 된다. 김행숙의 시들은 그녀가 지닌 ‘회피할 수 없음’ 의 흔적, 불가능한 회피의 ‘고유한’ 흔적이다. 그래서 ‘에코의 초상’ 은 익명적인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그녀의 초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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