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
열면 그것들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잊어도 있겠다는 듯이, 있어서 잊지 못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잊으려고 열었다. 있으면 생각나니까, 나타나니까, 나를 옥죄니까. 잊지 못하니까.
있지 않을 거야, 있지 않을지도 몰라, 있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들은 잊었다. 잊지 못할 거야,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르지,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들은 바깥에 있었다. 안에서는 모르는 곳에. 안은 안온해서, 평이해서, 비슷해서 알 수 없었다. 속사정은 여간해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몸을 웅크려 농밀해지기만 한다.
평생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열 마음과 여는 손만 있다면. 없어도 계속 생각날 것이다. 머릿속에 나타날 것이다. 가슴을 옥죌 것이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
닫으면 그것들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야. 눈을 감기가 미안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그것들이. 계속 생각나면 계속 생겨나는 그것들이. 열어도 닫아도, 열지 않아도. 닫지 못해서.
있다.
그것
그것이 왔는데
이미 왔다는 하는데
나는 그것을 기다린다
격하게, 열렬하게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틀림없다고 환호한다
누군가는 지난번의 그것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듣기만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이 쌓일수록
밝았다가 어두워지고
화려했다가 누추해지고
몸집이 커졌다가 금세 쪼그라들기도 하는
그것은 가고
그것은 오고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그것은 또 한 번 대체되고
주머니 속에서 풀린 털실이
지구를 한 바퀴 휘감고 돌아오는 시간
그것이 왔는데도
꿋꿋이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것이 온다
그들
난 날은 같은데 간 날은 다른
사람 둘
남은 자는 먼저 간 자를 생각한다
왜 이렇게 빨리 떠났느냐고
저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난 날은 다른데 간 날은 같은
사람 둘
먼저 난 자는
한창때인데 왜 따라왔느냐고
나중에 난 자에게 역정을 낸다
난 날과 간 날이 같은
사람 하나
남은 자는
박수하다가 기도하다가
축하하다가 애도하다가
생일이 기일일 때
나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너인데
눈물 나고 맛 간 것은 왜 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남은 자의 몸은
이기기를 포기한다
주저 없이 주저앉는다
우리
괄호를 열고
비밀을 적고
괄호를 닫고
비밀은 잠재적으로 봉인되었다
정작 우리는
괄호 밖에 서 있었다
비밀스럽지만 비밀하지는 않은
들키기는 싫지만
인정은 받고 싶은
괄호는 안을 껴안고
괄호는 바깥에 등을 돌리고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하고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숨이 턱턱 막히고
괄호 밖 그림자는
서성이다가
꿈틀대다가
출렁대다가
꾸역꾸역 괄호 안으로 스며들고
우리는
스스로 비밀이 되었지만
서로를 숨겨주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
그는 맞춤법에 약했다 첫 직장에 입사할 때까지 ‘이래라저래라’ 가 ‘일해라 절해라’ 인 줄 알았다 한번은 사내 메신저를 통해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김 과장님은 나한테 맨날 일해라 절해라 하신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동료는 한동안 답신을 하지 않았다 메신저에서도 존칭과 경어를 쓰는 게 딱딱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농담할 줄도, 침묵을 참을 줄도 몰랐다 동료는 한참 뒤에 ‘이래라 저래라’ 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했고 한동안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창피한 나머지, 알아서 잘 못하고 있었다 26년 동안 뿌리 깊게 믿고 있떤 어떤 체계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저 표현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김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수그려 인사했다 김 과장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동료 역시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농담할 줄도, 침묵을 참을 줄도 몰랐던 그는 임기응변에도 젬병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깊디깊었다 황급히 메신저 창을 닫는데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차질 없이 발주 發注 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 공들여 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라고 묻는 이도 ‘우리가 하는 건 발주가 아니라 수주 受注 야’ 라고 일갈하는 이도 없었다 ‘일해라 절해라’ 말고는 일절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다가 상사가 지나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절하라는 거 아니었어? 그는 그런 줄 알았다 매일 일하고 절했다
퇴근 무렵, 김 과장이 회식하자고 했다 “내일 쉬는 날이지? 오랜만에 부어라 마셔라 어때?” 호탕한 그의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회식하기 싫어서였다 “이렇게 갑자기요? 데이트 있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도 “내일 건강검진 예약을 해두어서요” 라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이도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들은 회식하느니 일하고 절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 과장의 말이 ‘일해라 절해라’ 에 사로잡힌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일해라 절해라 부어라 마셔라 …… 발주하는 사람은 갑이고 수주하는 사람은 을인가? 그는 평생 을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하고 절하고 붓고 마시다 보면 회사의 숙주 宿主 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붓고 있었다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잘하고 싶었다
시인 오은은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 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 作亂 동인이다.
시인의 말
‘잃었다’ 의 자리에는 ‘있었다’ 가 있었다.
- 2023년 봄 오은
두 명의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휴대전화를 든 손이 읽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을 위하여
그 말을 듣는 귀가 말한다.
그게 가능하다고? 와하하.
그렇게 슬픈 웃음은 처음이었다.
“와하하” 는 시한폭탄 같은 말.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말.
이미 파편이 되어 사방팔방으로 튀어버린 말.
손이 닳도록 빌어도 사라지는 것이 있다.
귀를 닫아도 어떻게든 들리는 말이 있다.
허깨비로, 메아리로 자꾸 돌아온다.
있었다고.
해설
전방위의 슬픔, 전속력의 명랑
오연경 문학평론가
‘그’ 라는 지시대명사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그것’ 이라고 지시했을 때 타인이 나와 동일한 대상을 떠올릴 거라는 기대는 과거의 경험이나 현재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그것 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듣는 이를 이야기의 당사자로 호출하는 일이다. 오은의 이번 시집은 무수한 ‘그것’ 과 ‘그것들’ 과 ‘그’ 와 ‘그들’ 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거기에 독자를 연루시킨다. 시인은 우리가 ‘그것’ 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다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처지가 되어, 아니 실은 뭐가 뭔지 모르면서 알아야 하는 형편이 되어 그의 이야기 속으로 입장한다. 그거 알아? “수수께끼를 내지도 않았는데 /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사람” 처럼 우리는 골똘해진다. 곳곳을 뒤지다 보면 모르는 채로 알고 있던 무언가가 하나둘 떠오른다. 그렇게 바야흐로 떠올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그것,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그것이 된다. 오은은 ‘그것’ 이라는 텅 빈 대명사 하나를 던져놓고 신나게 변죽을 울려 우리로 하여금 꽉 찬 의미를 낚아 올리게 한다. 이 마술 앞에서 어리둥절해질 때쯤 그가 우리를 다름 아닌 ‘그곳’ 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곳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있었다. 누군가는 거기라고 했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진짜 거기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뼈 있는 농담이 들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 우리는 만났지, 인사했지, 함께 있었지. 어떤 날에는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했지. 죽자 사자 매달리기도 했지. 죽네 사네 울부짖었을 때, 삶보다 죽음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너나없이 그곳을 찾던 때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너와 나는 선명해졌다. 다름 아닌 다르다는 사실이. 같은 취향을 발견하고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는 가까워졌다. 어쩜 잠버릇까지 일치하는지 몰라, 네가 말했을 때 너도 나도 흠칫 놀라고 말았지. 우리 사이에는 고작 그것만 남아 있었다. 내 앞에 네가 있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났다. 내남없이 갔어도 내가 남이 되어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져도 이냥저냥 살아갔다. 체면은 삶 앞에서 이만저만하게 구겨지기 일쑤였다. 이러저러한 사연은 이럭저럭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쿵저러쿵 뒷말만 많았다. 이심전심은 없고 돌부리 같은 감정만 웅긋중긋 솟아올랐다. 삶의 곁가지에 울레줄레 매달린 건 애지중지하는 미련이었다.
아무도 그곳을 부르지 않아서
그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곳 전문
“그곳이라고 불리던 장소” 는 어딘지 특정할 수 없는 곳이다. 시에서 그곳 자체는 묘사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대해 나누었던 말들,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회고, 그곳을 찾던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곳에서 겪었던 감정이 제시될 뿐이다. ‘그곳’ 이 지시하는 장소는 여전히 모호한 추상성으로 남아 있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그런 일” 은 관용구의 리드미컬한 변주에 힘입어 구체적으로 살아난다. ‘죽다’ 와 ‘살다’ , ‘너’ 와 ‘나’ , ‘이’ 와 ‘저’ 를 변주하며 말맛에 감정을 실어 ‘눈물’ 과 ‘현기증’ 과 ‘미련’ 을 뽑아내는 솜씨는 역시 오은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감탄할 새도 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은 저 화려한 말들의 변주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지긋한 통증이다. 살려고 싸웠는데 죽음을 맛보았던, 너와 가까워지려다 내가 남이 되었던, 사람들과 부대끼며 구겨지고 상처받았던 사연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저마다 할 이야기가 많다. 오은은 ‘이냥저냥’ ‘웅긋중긋’ ‘울레줄레’ 같은 감각적 어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것들이 자석처럼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오게 한다.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은 말들로 지어진 장소,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자기 삶으로부터 불러내 함께 짓는 시의 집이다.
오은은 왜 대명사를 제목으로 삼아 시를 쓰기로 작정한 것일까? 명사가 사물을 대신하는 이름이라면, 대명사는 그 사물의 이름을 대신하는 이름이다. 사물로부터 두 단계 떨어져 있는 대명사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 지칭 없이 오로지 다른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독특한 지위를 지닌다. 이는 문법적으로 보면 소통의 효율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한 효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어의 자기 지시적 속성이다. 오은은 누구보다도 언어의 물성 및 자기 지시성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고유한 시작법을 만들어왔다. 그런 시인에게 대명사는 말이 말을 가리키는 세계, 말들에 대한 말이 숲을 이루는 왕국의 입구로 삼기에 맞춤한 것이다.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 수 없는 대명사가 제목의 자리에 놓일 때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떠올리지 않은 채 말과 말이 모여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꿈속에서는 걷지 않았다 달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미끄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땅을 내리누르는 것이 아닌 지면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참 멋지구나 그것참 이상하구나 그것참 특별하구나…… 나는 꿈속에서 그것을 하고 있었다 나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눈을 뜨면 머릿속이 새하얬다
어떤 공모라도 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맑고 예쁘고 근사한 것들이 말풍선이 되어 눈앞에 떠올랐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그것은 있었다 만질 수 없어도 분명 거기 있었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말풍선은 터지지 않았다 말들이 엉겨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멋지고 이상하고 특별한 이야기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여기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 그것 부분
“그것 참 맑구나” “그것참 예쁘구나” “그것참 근사하구나……” 라는 말은 대상을 향한 감탄이다. 그런 말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대상을 “땅을 내리누르는 것” 처럼 고정시키는 말이어서 발화하자마자 그것과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말의 용법 덕분에 우리는 걷거나 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꿈속에서는 “지면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이 미끄러진다. “그것참 멋지구나 그것참 이상하구나 그것참 특별하구나……” 라는 말은 대상에 닿을 듯 스치며 “나를 향해 미끄러지는 일” 에 대한 감탄이다. 이것은 일상과는 다른 말의 용법, “맑고 예쁘고 근사한 것들” 을 “말풍선” 에 넣어 바로 그 말풍선들을 가지고 노는 일이다. 말풍선은 사물이 아니라서 “보이지 않” 고 “들리지 않” 지만 만화 속 인물의 머리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눈 앞에 떠” 오른다. 시인은 “만질 수 없어도 분명 거기 있었” 던 말들을 모아 그 “말들이 엉겨 이야기가 되” 는 것을 지켜본다. 그것은 말들이 만들어낸 꿈속의 이야기이지만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여기로 돌아오는 이야기” 이다. 왜냐하면 말풍선의 꼭지는 언제나 먹고 말하는 입, 고픔과 부름과 아픔을 오가는 우리의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존재이고 말풍선이 존재의 집인 이 세계는 두근거리는 언어의 꿈이자 “멋지고 이상하고 특별한” 시의 꿈이다. “나는 꿈속에서 그것을 하고 있었다” 라는 문장은 저 말들의 세계로 입사하는 시인의 작업을 집약해준다. 이는 의미가 비어 있는 기표를 따라 미끄러지는 일, 지시 대상이 없는 ‘그것’ 들을 수집하여 꿈속에 풀어놓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면 오은의 시에는 투명한 말풍선에 들어 있는 것처럼 ‘말해진 말들’ 이 자주 출현한다.
갑자기 대화가 끼어들거나 예전에 들었던 말이 튀어나오고, 말의 꼬투리를 잡고 말에 대한 말들이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행동이 일어나면 동시에 그 행동에 대한 말들이 쏟아진다. 오은은 큰따옴표로 묶을 수 있는 누군가의 말이나 주고받은 대화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적으로 쓰이는 모든 말과 문장에 작은따옴표를 씌워 하나하나 고유한 수집품으로 만든다. 그러나 수집의 열정만으로 시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터, 오은에게는 어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일까?
유리잔에 물을 콸콸 들이부었다.
유리잔이 유리병인 것처럼. 빗줄기를 튕겨내는 유리창인 것처럼.
물 아래나 물 옆에 있어. 물 위에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물 위는 밝잖아. 드리웠겠지. 탐내듯 넘실대다 제풀에 드러났겠지. 물 옆은 추상적인데요? 좌우가 아니야. 고개를 돌리다가 “유레카!” 외치면서 끄덕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낚시가 아니니까. 차라리 실험이지. 비집는, 파고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훈련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실제로 해봐야 아는 거니까. 한 번에 성공하는 법이 없으니까. 반복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으니까. 물 옆으로요? 물 옆에는 없다는 희망적인 사실에.
유리잔에 든 물이 찰랑였다.
없어서 낙담하지만 없기에 망정이지. 무엇인지 모르니까. 하나인지 둘인지도, 고체인지 액체이닞도, 형태가 있는지 냄새가 나는지도, 눈빛에 반응하는지 콧바람에 휘청이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유리잔에 담긴 물을 일제히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과녁이라도 되는 것처럼. 중앙을 향해 전력 질주라도 할 것처럼. 세차게 들이받기라도 할 것처럼. 산소 원자가 놀라 나동그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수소 원자가 유리 바깥으로 맥없이 튕겨 나갈 것처럼. 견고하고 안정된 구조가 삽시간에 해체될 것처럼. 규칙이 깨지는 순간, 해저에서 은상어떼가 수면 밖으로 솟구칠 것처러머. 연상은 물 퍼붓듯 이어지고 직유는 물 쓰듯 거침없다. 미간에 물결 같은 주름이 생겼다.
- 그것들 부분
이 시는 말이 말을 만나 새롭게 남실대며 솟구쳐 세상에 없는 리듬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수집한 것들을 유리잔에 “콸콸 들이” 붓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말의 드러난 윗면이 아니라 아랫면이나 옆면이다. 말의 밑바닥에 잠재된 의미역을 염두에 두고 말과 말을 옆으로 이어 문장을 만드는 일을 현대 언어학에서는 ‘계열체’ 와 ‘통합체’ 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과 규칙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개념이 튕겨 나가고 “규칙이 깨지는 순간” 을 향해 모든 힘을 집중시킨다. 이것은 “비집는, 파고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실험이나 훈련,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반복된 시도에 가깝다. 이 어려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물 옆에는 없다는 희망적인 사실” 덕분이다. 정해진 것은 없고 “무엇인지 모르” 는 채 “실제로 해봐야” 안다는 것은 이 일의 어려움이자 즐거움이다. 낙담과 희망을 오가는 집요한 시도가 “견고하고 안정된 구조” 를 해체하는 순간 말들이 수면 위로 솟구치면서 연상과 직유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그렇게 해서 시인은 마침내 “유리를 뚫고 번쩍 솟구치는 것” “음악이 된 물”, 즉 시의 꿈에 다다른다.
그러니까 비법은 없다. 어떤 지침도 규칙도 소용없고 우연에 기댈 수도 없고 이전의 성공이 다음의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에서 보듯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는 태도이다.
마치 ‘오리-토끼’ 그림에서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보려는 불가능한 시도처럼 오은은 말의 의미를 사용하는 동시에 그것의 발음과 모양을 느끼려 하고, 말의 물성에 집중하는 동시에 그것의 내용과 뜻에 천착하려 한다. 가령 “산새가 울자 산이 꺼졌다” 라는 문장을 쓰면서 그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산 전체를 집어삼켰다는 의미와 산새 라는 합성어의 결정적 요소인 산 이 그 말의 탄생과 함께 퇴장했다는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욕은 말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의욕을 넘치도록 차오르게 하는 것이 말에 대한 애정만은 아니다.
말을 향한 오은의 의욕은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나온다. 그는 우리 모두를 상실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상실은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것이어서 상실한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이다. 결백하거나 약한 사람이라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이어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학교와 회사와 병원과 장례식장과 온갖 골목을 지나오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 늘어나는 것”,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표정을 뭉개고 망신을 주는 것이 있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살려고 애쓰느라 “무표정도 표정” 이 되어 “마침내 해독되지 않는 암호 처럼 길 한복판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을 시인은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일로 피로하고 각자의 사연으로 법석” 이고 “각자의 감정으로 괴롭다”.
“그” 와 “그들” 과 “우리” 라는 제목의 시에는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쳤거나 목격했을 법한 평번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오은은 그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전시한다. 그들의 말에는 마려움과 가려움 앞에 초조하고 화와 울음을 참지 못하며 버젓함과 의젓함을 이율배반적으로 구사하는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이 숨어있다.
사람은 명사다 너는 대명사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큰 명사가 아니라 그저 대신하는 명사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질투하고 질타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웃는다는 이유로, 똥오줌 못 가리고 웃는다는 이유로 그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아무 데서나 물색없이 웃는 이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즉각 그를 소환했다 평소와 같이 그가 웃을 때면 이런 말이 날아들었다 좋아? 살 만해? 만족스러워? 그가 웃길 때면 이런 말이 메다꽂혔다 우스워? 웃음이 나? 만족스러워? 평소와 다르게 물속에서라도 만족은 녹지 않았다 불 속에서도 만족은 타지 않았다 오줌 앞에서도 똥 앞에서도 만족은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사람은 고유명사로 태어나 보통명사로 살아간다
제 이름을 대신하는 명사로 분 扮 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해서 허허 웃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눈치없이 실실 웃는 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햇반처럼, 대일밴드처럼, 초코파이처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처럼, 지프처럼, 스크루지처럼 친하지 않아도 친근하게 들렸다 갈 수 없어도, 가지거나 만나지 못해도 섭섭지 않았다그저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되었다 명사는 대체되지 않았기에 그의 이름은 하엽없이 낡아만 갔다 그는 보통명사처럼 추상명사가 되었다 사랑처럼 흔하고 희망처럼 귀하지만 삶처럼 끝끝내 막연했다 없음의 대명사처럼
- 그 부분
‘그’ 는 잘 웃어서였는지 잘 웃겨서였는지 “웃음의 대명사” 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때가 아니거나 장소가 빗나가거나 경우에 맞지 않아서 그는 “민폐의 대명사” 로 전락했다. “사람은 명사다 너는 대명사다” 라는 문장은 이중의 의미를 노린 것이다. ‘사람’ 과 ‘너’ 라는 단어의 품사에 대한 진술로는 “당연한 얘기” 지만, 다른 사람과 너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진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웃음의 대명사” 인 그가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다시 보통명사에서 추상명사로, 그리고 끝내 “없음의 대명사” 로 변모해가는 과정은 그를 규정하고 질타하고 소환하고 비아냥거리며 마음껏 사용하다 갖다 버린 사람들의 말을 통해 일어난 일이다. 그는 단지 잘 웃었을 뿐인데, 무시하는 말에도 “피식 웃고” 메다꽂는 말에도 “허허 웃어버렸” 는데, 그의 존재는 “제 이름을 대신하는 명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말 그대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본래 이름은 그 삶을 대신하는 기표로 쓰이는 것인데, 이 시에서는 거꾸로 사람이 기표가 되어 어떤 속성을 대신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 부서지고 마모되어 사라져버린 존재의 고유함을 시인은 품사의 존재론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은은 주로 대화의 상황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와 오가는 감정과 어긋난 욕망과 상처 입은 내면을 발견한다. 그의 시에서 종업원, 세입자, 말단 회사원, 공사장 인부, 낙오자 등 “평생 을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 은 이들의 처지는 ‘말 못 함’ 또는 ‘혼잣말’ 로 그려진다. 정확한 문법과 당당한 태도로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빈정거림과 비난과 오해와 매도에 속수무책인 이들은 “어떤 말로도 나를 드러낼 수 없고 마음속으로 한 말” 속에서도 소낙비를 맞는다. “농담할 줄도, 침묵을 참을 줄도” 모르는 그는 회사에서 맞춤법 실수로 웃음거리가 되고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 을 잘하고 싶었던 그의 순정한 마음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사적으로 만난 우리 사이라면 상황이 다를까? 모임에 나가면 “뭐 먹을까?” 를 중심으로 대화가 공회전하면 “김이 새고” “화에 걸려 자꾸” 넘어 지느라 “대화가 이어지지 않” 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지만 “독백이 모인다고 해서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 고 “백주에 만나니 어색” 해서 억지로 던진 만들은 대화를 점점 더 “부자연” 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매일 저 무성한 말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소화 消化” 하고 “소화 消化” 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오은은 저 수많은 대화의 디테일한 맥락 속에 켜켜이 숨겨져 있는 미묘한 어감과 표정과 감정과 태도 들을 언제 다 포착하고 받아 적고 짐작하며 안쓰러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보았으니까 어떤 것을 들어버렸으니까 일어나라고, 잠들면 안 된다고 누가 그랬으니까 그는 머뭇거린다 잠깐, ‘누가’ 라고?
누가, 누가, 누가…… 누가? 누가는 누가 累加 되다가 어느새 누 累 가 되었다. ‘누가’ 가 맞아? 그는 한번 뜨인 눈을 다시 감지 못했다.
……
꼭두? 꼭두각시의 그 꼭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아닌, 조종하는 꼭두각시다 놀림당하는 꼭두각시가 아닌, 놀음하는 꼭두각시다
창문에 있었다 눈을 뜨이게 만든 것이, 코를 움찔하게 만든 것이 쇼윈도에 나란히 서서 보란 듯이 포즈를 잡는 꼭두사람들 …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까? 사람이라면 믿어도 될까? 사람이라서 인기척한 걸까? 사람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일까? 차라리 그것들에 가까울까? 머리가 아팠다 코가 움찔했다 눈을 뜨면서 눈이 뜨이고 있었다 보는 일은 아직 끝장을 보지 않았다
- 그들 부분
화자는 꼭두새벽에 눈이 절로 뜨여서 글을 쓰다가 이 상황이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의아함은 “누가” 라는 질문에 맺히고 질문은 “누가 累加” 되고 “누 累” 가 되다가, 그것이 꼭두새벽에 “눈 뜬 채 꼭 곡曲 을 부르겠다는 듯이” 현현한 “꼭두사람들” 이라는 확신에 이른다. 낮에 곳곳에서 조종당하고 놀림당하던 꼭두각시가 글이 되겠다고, 목소리가 되겠다고 “조종하는 꼭두각시” 로, “놀음하는 꼭두각시” 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이건 그들이건 그것들이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보는 일과 듣는 일을 끝장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 꼭두각시야말로 “없음의 대명사” 이지만 실은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 이라고 알려주러 오는 ‘있음의 대명사’ 인 것이다. 오은은 저 잊히지 않는 꼭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시를 쓴다.
오은은 “ ‘잃었다’ 의 자리에는 ‘있었다’ 가 있었다” 라고 말한다. ‘잃었다’ 는 것은 무언가가 지금 - 여기에 없음을 의미하면서 언젠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한다. ‘없다’ 와 ‘있었다’ 사이의 시차와 간극을 메우는 것이 우리의 슬픔이다. 더 이상 ‘이것’ 으로 가리킬 수 없는 대상을 다시 말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 ‘그것’ 을 열렬히 호명한 이번 시집에 가득한 것은, 그러니까 슬픔이다. 시인의 대명사는 잃어버린 것을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있게 한다. 시인과 독자는 ‘그것’ 을 매개로 마주 보고 말을 나누어서, 그 사이 입김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지금 - 여기 없는 것들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이것이
이것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데
오죽 행복했는데
오죽하면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여기에 없으므로
이제 이것이 아닌 것
모르는 것은 아니므로
그저 어떤 것은 아닌 것
잃어버린 이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은 여전히 이것일까
한눈을 잠깐 판 사이
이것은 이것이기를 지속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것이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 이것 부분
이번 시집에서 “이것” 이라는 제목을 지닌 유일한 시다. 지금 - 여기에 없는 것, 그래서 “이것” 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을 이 시는 집요하게 “이것” 으로 호명한다. “이것이 있어서 / 얼마나 든든했는”지, “오죽 행복했는” 지 추억을 되새기며 “이제 이것이 아닌 것” 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눌러보지만 “이것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실감을 추스르기 힘겹다. 이것은 없는데 자꾸 이것이라고 가리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이미 잃어버린 것을 가장 가까운 이쪽으로 끌어다 놓으려는 저 마음자리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한눈을 잠깐 판 사이” 이것이 사라졌다고, 보지 않아서 “이것이 이것이기를 포기” 했다고 자책하는 마음의 무게를 보아야 할 것이다. 계속 “이것” 이라 불러서 계속 여기 로 생겨나게 하는 말의 힘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놀이가 아니다. 오은은 말놀이의 대명사이지만 말놀이라고 알려진 어떤 시작법의 기표가 아니다. 그는 말의 사태와 존재의 사태가 하나로 모아지는 매 순간의 삶을 살아내려 애쓴다. 그 순간은 우연도 작위도 아닌, 오직 말로 존재를 살고 존재로 말을 재는 집요한 삶의 의욕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아빠, 나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 그곳 전문
잃어버린 대상, 사랑하는 사람이 꿈속에서 나를 향해 미끄러져 온다. 현실에서 만든 말풍선이 꿈속의 말풍선을 불러낸 것이다. 슬픔으로 꽉 차 터질 것 같은 풍선이다. 이곳의 몸이 슬픔을 이기기를 포기할 때 꿈속에서 범람하는 것이 있다. “가마득한 그날” , ‘있었다’ 의 그곳까지 흘러넘치는 것은 잃었다 의 이곳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안간힘, 전속력의 명랑이다. 오은의 시에 범람하는 명랑은 “내 앞에서도 /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 는 현실에서 웃음으로 너의 울음에 닿아보려는 사랑의 몸짓이다. 오늘 밤 창가에 꼭두가 와서 “나 왔어!” 라고 인사한다면 이제 우리 안의 명랑이 범람할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과 웅덩이에서 차오르는 슬픔이 세상을 전방위로 에워싼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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