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김경주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HUSH 感나무 2024. 11. 16. 20:34

 

 

 

김경주 - 2012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외계 (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畫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 色 )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네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 게스트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파이돈

- 가늘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름 없는 바닷속 돌굴의 벽에 붙어 사는 미물(微物)들은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해간다는데 그곳엔 정말 눈없는 물고기* 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대신 눈이나 날개 기관 따위는 다 소실돼버리고 팔다리만 조금씩 가늘게 길어진다는데 가늘어진다는 말의 소요들. 이것은 5~6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얘기다 젖을 먹고 자란 새들이 날개를 펼쳐놓고 고공에서 알 수 없는 바닷속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 들의 눈은 그런 해저의 동굴 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백만 킬로미터의 바람을 날아와 새들은 물 안의 시간들만 바라보고 있다 새들은 아무도 모르게 말라간다 사람들은 아무도 새들이 마르는 것에 참여할 수 없다 바람에 가까워지기 위해 어미로부터 눈을 버렸고 너희들이 날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내게는 점점 가늘어지는 일일 뿐이어서 마르고 있다는 건 점점 세계 밖으로 희미해지는 일이란다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 이름 없는 동굴의 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다시 우리가 모르는 이국(異國)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령, 심해에서 긴 혀를 꺼내 바닥을 핥고 있던 물고기들이 그물에 건져올려질 때 눈을 뜨지 못하고 내는 가는 신음 같은 건 사라진 새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눈이 없는 물고기들을 어부들이 다시 심해로 돌려보내준다 처음 그물질을 배울 때 그들은 물고기들이 바닷속에 사는 음악인들이라는 것을 익혔다 해저에서 백 년에 한 번쯤 눈을 치켜뜨고 물을 떠나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물고기나 물 밖에서 백 년은 새의 눈을 따라 항해하는 어부들은 고요의 바닥에서 눈을 감는 일이 적요로운 것임을 안다 그들의 몸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은 자신의 눈들이 조금씩 인성(人性)의 밖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겐 돌에게 잠시 번진 물고기의 무릎도 없고 물고기의 보일 듯 말 듯한 슬픈 귀들도 없지만 조금씩 가늘어지는 몸이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말라가는 것이 점점 너에게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몇 달가량 집을 비우고 돌아와 보니 욕조에 말 한 마리가 배를 깔고 앉아 있다 그 말은 또 다리를 어디다 둔 것일까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또 다른 얘기다

 

* 곤

 

** 붕

 

 

 

 

 

 


 

 

 

 

아버지의 귀두

 

어느 날 아버지의 귀두가 내 것보다 작아졌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장난감 트럭을 들고 목욕탕에 가지 않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악어 벨트를 허리에 차고 밖에 나갈 수 없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속주머니를 뒤져

오락실에 갈 수도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30년 넘게 혼자 목욕탕에 가시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복권의 숫자를 고민하며 혼자 씩 웃는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나와 같은 THIS를 산다

 

돗자리에 누워서 잠드신 아버지의 팬티 사이로 누름한 불알 두 쪽이 바닥에 흘러나온 것을 본다 자궁이 넓은 나무와 자고 돌아와 나는 누런 잎을 피웠다 잠든 내 옆으로 와 아버지가 귀뚜라미처럼 조용히 누웠다 나는 문득 자다가 일어나 삐져나온 아버지의 귀두가 저렇게 작았나 하는 생각에 움찍했다 귀두라는 것이 노려볼수록 자꾸 작아지는 것인가 귀두란 그런 게 아니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민항기의 대가리처럼 푸르르 가열된 텐데 아버지와 나는 귀두가 닮은 나무, 한쪽으로만 일어서고 한쪽으로만 쓰러져서 잠드는, 축 늘어진 아버지의 THIS를 잡고 웃는다 씨벌 아비야 우리는 슬픈 귀두인 게지 죽은 귀두를 건드리면 뭐하니? 그런 생각 끝에 나는 튼튼 우유를 하나 사 가지고 와 잠드신 아버지 옆에 살짝 놓아드렸다

 

양쪽으로 여십시오 / or 반대편으로 여십시오 /

 

 

 

 

 

 

 

 

 

 


 

 

 

 

 

드라이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房) 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해설 -

 

불가능한 감수성

 

이광호 문학평론가

 

 

2000년대의 시단에서 김경주의 등장은 돌발적이고 뜨거운 사건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돌발성의 내용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는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의 반서정적인 전위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것의 광휘를 거의 폭력적인 수준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시는 연극과 미술과 영화의 문법을 넘나드는 다매체적인 문법과 탈문법적인 언어의 범람, 그리고 낭만적 감수성의 극한에서 그것이 어떻게 폭발하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가 보여준 것은 그 낭만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자아화 라는 서정적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서정적 논리 자체가 내파되는 언어적 퍼포먼스를 연기한다는 것이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 畫家 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외계 外界 전문

 

 

시집의 맨 앞에 자리 한 이 시는 김경주의 시론 혹은 창작 방법론의 면모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술가는 두가지 조건에서 출발한다. 우선은 양팔이 없이 태어 났다는, 장애 혹은 불구의 조건이 있다. 다른 하나는 바람 을 그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라는 조건, 그 형태를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리기 때문에 이해받기 어렵다는 조건이 있다. 이런 예술가의 초상은 아마도 낭만주의 시대와 모더니즘 시대의 저주받은 예술가의 초상을 결합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불구와 그의 사회적 소외와 그의 구도적 자세는 모두 어떤 전형적인 예술가의 초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런 예술가의 면모를 다른 차원으로 진입시키는 것은, 그가 그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마지막 진술의 힘이다. 예술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고 하는 것이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 일 때, 그것은 두가지 시적 맥락을 동시에 함유한다. 우선 하나는 그가 그리는 것은 결국 실재하지 않는 것 그릴 수 없는 것 이라는 것이리고, 따라서 그의 예술 행위는 불가능성에 대한 추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김경주 시의 두 가지 중요한 출발점이 포착된다. 시는 불가능성에 대한 추구라는 것, 다시 말하면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 시라는 것, 다른 하나는 시는 시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에 대한 시라는 것, 시는 결국 부재하는 언어제 대한 언어라는 것, 이 지점에서 김경주의 시는 낭만적 포즈를 뛰어넘어 부재하는 언어에 대한 시적 퍼포먼스 차원에 도달한다. 이 시의 제목이 외계 인데, 그것은 바깥 세계라는 의미에서의 낭만적 지향을 포함하지만, 그 지향이 자기 몸의 부재하는 일부일 때, 그 외계는 단지 내부에 대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가는 외부라는 시적 맥락을 동시에 포함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리는 내용 혹은 결과가 아니라, 그리는 행위이며, 그 행위의 불가능성이며, 불가능성의 시적 가능성이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 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 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 목련 木蓮 부분

 

 

외형적으로 이 시는 서정시의 1인칭 주체인 와 시적 대상인 목련 사이에서 구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이해할 때, 목련은 1인 주체의 서정적 동일성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 와 목련 의 관계는 그런 동일성의 맥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혹은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같은 문장들이 반복됨으로써, 목련 은 어떤 순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문득 이라는 부사의 반복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 순간은 갑자기 도래한다. 다시 말하면, 목련 의 내면적 상태의 등가물이 아니라, 가 문득 마주하는 어떤 다른 시간 의 이름이다. 그 시간은 아마도 삶의 다른 계기, 혹은 삶의 다른 기미를 대면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 앞에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대상이다” 같은 내적 진술의 문장들이 놓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단정적인 진술들은 김경주 시의 1인칭 시적 주체의 서정시적 권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목련 의 시간이다. 목련의 그늘 은 1인칭 주체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1인칭 주체와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목련 의 위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연이다. 첫 문장은 1인칭 주체가 죽은 꽃을 본다. 이때 시선의 주체는 1인칭 주체이며, 대상은 목련이다. 아주 일반적인 서정시적 상황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는 목련이다.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이 문장에서 동사의 주어는 목련 이 된다. 세번째 문장에서는 제3의 주어가 등장한다. 바로 그늘 이다. 비리다 는 형용사이다. 비리다 는 맛이나 냄새에 관련된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숨은 주체는 그런 감각을 느끼는 주체일 것이다. 그 감각의 주체는 이 시의 1인칭 주체일까? 아니면 목련일까? 이렇게 숨어 있는 주체의 모호성은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의 주어인 그늘 의 지위를 강화시킨다. 여기서 그늘은 1인칭도 3인칭도 아닌 비인칭 적 존재로서의 또 다른 익명적인 주체의 자리를 암시한다. 그때 이 시는 서정적인 동일성의 구조로부터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이 시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자취 自取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 12년 동안 자취했다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에 두 번 등장하는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 그렇게 되다 라는 것이다. 이 두 문장에서 자취 의 주어는 상당히 모호하다. 앞의 자취 를 둘러싼 숨은 주어가 1인칭 라고 추정해본다 하더라도, 두번째 문장에서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 라는 표현은 의미론적으로 모호하다. 이 시에서 목련 은 시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은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 자취목련그늘 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면서, 또한 그것들 사이에서의 다른 존재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자취’ 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그 목련의 시간은 다음 시에서의 저녁의 시간 과 비교될 수 있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펴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닷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으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들을 본다

 

- 저녁의 염전 부분

 

 

외형적으로 서정시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염전과 시적 자아와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이 시의 문장들은 대개 염전을 둘러싼 진술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진술의 주체로서의 1인칭 화자의 존재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술의 주체는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고, 시는 염전 자체의 이미지를 전경화한다. 그럴 때 이 시의 문장들의 주어는 대개 사물과 풍경 그 자체가 된다.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노을 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노을과 물의 관계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1인칭 화자의 존재는 후경화되는 사태이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 물의 내장들은 본다 에서 본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그 인격적 주체의 면모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다친 말에 돌을 놓아 /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 같은 존재들의 출몰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이 시 전체를 구성하는 언어들이 죽은 자들의 언어 와 유사하다는 것, 혹은 이 시의 담화 주체가 살아 있는 인격적 동일성을 구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문장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 염전의 어둠은 온다 라고 했을 때, 이 시의 내적 풍경은 이미 완성되어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의 내장 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죽은 자들의 언어와 비인칭적인 익명의 시선을 경유해서이다. 김경주의 시가 그 낭만적 도약에도 불구하고 서정시의 미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그의 시적 퍼포먼스가 하나의 인격적 동일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낭만적인 것의 내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경주의 첫 시집에서 음악 과 관련된 단어와 이미지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경주의 시에서 음악 이란 하나의 시적 모티프이고 이미지이면서, 그의 시가 지행하는 어떤 극단의 경지이다.

 

 

그리고 하나의 시간

만삭의 물고기들은 물속에서 어른거리는

환영을 따라 날고 물이 져 나르는

그늘의 부력 안에서

배는 물의 무늬를 닮는다

배의 환영을 알아보고 등대는 문득 입김을 불고

바람의 장례를 치르는 관습은 음악이 되었다

행주가 상을 문지르듯 배가 쓰윽

들어오고 있다

하나의 개념이 최초의 시간에 정박한다

 

- 봉인된 선험 부분

 

 

음악은 하나의 매체,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시간 혹은 최초의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바람의 장례를 치르는 관습 이 다른 차원의 시간을 불러들이는 주술적인 의례 같은 것이라면, 음악은 그런 시간에 대한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봉인된 선험 이라는 이 시의 무거운 제목이 부분적으로 암시하는 것처럼, 그런 의례, 그런 퍼포먼스는 경험적인 지각에 앞서는 어떤 개념이 정립되는 순간이며, 그 순간이야말로 음악이 인도하는 최초의 시간 인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 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지구에서 떠올라온 그네 하나가 흘러다닌다 인간의 잠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동안 방에서 날아와 나는 그네를 탄다 내 눈 속의 아리아가 G선상을 떠다닐 때까지, 열을 가진 자만이 떠오를 수 있는 법 한 방울 한 방울 잠을 털며

 

밤이면 방을 밀고 나는 우주로 간다

 

- 우주로 날아가는 방1 부분

 

 

우주 사이의 상상적 공간을 구축하는 이 시에서, 두 눈의 음 音  제 몸의 음악” 같은 표현들은 음악 을 삶의 실존적 개별성에 밀착된 개념으로 만든다. 음악은 지하 방 들이 그런 것처럼, 개개인의 생 자체가 실려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라고 말할 때, 그 음악은 제 정신 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 이성적인 논리를 넘어서는 경험이다. 음악은 경험과 이성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언어이며, 그 언어는 개인의 생과 몸의 개별성에 밀착된 것이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 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부분

 

 

이 시에서도 음악은 개별적 인간의 몸속에 살고 있는 어떤 것이다. 붓 다의 찬 눈붓다의 속눈썹 이라는 종교적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 종교적인 뉘앙스는 특정한 종교적 세계관에 의지하고 있다기보다는 음악이라는 이름의 불가능한 감수성” 을 향한다. 음악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스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 를 데리고 온다. 음악은 그렇게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 이며, 그 영혼을 상상할 수 있을 때, 는 혹은 겨우 음악이 된다. 김경주의 시에서 음악은 특정한 예술의 영역도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불가능한 시간의 이름이며, 불가능한 감수성의 이름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러나 가능성의 불가능성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가능성 이라는 예술적 퍼포먼스이다. 김경주의 음악이 가리키는 것도 지금 여기서 가능할 수 없는 것을 불러들이는, 불가능한 것을 향한 시적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 夜景 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 드라이 아이스 부분

 

 

앞에서 김경주의 불가능한 음악이 어떤 시간의 이름이라고 말했지만, 김경주의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감수성이 다다르는 지점은 결국 외부의 시간 에 관한 것이다.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 을 감지한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이 손끝에 와 닿는 짧은 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만난다. 피부에 타붙는 결빙의 시간들내 안의 야경 夜景 을 다 보여줘버린 듯순도 높은 저 시간 이다. 이 짧은 시간은 1인칭 시적 자의 동일성이 집약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1인칭 시적 자아의 기억의 집적이 만들어낸 시간이 아니며, 그 시간들과는 이질적인 낯선 차원의 시간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라는 선언은, 김경주의 시적 주체의 위치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김경주의 시적 주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살았던 시간의 반대편을 지향한다. 그런 시적 지향성은 주체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불온한 모험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스스로 귀신처럼”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그 이상한 순간들은 외부의 시간 이면서 내안의 야경 이 암시하는 것처럼,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시간의 다른 차원이다. 그때 그 시간은 (내부의) 외부의 시간 이 된다.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르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에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 房 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부분

 

 

불 끄고 누워 있는 방의 창문에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 그 두드림의 주체를 짐작하다가 시의 화자는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간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시에서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이란 미지의 시간, 혹은 미래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을 갖게 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어떤 과거는 누군가의 기억의 동일성을 보장해주는 근거로서의 과거가 아니다.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 으로 명명될 수 있는 그 과거는 누군가의 얼룩 일 수도 있고, 어떤 방 房 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 자욱한 문장 하나 는 누군가의 문장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문장은 의 것일 수도, 의 것일 수도 있으며, 그것 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그 문장의 주어가 익명적인 존재가 될 때, 김경주의 시적 주체는 거의 유령 에 가까운 것이 된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라는 마지막 문장에 드러내는 것처럼, 나 - 유령 - 오래전 나 라고 할 수 없는 의 외부의 비동일적인 이다. 오래전 나를 서성거 린다는 문법적으로 모호한 문장도 결국 라는 존재의 익명화를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시적 주체의 위치를 드러낸다.

앞에서 김경주의 시가 어떻게 서정시적인 문법을 내파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서정시에서 중요한 시간대는 서정적 자아의 충일한 감정이 집약되어 있는 현재 라고 할 수 있다. 김경주의 시에서 시간은 충일한 현재의 순간을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시간의 진행을 품고 있는 서사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도 아니다. 김경주의 시적 시간은 시적 주체의 바깥에 있는 시간이며, 시적 주체의 자리는 시간의 바깥으로 설정한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는 이 시집의 제목이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시적 주체는 세상에 없는 시간에 대해 노래하고, 세상에 없는 시간을 상상하고, 세상에 없는 시간에 머문다. 바로 그러한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의 주어는 동일적인 1인칭 주어일 수 없으며,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들이 된다. 이를테면 저녁은 오래된 약통 속의 / 먼지를 바라보네 / 약봉지에 적힌 누런 이름과 나이들 / 내 이름도 있고 당신 이름도 있네 봄밤 같은 문장에서, 그 시간을 보는 주어는 저녁 자체이다. 그런 비인칭적인 존재들이 출몰하면서 김경주의 시는 없는 내 아이가 가위로 자신을 조금씩 자른다 와 같은 비실재의 주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어둠이 이 골목의 내외 에도 쌓이면

어떤 그림자는 저 속을 뒤지며

타인의 온기를 이해하려 들 텐데

내가 타인의 눈에서 잠시 빌렸던 내부나

주머니처럼 자꾸 뒤집어보곤 하였던

시간 따위도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감추고 돌아와야 할 옷 몇 벌, 이불 몇 벌,

이생을 지나는 동안

잠시 내 몸의 열을 입히는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종일 벽으로 돌아누워 있을 때에도

창문이 나를 한 장의 열로 깊게 덮고

살이 닿았던 자리마다 실밥들이 뜨고 부풀었다

내가 내려놓고 간 미색의 옷가지들,

내가 모르는 공간이 나에게

빌려주었던 시간으로 들어와

다른 생을 윤리하고 있다

저녁의 타자들이 먼 생으로 붐비기 시작한다

 

- 먼 생 부분

 

 

헌 옷 수거함에 헌 옷과 이불을 구겨 넣고 돌아오다 뒤돌아보는 순간, 이 시의 화자는 수거함 바깥으로 흘러나온 언젠가 간장을 쏟았던 팔 한쪽 을 발견한다. 이 팔 한쪽은 이미 나 의 몸을 떠난 것이지만, 그러나 내 가 속했던 내부시간 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전해준다. 타인의 눈에서 잠시 빌렸던 내부나 / 주머니처럼 자꾸 뒤집어보곤 하였던 / 시간 따위도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은 그 장면을 통해 시적 주체가 직관하게 되는 생의 상황이다. 내가 모르는 공간이 나에게 / 빌려주었던 시간 이라는 표현이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이불창문 의 이미지들은, 내 생 이라는 것이 낯선 공간에 게 빌려준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적 주체가 자기동일성의 근거로서의 나의 시간 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이와 같은 상황은 김경주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매력적인 것은 다른 생저녁의 타자 들의 감각을 통해 먼 생 의 시적 내포에 또 다른 맥락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 1인칭의 시간으로부터 이탈하는 시적 주체가 그 이탈의 맥락 속에서 다른 생 - 타자 의 윤리를 만날 때, 먼 생먼 생 이면서, 타자들의 먼 생 이 된다.

의 생이 결국 먼 생 이라는 것을 감각하는 자리로부터 그것이 타자들의 먼 생 이라는 데로까지 나아가면서, 나를 서성인다’ 라는 김경주 특유의 문법은 다른 생을 윤리한다 라는 또다른 시적 문법과 만난다. 이런 장면에서 김경주라는 사건은 현란한 미적 퍼포먼스가 다른 생 의 윤리와 결합하는 비밀 을 선물한다. 를 1인칭의 시간으로부터 이탈하여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시간을 직면하게 하는 것은, 타자의 시간을 경험하는 사건이다. 그의 시 속에서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아의 힘은 사라지며, 로부터 이탈하는 지점으로 데려갈 때, 그것을 이끄는 것은 불가능성 의 시 쓰기이다. 2000년대를 점령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는 선언은, 그 불가능한 감수성 이 어떻게 시로서 연기 演技 되는가에 대한 시적 선언이었다. 그 불가능한 감수성은 2000년대 시의 불온하고 매혹적인 얼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