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진은영 시집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HUSH 感나무 2024. 11. 26. 02:55

 

 

 

 

 

진은영 - 2022 -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생일

 

사랑의 간장병을 쏟으신다 하얀 종이에

가장 맛 좋았던 내 유년 시절에

달팽이 눈처럼 얌전한 하루가 솟아오르고

엄마, 이건 너무 짜요

 

아니, 어머니 물을 주셨다

내 몸의 슬픔이 완두콩처럼 자라났다

달까지 무성하게

 

초록 유리처럼 나를 찌르면서

숲은 자라났다

 

어머니 생을 주셔서 감사해요

존재의 가시에 찔리면서

엮은 부재의 장미꽃 한 다발을

 

당신은 갈비뼈를 뽑아

남자 대신 나를 만드셨다

 

흰 냉장고 문에 비친 피투성이 내 얼굴

불확실하게 반짝거린다.

 

 

 

 

 

 

 

 

 

 


 

 

 

 

남아 있는 것들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듯하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회색 담벼락에 머리를 짓이긴 붉은 페인트 붓처럼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헝클어놓은 네가 있고, 젖은 바지들의 돛,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종이

 

태초에 하느님, 종이를 만드셨다.

종이로 수많은 별들을 접다가 피곤해지셨다.

종이 위에 은유의 침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지셨어.

 

날개 달린 완전한 기쁨 멀리 달아난다. 그러면

얇은 피부의 파란 정맥같이 흘러가는 슬픔 하나

내가 그릴 수 있다.

고요히 펼쳐진 여기에

 

폭우는 잠시 내리지 않는다.

네 개의 흰 돛처럼 팽팽한 침묵을 달고

나는 나아가리라, 천천히

깨진 도토리 껍질의 반쪽으로

줄어드는 필연의 섬을 향해.

 

하느님 외치신다,

눈 뜨고 잠든 채로

- 안돼! 종이로는.

그의 요란한 잠꼬대가

제지공장에 세워둔 재고 종이기둥 구멍에서

금빛 트럼펫처럼 울린다.

 

하긴, 상상해보라

종이로 접힌 수만 종의 동물을.

노아의 방주도 소용없을 테니

약속의 무지개가 뜨면서 떨어뜨린 검은 한 방울에

영혼까지 젖어 흐물거리는 종種을 무엇에 쓰겠는가.

 

나는 졸린 얼굴로 내려다본다, 자꾸 감기는 눈으로

임시 사막의 작은 하늘 아래

노트의 희미한 점선처럼 줄지어 가는 세상의 먹구름을,

그들을 따라 흐르는 충혈딘 두 눈을. 그러면

 

고요한 침엽수들로 찌르고 싶다.

인정머리 없는 하느님의 눈동자를.

꿈의 대홍수 - 잠가뒀다 일제히 열리는 자동 수도꼭지 같은 거 말고

그가 고통으로 눈 못 뜬 채 뿌리는

국지성 호우에 익사하고 싶다

 

임시 사막의 작은 하늘 아래서

나는 기다린다.

육화된 질문,

한 줄의 문장이 언제쯤 흘러내릴까.

존재의 메마른 진흙 위에

신이 잠든 노란 달밤 위에

 

한 줄기 비로 -

한 줄기 피로 -

 

 

 

 

 

 

 

 

 

 


 

 

 

 

 

스타바트 마테르

 

십자가 아래 나의 아소가 울고 있다

오 사랑하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나는 꿈에 못 박혀

아직 살아 있답니다

 

밤을 향해 돌아서는 내 입술을

당신의 젖은 손가락으로 읽어보세요

세계는 거대한 푸른 종처럼

내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어요

 

나는 밤의 부속품처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떨어져 나왔어요

별처럼 순한 당신 눈빛과

네 개의 길고 따듯한 배 속을 지나가는 계절들 사이에서도

소화되지 않은 채 나는 남았어요

 

당신은 오래된 술 같아요

내가 마시는 술에 슬픈 찌꺼기가 떠도는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마시든, 나는 두꺼운 취기를 껴입지만 늘 추워요

나를 향해 당신이 동굴처럼 뚫려 있기 때문

 

우리는 두 팔을 뻗어 서로를 안아요

오 사랑해

서로를 자꾸 끌어당겨요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두려움보다

슬픔보다

흰 재가 더 높이 쌓이고 있어요

 

어머니, 결국 나는 내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뚜껑 열린 석관이

세월 속에서 제 주인을 유실하듯

당신이 당신 아이를 잃어버렸듯

바람이 날아가는 투명 비닐봉지를 분실하듯

 

당신은 찾을 수 없어요

정말이지 우린 다르게 생겼어요

당신을 닮았던 얼굴 위에 낯선 고통의 진흙을 덧칠하며

내 얼굴은 점점 두껍게 말라갈 테니

 

목이 말라요, 어머니

마른 풀밭 위에 빈 병처럼

나는 또 흘러들어요

당신이 몇 방울 남지 않은 곳으로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 2022년 8월, 진은영

 

 

 

또 오랜 시간을 문장들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문학은, 스스로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로제 그르니에의 문장을 읽고 두려워졌다.

얼마나 많은 것이 내 단순함의 칼날에 잘려 나갔을까?

아마도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을 견디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이 자꾸 미워졌다.

 

그때마다 다른 문장들이 다가왔다.

나는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하는 물고기였으니.

엠페도클레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문장이다.

아무래도 나는 엠페도클레스의 후예인가 보다.

사랑의 윤회를 믿는 것 같다.

 

 

 

 


 

 

 

 

 

해설 -

 

사랑과 하나인 것들: 저항, 치유, 예술

신형철 문학평론가

 

 

인생은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셰익스피어 시대 이래로 사용된 rhyme or reason 이라는 관용구로 주로 neither rhyme nor reason 과 같은 부정문 형태로 쓰인다. 어떤 말이 외적 질서도 없고 내적 논리도 없을 때 사용할 수 있다. 우리 식으로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운운하며 상대를 타박할 때처럼 말이다. 모름지기 말이라면 음성학적 재미의미론적 조리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 지금은 용법이 확대되어서 삶의 상호 보완적인 두 가치를 표상하기도 한다. 유명한 팝재즈 곡 당신 인생의 남은 날을 어떻게 보낼 건가요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에는 당신의 남은 날들의 reason과 rhyme이 모두 나와 함께 시작되고 끝났으면 해요 라는 노랫말이 있고, 영화 노팅힐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건 인생에는 rhyme도 reason도 없다는 거야 라는 대사가 나온다.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멋과 뜻? 재치와 이치? 묘미와 의미?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한국어로 딱 맞게 지칭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라니. 그건 그렇고, 시야말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좋은 시는 rhyme(미적인 것)과 reason(논리적인 것)을 겸비한다.

 

 

별들이 움직이는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장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전날 내게 하늘색 색연필을 빌려줬다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

 

그 이유가 여기저기 떠도는 노래 같은 거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짝은 입을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 사실 전문 -

 

 

짝이었던 친구의 죽음 소재로 한 시로 보인다. 시인은 한양대학교 후문이 보이는 여고를 다녔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 시에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짝 이라는 구절이 있으니까. 라임과 리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시는 사실 이라는 단어의 반복으로 시의 외적 질서 rhyme 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실은”   사실을”  사실대로” 등의 말이 각 행의 맨 앞이나 뒤에 찍혀 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고, 이것이 내적 논리 reason 의 발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반복되면서 사실이라는 중립적인 어휘가 덜컹거리는데,  이렇게 어떤 단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원래는 죽어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살아난다. 친구의 죽음 자체는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아이가 지금도 친지들의 심장 속을 다녀간다는 것은 감정적 사실이며, 또 이 죽음과 관련된 나의 사실이 있고, 이 모든 다 담아내지 못하는 친구의 내적 사실도 있다. 이런 변주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사실이란 도대체 몇 겹인가 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제 이성의 일이다. 이 시는 이례적인 사례가 아니다. 진은영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라임과 리즌의 절묘한 교직물이다.

 

 

동시대의 많은 시들이 라임을 포기하고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권태이고, 그곳에서 발견되는 대단한 것은 뭔가 대단한 것을 쓰고 있다는 자의식뿐일 때가 많다. 적어도 진은영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

 

 

시집 제목을 품고 있는 첫 시 청혼을 그는 2014년 가을에 발표했고, 문예지에 발표되고 시집으로 출간되지 않은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이게도 지난 8년 동안 웹에서 널리 건네지며 읽혔다. 그 시가 이제야 시집에 묶인다. 이 짧은 시 안에는 얼마나 긴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청혼 전문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는 애매하다. 오래된 거리처럼의 속성인지(오래된 거리 같은 너를 사랑해), 너를 향한 의 사랑의 속성인지(너를 오래된 거리를 사랑하듯 사랑해)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문맹상 후자일 듯하다. 유년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만큼 오래된 관계인 두 사람이라는 것일까. 그렇게 시간의 깊이를 소중히 여기는 이의 청혼이 더 아름답다는 것일까. 이럴 때의 청혼은 결혼으로 가기 위한 단계적 의례라기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불가결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이벤트에 가까울 것이다. 그 청혼을 위한 어느 날, 긴 시간의 깊이가 무색하게도, 화자는 조금 흥분해 있다. 별들이 벌들처럼 웅성거리고(시각의 청각화), 반대로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청각의 시각화). 눈이 시끄럽고 귀가 눈부시다는 걸까. 어서 청혼하라고, 온 세상이 독촉이라도 하는 듯이.

 

 

여름이 오면 비를 주겠다는 말은 당신의 미래에 필요한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래에 아첨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말 그래도 미래의 환심을 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이니까, 둘의 미래가 장밋빛일 수만은 없을 가능성을 감수하겠다는 각오일 것이다.

 

 

화자에게는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 즉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던 모양인데, 그만큼 당신은 나를 기다려야 했고 청혼도 이렇게 늦춰졌으리라. 애초 너를 위해 써야 했으나 방황 때문에 그러지 못한 시간이기에 돌려준다 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 구절에는 약간의 회한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처럼 현재의 사랑은 과거를 보상하고 보상받고 싶게 한다.

미래를 함께 준비하면서 그 앞에 당당해지겠다는 결심,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살려 둘의 과거를 구원하자는 제안, 바로 그런 것이 청혼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청혼, 그러니까 한 사람 곁에 머물겠다고 결심하는 일의 가장 소중하고 어려운 핵심은 무엇인가.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마시는 것. 이 쓴잔의 비유는 물론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니까,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그 일을 했다면 나는 단 한 사람을 위해 그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쓴잔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보라. 그것은 슬픔이다. 너의 슬픔, 투명 유리 조각 같은 슬픔. 마시면 내 속이 다 긁히게 될 그것을, 너를 위해 마시는 일. 그러고 나면 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 될 것이고, 그것은 아주 결정적인 일이 된다. 왜냐하면 슬픔 사람은 그 슬픔 때문에 외로워진 사람이기도 한데( 내 슬픔을 누가 알까? ), 슬픔을 나눠 마시는 일은 슬픔 자체를 없애지는 못할지언정 너의 외로움은 박탈하게 될 것이므로.

 

어쩐지 이 시의 청혼이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시인이 1부의 입구에 얹은 제사 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가 존 버거 John Berger 의 소설 A가 X에게’ 의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저항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남자 사바에르(X)가 있고, 그의 연인이자 자신 또한 감옥 밖에서 대의를 위해 투쟁 중인 여자 아이다(A)가 있다. 둘은 법적 관계가 아니어서 면회가 어렵다. 어느 날의 편지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제안한다. 방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어요. 우리 결혼하는 게 어때요? 당신이 청혼하고, 내가 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소설에서 이 결혼은 허락받지 못하지만, 청혼의 상상만으로도 이들은 조금 더 살아낼 힘을 얻었으리라. 진은영의 청혼 이 어쩌면 아이다의 제안을 받은 사비에르가 그 편지지의 뒷면에 시로 쓴 청혼 일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보는 일은 시인이나 소설가 둘 중 하나에 대한 결례가 아니라 두 작품 모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도둑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부분 -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청혼의 핵심이 과거/미래에 대한 약속과 다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소설 속 아이다가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장면과 어울리는데, 물론 이는 사랑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그러니까 연인들의 현재가 자주 (그들이 함께하지 못한 시간대인) 과거와 미래로 뻗어나가 그 시간대조차 물들이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유사성일 것이다.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라는 제목의 저 시에서도 당신의 고향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다. 이 시의 울림은 당신 고향집 풍경의 디테일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쩐지 화자는 당신의 고향집에 당신 없이 와 있는 것만 같고, 그가 당신의 유년 시절을 마치 손으로 어루만지듯 차근차근 짚어나가는 것은 지금 내가 당신을 만질 수 없어서인 것 같고, 이 고향에는 슬픈 역사가 있어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강인함을 만든 것만 같아서다. 마치 사비에르의 고향에 와 있는 아이다처럼, 이라고 적어도 좋다면 그러고 싶다. 단 세상의 모든 사비에르와 아이다를 동시에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그 모든 사랑의 전문가 들을 위한 시가 있다.

 

 

사랑과 치유도 하나

 

세월호 참사 이후 진은영은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 을 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을 만나러 갔고, 그들이 나눈 대화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정혜신을 만나 진은영이 도달한 결론 중 하나는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란 아둔한 정도로 희생적이고 선량한 마음 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치밀하게 헤아리는 기민한 정신의 결과물 이라는 것이다. 진은형은 정혜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녀는 사랑의 과학자다.” 되돌아가보면,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세계의 불의와 싸우는 A가 X에게 의 두 인물을 가리켜 소설의 역자는 사랑과 저항이 하나로 묶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해주었었다. 사랑도 하고 저항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곧 저항이고 저항이 곧 사랑이라는 것. 정혜신과 진은영의 대화를 읽으면 사랑과 치유가 하나로 묶인 두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2014년의 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은 4월 16일 침몰 당시 세월호에 탑승해 있었고 집을 떠날 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집의 2부가 예은과 그의 가족에게 바쳐졌다. 2014년 10월 15일, 예은의 열일곱번째 생일을 앞두고 시인 진은영은 예은의 목소리로 발화해야 하는 시, 소위 생일시를 청탁받는다. 타인을 대신해 그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 어떤 시인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지만 어떤 시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소설가가 소설은 이야기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기운 없고 유감스러운 어조로 drooping regretful voice그렇다 고 말해야 한다던가. 사람들은 흥미지진진한 이야기에만 관심을 두지만, 진정한 소설가는 이야기는 미끼에 불과할 뿐 예술성은 소설의 다른 요소에 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시는 복화술인가? 라는 질문은 어떨까. 일단은 옳다고 해야 하리라.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모든 생명과 사물을 대변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때의 어조는 불안하게 떨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니까. 목소리를 빌려주겠다고 한 일이 오히려 목소리를 강탈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시인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그런 시 쓰기는 고인을 이용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고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생일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인들에게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시를, 바로 유가족이 원했으므로. 나는 잘 있어요 라는 아이의 말을 그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듣고 싶어 했으므로. 이 경우는 시인이 아이를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유가족의 수단이 되는 일인 것이다.

 

남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가혹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가족들에게는 시인이 그런 일을 하도록 승인할 권리가 있는가? 원칙적으로는 없다. 그 권리는 예은 본인에게만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이 승인이 사실은 예은 본인의 것이라면? 이 결정을 승인한 누군가의 내부에 예은이 존재한다면 그 승인은 곧 예은의 것이 된다는 말이다. 예은 본인을 제외한다면 예은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곳은 부모의 내부일 것이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눌 수 없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 어떻게 여러 곳에 분산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상상할 수 있다.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일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또 소통하면서 그를 자기 안에 들인다. 이 일이 쌍방향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나눠 가지면서 나도 그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된다. 내 말과 행동 속에 그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의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나를 통해 그가 하는 말이고, 이제 그는 나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는다면, 예은이 없는 이곳에서, 예은 대신 그의 권한을 행사하거나 그의 목소리를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제 안에 예은을 가진 사람뿐이다. 누구도 필요한 시간을 생략하고 타인을 내부에 가질 수는 없다. 영매처럼 빙의되어 단숨에 시를 쓰는 이도 있겠으나 짐작하건대 진은영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이들에게 분산돼 존재하는 예은을 그 일부라도 자기 안에 들여놓기 위해 그의 흔적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만큼 늘어날 예은을 끈질기게 기다렸으리라. 비로소 내 안의 예은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그러고 나서 진은영은 그날 이후 라는 시를 썼다. 눈물이 나는 이런 시를 앞에 두고 분석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시 쓰기는 아주 조심스럽고 어려운 사랑의 작업인데, 앞서 말했듯 사랑은 과학이니까, 이런 시야말로 빈틈없이 정교하게 쓰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시는 꼭 있어야 할 내용 요소들이 적절한 순서로 결합하여 완성된 결과물이다. 제일 먼저 (그리고 부모보다 먼저) 아이의 미안해 가 나와야 하는 것은 아이가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있음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난 잘 있어 가 나와서 부모의 자책을 막아내야 한다. 세번째로는 살아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적혀야 한다. 살아야 할 이유를 마련해주고, 살아내달라고 당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는 고맙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바로 이 대목에서만큼은 아이의 목소리와 시인의 목소리가 협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왜 고맙다는 것인가, 그 이유 속에 시인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말이 담겨 있다.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 그날 이후 부분 -

 

 

2014년의 유가족들은 스스로 희망을 만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무엇보다 먼저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부르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걷고, 굶고, 외치고, 싸웠다. 그들의 곁에서 시인은 예은과 함께 생각한다. 이것은 예은의 부모가 지금 이곳에 없는 예은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예은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 시는 사랑과 치유는 하나 임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의 산물이지만, 보다시피 시인은 여기에 사랑과 저항은 하나 라는 자신의 또 다른 믿음도 포개어 놓았다. 진실이 없다면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인은 너무도 잘 안다. 이 가족을 위해 쓰인 시는 두 편 더 있고, 둘 모두에 진실 이라는 시어가 있다.

 

 

아이가 분노와 고통을 느끼게 될 세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이유가 비밀일까, 그런 세상을 지금 살아 있는 우리가 만들었고 아직 충분히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밀일까.

 

 

그리고 사랑과 예술도 하나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하고 있을 뿐, 어떤 시도 직접적으로 크게 말하고 있진 않다. 시를 쓸 때만큼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발언해야 한다는 지난 세기 초 모더니스트의 직업윤리를 배운 것처럼 진은영은 쓴다. ‘시란 감정의 방출이나 자기personality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의 도피여야 한다T. S. 엘리엇의 주장은 유명하지만, 어쩌면 그가 덧붙인 다음 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감정과 자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그것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 것이다.” 진정한 도피는 그 자신을 들킨다. 진은영의 정련된 이미지들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유와 감정이 들끓고 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사유와 감정이 하나의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 이 “연애를 하거나 스피노자를 읽으면” 그 둘은 별개의 일이 되지만,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처럼 “지적인 시인 intellectual poet” 은 “사상을 장미 향기처럼 직접 느낀다” 라고 한 것도 엘리엇이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지적인 시인으로 우리가 진은영을 떠올리는 것은 이제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진은영이 높은 수준에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은 스피노자와 연애 만이 아니다. 그는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이토록 아름다워지는 데 성공한다. 이것을 분쟁과 아름다움의 통합이라고 해야 할까. 브레히트는 어디선가 ‘아름다움이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행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은 분쟁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돌파일까, 아니면 해결됐다고 믿게 하는 유혹일까. 브레히트의 말이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인지 냉소인지 오랫동안 헷갈렸는데 정혜신의 다음 말은 그 답을 비스듬하게 알려준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치유적 자극 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 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 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것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