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기형도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

HUSH 感나무 2024. 8. 3. 23:23

 

 

 

 

 

 

기형도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 >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이상 기억도 못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 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진눈깨비

 

때마친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갓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 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전문가

 

이사 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조치원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어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 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 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시인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84년에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 안개 > 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 안에서 죽었다.

그의 가장 좋은 선배 중의 하나였던 김훈은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 극장 -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말한 뒤에

그의 넔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효가 사복의 어머니를 위해

부른 게송의 어조로, 침통하게 당부하고 있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 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김훈의 어조를 가슴에 담고,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그는 젊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김훈처럼 모질지가 못해, 두루뭉술하게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의 시 하나를 빌려, 그의 넋을 달래려 한다.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  문학평론가  김 현  -

 

 

 


 

 

詩作 메모 1988. 11. 기형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김현 문학평론가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P.110)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일단 기사는, 제망매가’ 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게 내 첫 반응이었따. 나는 그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공적이었지만, 나는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좋은 그의 내부에 공격적인 허무감, 허무적 공격성이 숨겨져 있음을그의 시를 통해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삼들이 다 사라져 엇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억해줄 방도를 찾는다. 제일 쉬운 방도는, 그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놓는 것일 것이다. … 그러나 기형도에게는 아이들이 없다. 그는 혼자 죽었다.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그가 완전한 사라짐 속에 잠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역사적 소추에서 자유스러울 것이고, 그는 우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모든 글들을, 카프카가 바란 것처럼,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의 글뿐만 아니라, 그 글들이 실린 모든 지면을 없애야 한다. 그것은 바랄 수는 있으나, 이룰 수는 없는 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살리는 것이 낫다. 그의 시들을 접근이 쉬운 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의 시들을 모아, 그의 시들의 방향으로 불을 지핀다. 향이 타는 냄새가 난다. 죽은 자를 진혼하는 향내 속에서 새로운 그의 육체가 나타난다. 나는 샤먼이다 …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갖고 있으려 하는 한 사람의 문학비평가이다.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 내적 상처를 반성 ·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러나, 자기의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기형도의 표현을 빌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를 벗지 못한다. 그것은 보기에 흉하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 유년/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는 가난이며, 젊은 날의 그의 상처는 이별이다. 위험한 가계 · 1969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는, 그의 내적 · 개인적 상처를 서정적으로, 다시 말해 증오의 감정 없는 추억의 어조로 되살리고 있다. 그 시에 의하면 열 살 때 아버지가 풍병(중풍?)으로 쓰러진다. 아마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듯,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별다른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우고, 큰누이는 공장엘 다닌다. 생활은 어려워, 작은누이는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 에다 스웨터를 걸치고, 그는 다 떨어진 잠바를 걸치고 지낸다. 그들이 먹은 것은 주로 칼국수인 듯,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등을 보면, 칼국수는 그의 감각에 깊숙이 인각되어 있다. 그 굶주림의 시각에서 봐야, 하늘의 별이 튀밥 같이 보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풍경의 공간 속에서 본 아버지는 언제나 가난한 아버지 이며, 그래서 불쌍한 아버지 이고, 어머니는 위태로운 모습이다(한 시편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니 절규한다: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 를. 바람은 풍병의 그 바람이며, 수염투성이는 아버지의 모습이며, 콩나물의 뿌리이다. 유리막대는 콩나물대에서 연상된 이미지이다. 아니다, 그토록 단순하지는 않다. 수염투성이의 바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 피투성이의? 어려운 삶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 가난의 공간에서 그가 체험한 최초의 상처 :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반장이고, 월말고사에서 성적이 좋아 상장을 받았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그것을 자랑할 사람이 없다. 누이는 공장에서 일하고, 아버지는 누워 있고, 어머니는 콩나물(/무)을 팔러 갓다. 그도 신문 배달을 할까 한다. 그는 가정방문을 하겠다는 선생님에게 집에 안 오시면 좋겠다고 말하고, 풀밭에 꽂혀 (마치, 꽃병 속에 꽂히듯!) 잠을 잔 뒤, 돌아오면서 상장으로 종이배를 만들어 개천에 띄운다.(이 체험은 뒤에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라는 수일한 이미지를 낳는다). 그 체험 이후에, 그는 바람 소리만 들으면 무서워하는 … 그런 정황에 빠진다. 그것이 병일까? 병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담담하게, 과장하거나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으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정말 무서운 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다. 가난한 아버지와 위태로운 어머니가 무서운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무서운 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라고 말한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울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이 들면, 더 크게 울게 될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옳았다. 그는 그의 울음으로 시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울음을 더 크게 울기 위해 그는 그가 내부의 유배지 라고 부른 곳으로 유배간다. 그것은 독일인들이 내적 망명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며, 최인훈이 내부로의 망명이라고 부른 것과 거의 같다. 내적 유배지에서 그가 한 것은 책읽기이다. 그것은 그의 짧은 일생 내내 지속된 행위이다: … 돌층계 위에서 /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그가 읽은 책들은 광범위하고 깊이 있다. 시에 한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시는, 벤, 릴케, 샤르, 첼란, 정현종, 황동규, 오규원, 고은 등의 흔적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그의 어머니가 바란대로,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운 다. 그 울음의 흔적 중의 하나가 엄마 걱정 이다. 무를 팔러 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 어조는 서정적이다. 그 공간이 옛날 이야기의 공간과 닮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여하튼, 그 시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위태로운 어머니를 따뜻하게 회상하는 시인의 눈길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그의 가난의 공간은, 그러니까 가난한 아버지, 그의 치유될 길 없는 병, 위태로운 어머니, 그녀의 삶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부모들과 서로들에게서 소외된,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배고픔(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음식의 이미지들!)으로 채워져 있으며, 당시의 그는 그것을 무서움 ·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나, 커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그 공간을 무서움으로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 공간은 부정적 성격을 잃고 있지만, 그 부정성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빈방, 혼자 있음, 외로움 등은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유년/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가 가난이라면, 청년 시절의 - 청년 시절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세상을 건너가 버린 그에게 청년 시절이란 말을 쓰는 사람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 그의 상처는 못 이룬 사랑이다. 쥐불놀이 란 시에서,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대보름의 달이여

올해에는 정말 멋진 연애를 해야겠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한 그는 - 사랑을 목발질한다? 사랑이라는 목발을 짚고 세상을 산다라는 뜻일까? 아니면 서툴게 사랑을 했다는 뜻일까? - 곧,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라고 말한다. 위의 시행을 끝행으로 갖고 있는 시를 꼼꼼히 읽어보면, 어느 겨울날, 너무나 가까운 사이라고 믿고, 여러 사람이 같이 어울린 술집에서 여자에게 실수를 하여, 그의 사랑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잘못이었지만 /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 나 그 술집 잊으려네 /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 그녀와 헤어진 기억이 너무나 아파, 그는 그 기억이 오면 있는 힘 다해 도망치려 한다. 그래서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 고, 어떤 조롱도 (그의)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 한다. 그토록 좁은 술집에서 그는 그토록 큰 그의 사랑을 잃는다. 그는 그 빈 좁은 방에 갇혀, 벗어둔 외투 곁에서 (…) 흐느 낀다. 그 체험은, 그러나, 이상한 가역성에 의해, 사랑을 빈방에 가두는 행위로 바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말한 그는,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라고, 그녀를 향한 열망의 소유권 주장을 포기한 뒤, 장님처럼 (…) 더듬거리며 문을 잠 근다. 그 방에 갇힌 것은,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아니라, 가엾은 내 사랑 이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토록 좁은 곳에 갇혀 있던 그는 사랑에 대한 시를 씀으로써, 마치 그가 가난의 공간을 추억 속에 가둬놓듯, 그가 갇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사랑을 가둬놓는다. 그가 갇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사랑을 가둬놓는다. 그 사랑은 이제 그의 눈물을 자아내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되돌아보는 사랑이다. 그는 이미 그 빈집에서 나와 있다. 아니 그가 나오니까, 그 집은 빈집이 된 것이다. 그 빈집 속에 갇힌 것은, 짧은 밤, 창밖을 떠돈 겨울 안개,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 내 것이 아닌 열망 등이다.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빈집에서 살 수 있다. 누가 살아도, 그 집은 그가 들어가지 않는 한, 빈집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기형도의 힘은 그가 가난과 이별의 체험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런 체험을 한 것은 그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시인들도 그와 같은 체험을 했고, 하고 있다), 그 체험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미학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그 의미 있는 미학에 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시를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보기 힘든 괴이한, 부정적 이미지들을 지칭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가령, 기형도의 시에 나오는,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라는, 하늘을 두꺼운 종잇장으로, 태양을 노랗고 딱딱한 것으로 비유하는 이미지나,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라는, 서로 엉키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비연대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나,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라는, 만화영화의 이미지 같은, 그러나 개별자들의 고립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이미지들이, 비일상적이고, 괴이하고, 때로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이, 가령,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라든가,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따위의 시행들에서 볼 수 있듯이, 딱딱함이라는 의미소 주변으로 모인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런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 뒤에, 아니 밑에,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자신 속에서 암종처럼 자라나는 죽음을 바라다보는 개별자,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 -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우선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가난과 이별은 그 망가진 꿈의 완강한 배경 그림이다. 보라, 발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 망가진 꿈, 꿈의 환멸은 삶을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 방점과도 같은 것으로 느끼게 한다.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 책읽기와 잘못 강조된 삶(/꿈)의 교묘한 삼투. 그래서 시인은 자기가 이미 늙었다고 느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과연 그렇다. 그는 열심히 살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눈깨비처럼 나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집요하게 시달린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이 도저한 자기 인식은, 젊어서 이미 지나치게 늙어버린 희귀하게 예민한 사람의 자기 인식이다. 그가 말한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그러니, 나를 찾지 말라.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쓴다. 글쓰기에 대한 이 미친 듯한 정열. 그것이 우울한 정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쓴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이미 늙은 시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된다. 죽음만이 망가져 있지 않은 시인의 유일한 꿈이다. 자기 속에 갇혀 죽음만을 바라다보는 늙은이의 눈에 비치는 나는 누구일까? 나느 ㄴ남과 같은 익명인인가, 아니면 독특한 개별자일까. 그가 바라는 것은 물론 독특한 개별자이다: (나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그에게 그만한 권리는 있다. 그러나 그가 파악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라고 말할 때나,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라고 말할 때에도, 그 다름, 그 혼자임은 갇혀 있는 개별자라는 같음의 다른 모습임을 어렵사리 깨닫게 된다. 나는 위대한 혼자가 아니라, 우리는 위대한 혼자이다. 그 혼자 있는 개별자의

 

 

(……)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

 

 

그 개별자는 읽을 수 없는 책과도 같다(시인의 의식은 끊임없이 책으로 되돌아온다. 그에게는 세계도 사람도 모두가 책이다. 그는 빈방에 누워 훌쩍이며 책 속으로 유배간다. 그 책 속에 뭐가 있단 말인가. 헛된 희망과 죽음뿐 아니가! 아, 그가 본 책들은 너무 비극적이고 부정적이다). 마지막으로, 죽음만을 마주하고 있는 늙은이에게 흥미있는 것은 - 흥미? 흥미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관계있는 것은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 , 저 홀로 없어진 구름 과 같은 우연한 것(필연적이지 않은 것), 진눈깨비 와 같은 순간적인 것(영원하지 않은 것), 바람 과 같은 갑작스러운 것(준비 - 예비할 수 없는 것),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과 같은 표류하는 것(고정되지 않은 것), 그리고 쓸데없는 것 (쓸모없는 것) 등이다. 사람은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을 부수적인 것으로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늙은(허물어진) 육체를 바라다보며 울부짖는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움직여봐도, 자신이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움직여본들 무엇할 것인가. 그가 할 일은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뿐이다. 나는 홀로 없어지는 구름같이 우연한 존재이다라는 것이 기형도의 리얼리즘이 전달하는 구극적인 전언이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사람에겐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은 없는가? 놀랍게도, 열심히 혼자 살다 간 젊은 시인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그 도저한 세계관이 나를 전율케 한다. 세계는 쓰레기통 같은 것이고, 사람은, 베케트의 표현을 빌면, 줄만 잡아당기면 쓸려나갈 수세식 변기 위의 똥덩어리 같은 것일 따름인가? 무엇이 한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게 한 것일까?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육체, 그리움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망, 구부러진 핀 같은 가족들, 눈물마저 말라버린 눈, 헛것을 살았다는 아픈(쓰디쓴) 자각 등이 바람병 든 아버지와 결부된 뛰어난 시가 물 속의 사막 이다. 나는 그 시를 그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한 예로, 가장 적절한 한 전형으로 적어두고 싶다. 내가 적어두고 싶었던 것은 죽은 구름 이었지만, 거기에는 그의 개인적 상처의 흔적들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있다, 아니 감춰져 있다.

 

 

밤 세 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맛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개는

그해 장마 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맛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이미지만을 뒤따라가자면, 밝은 빌딩의 유리창을 치는 빗줄기는 어릴 적에 본 옥수수잎과 결부되고,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지지만(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는 그 이미지들이 교란되는 순간의 묘사이다. 우수수는 옥수수 때문에 따라나오고, 빗줄기와 아버지는 정상으로 회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나는 헛것을 살았다 / 나는 살아서 헛것이었다 는 교묘한 대립과 물들은 집을 버렸다 의, 집을 버리고 되는대로 쏟아지는, 그래서 다 없어져버린 물/집의 대립이 더 중요하다. 시인은 집이 없는, 방황하는 시대의 지친 넋이며, 그 원형은 그의 아버지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아니 살다 보니 나는 헛것이었다, 그런데 그 나는 바로 아버지였다! 그 인식 이후에, 나에겐 눈물도 없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 - 개인적인 것 - 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꿈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꿈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라는 쓰디쓴 회상의 상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 - 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 - 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 없는 미래(보라,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라고 말한다),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아름 - 아는 대상답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기형도의 시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은, 그의 현실에 역사가 없으며,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전망이 엇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그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가깝다. 그 비판은 기형도 시가 연 시의 새 지평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그의 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시를 비판하고 있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몸이 약해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비판이다. 그의 시의 약점을 지적하려면, 우선 그의 시의 차원 안에 있어야 한다. 나는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 전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성복이 그렇고, 황지우가 그렇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에는 그런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 도저한 부정성은 벤이나 첼란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부정성이다(한국 시에서 그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이 누구일까? 이상? 이상에게는 그러나 치열성이 부족하다). 기형도의 부정성은,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두 개의 출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그 부정성을 더욱 밀고 나가, 유한한 육체의 추함을 더 과격하게 보여주는 길이며, 또 하나는 그 부정성을 긍정적 부정성으로 환치시켜, 혹은 발전시켜 해학 · 풍자 · 골계(/익살)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첫번째 길은 개별자의 갇혀 있음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줄 것이며, 두번째의 길은 미래 전망의 결여를 운명적인 것으로 인식시킨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며, 문화적인 것이라는 것을 뒤집어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길은 비용이나 보들레르 등이 걸어간 길이며, 두번째 길은 라블레나 김지하가 걸어간 길이다. 기형도는 그 두 길의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갈림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갈림길은 이제 다시 없어졌다, 이미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 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 길은 생각만 해도 내 얼굴이 이그러진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증오한다라는 끔찍한 소리를 다시는 누구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고 해도.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병,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 안에서 죽었따. 그의 가장 좋은 선배 중의 하나였던 김훈은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 극장 -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과연 그가 선택한 것일까. 차라리 운명이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인용자)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라고 말한 뒤에, 그의 넋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효가 사복의 어머니를 위해 부른 게송의 어조로, 침통하게 당부하고 있다: 가거라, 그리고 당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김훈의 어조를 가슴에 담고,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그는 젊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김훈처럼 모질지가 못해, 두루뭉술하게,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의 시 하나를 빌려, 그의 넋을 달래려 한다.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김병옥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