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치렁치렁
과거를 치렁치렁 울리면서
한 여자가 지나간다
과거만으로 살아 있는 여자
기억과 추억의 형성물인 여자
교묘한 밧줄들과 같은
온갖 차이와 구분의 족쇄를 차고
한 여자가 지나간다
그 뒤로 안개의 스크린이 내려진다
세기여 세기여,
안개의 스크린이 내려진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
지식과 지식이 싸울 때
自然 소외는 한없이 깊어지고
역사는 흙탕물이 되어 흘러간다
죽으면 땅의 지식은 필요가 없고
하늘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 잘난 지식들을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 웃더라
저기 지식을 구걸하는
한 무리의 동냥아치들이 지나간다
최승자는1952년 충남 연기,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떨어져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시인은 이런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내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아늑하고 따뜻하게,
푸르르게 살아 있을 장소와 시간이 있다면,
바로 내가 태어났던 그 마을,
그리고 거기서 살았던 시간들일 것이다.”
최승자 시인은 장용학과 최인훈,
비트 제너레이션을 주도한 미국 작가 잭 케루악을 좋아했다.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고
고대 문학회에 가입한 최승자 시인은
수업을 자주 빼먹고 문학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교지 <고대문화> 편집장을 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문학도였다.
그녀는 군대 복역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학생들보다 학번이 빨랐고 졸업은 멀었던,
유치할 정도로 순진하고 아름다운 꿈을 지닌
냉소적이고도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스물네살의 최승자는 술 아니면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 수 있는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갑작스런 학칙 변경으로 제적을 당하게 되고
1977년 스물여섯살의 그녀는 출판사 홍성사에서
번역을 밥벌이로 삼기 시작했다.
1983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에 대하여 시인은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주고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었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 준 계기” 라고 말했다.
최승자라는 이름 대신 ‘최명’ 이라는 가명으로
시를 발표한 적도 있었는데
최승자 또는 최승자의 시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최승자표’ 시와 글을 기대했던 지면에게
용납되지 않았기에 다시 최승자로 시를 쓰게 된다.
이를 두고 시인은 ‘최승자에게 졌다’ 라고 표현했다.
해설 -
우리 시대의 유일무이한 리얼리스트
김소연 시인
시인 최승자는 잘 알려져 있다. 이성복, 황지우와 더불어 시의 해체를 도모한 삼인방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 누구보다 독하고 끔찍한 시를 온몸으로 썼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정신분열증” 으로 인해 병원에서 지낸 세월이 태반이었던, 아슬아슬한 우리 시대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행한 시인의 대명사처럼 최승자를 인용했고, 문학에서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를 여전사처럼 앞세웠고, 새로운 여성 시인에게서 독한 목소를 발견할 때마다 ‘최승자’ 라는 어머니의 뒷줄에 세우고 최승자처럼 쓴다 며 계보를 매겼다.
최승자가 쓴 시도 잘 알려져 있다. ‘아픈’ 최승자의 ‘독한’ 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미 죽어 있다’ 고 말했던 최승자의 독한 탄식에 충격을 받았고 감동을 받았다. 그의 독한 어법은 사랑받았고 예찬받았다. 모든 예찬 속에서 진정한 승자처럼 보이는 최승자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널리 알려진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최승자의 시는 실제로 읽히는 일보다 풍문으로 퍼져가는 일을 더 많이 겪었따. 실제로 읽힐 때에도 읽혀왔던 방식으로만 읽힐 뿐, 새롭게 읽히는 적은 드물었다. 그간 최승자에게 바쳐졌던 찬사들과 걱정들은, 그가 이 세계에 일체의 편승도 하지 않았다는 염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염결함을 알아보는 이는 많았어도, 그 염결함을 잘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최승자의 시세계에 전적인 탑승을 하지 않음(못함)으로써, 이 세계에 편승하고 있었던 우리의 염결하지 못함을 되려 염결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했던 그대여 나는
김치수와 김현을 비롯한 많은 비평가들은 최승자 시의 키워드를 ‘사랑’ 이라고 파악했다. “미흡한 사랑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존재의 쓸쓸함>” 이며, “이별의 아픔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불가능을 겪은 경험” 이며, “운명론적 불행” 이라고 해석했다.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부분
나는 육십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
- 나는 육십 년간, 부분
시인은 “나의 사랑” 을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 “한 사발” 이라고 표현을 했었다. 치욕과 눈물과 회한과 욕설과 야유가 뒤섞인 “치정” 이야말로 사랑의 진짜 모습이 아니겠느냐며, 그 사랑의 진짜 모습이 연명 가능한 것인지 안부를 묻는 듯했다. 이번 시집에서는 “잡탕 찌개백반” 이 “사랑 찌개백반” 으로 변주되어 다시 사용된다. 예전에 시인은 나의 ‘사랑’ 을 “잡탕 찌개백반” 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이번에는 사랑까지 그 찌개 속에 포함시켜 “사랑 찌개백반” 이라 하였다. 그 “찌개” 를 이제는 “삶” 이자 곧 세계 라고 표현하고 있다.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 보며 살아왔다며,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고 말한다. 시인이 조우하고자 하는 것이 “그대” 혹은 “그대 문간” 에서 “삶” 과 “세계” 로 변화했다. 이미 죽음 너머로 간 듯한 발화가 더 빈번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리고 불현듯, 그것이 사랑이든 삶이든 세계든, “보고 싶다” 고 말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 얼마나 오랫동안, 부분
무엇이 보고 싶은지, 누가 보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현재 시인의 곁에는 하늘과 해와 달과 별과 구름과 비와 바람, 그리고 허공, 새 한 마리, 기다리고 있지만 찾아오지 않는 죽음,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제물론, “늙으신 처녀처럼 / 웃고 있는 코스모스들”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정신과 병동” 의, 극단적으로 표백된 삶 속에서 시인이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야유를 퍼붓던 “사랑 찌개백반인 삶” 과 “세계” 를 시인은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시인은 이전까지의 모든 시편들에서 “보고 싶다” 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 시인, 부분
자학이자 자학의 관음이자 자학의 유희라고 해석할 만한 이 괴이한 장면에서, 시인은 자기자신을 보고 싶다고 표현했었다. 시인이 이렇게 누워 있는 까닭을, “거미” 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심장” 을 그 누구도 방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좌절로 읽어야 할까. 이 구절 다음에 다음 시를 옮겨놓고 나란히 읽어보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 문명, 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자가 나란히 눕는 일. 이것은 사랑의 진짜 장면이 아닌가. 낭만주의적 꿈도 아니고, 위악이거나 자학도 아니고, 에로스니 필리아니 아가페니 등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사랑하는 연인들만의 비밀한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한 남자가 마지막 실패를 하고서 누워 있을 때, 필사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한사코 실패를 거듭해온 한 여자가 곁에 가서 눕는 일. 최승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날 버렸지, / 이젠 헤어지자고 / 너는 날 버렸지” 로 시작하여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거야 /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를 거쳐서, “오 개새끼 / 못 잊어”! 로 끝을 맺은 ‘Y를 위하여’ 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죽여버리고 말” 겠다는 말 뒤에 “다시 낳고” 말겠다는 말이 이어지고, “개새끼” 라는 말 뒤에 “못 잊어” 가 이어지는 시인의 도저한 사랑. 낙태수술 장면이 시로 씌어졌다는 충격으로만, 버림받은 여자의 살의로 가득한 악담으로만 읽혀서는 안 되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는 최승자는 어떻게하면 너를 만날수있을까 “어떻게달려야 항구가있는 바다가보일까 어디까지가야 푸른하늘베고누운 바다가있을까” 를 알기 위하여 “나는 기차화통처럼달렸다” 라고 말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기차화통처럼 달리는 까닭에, 끊어 읽어 마땅할 부분에서만 띄어쓰기를 해야 했을 정도로, 숨가빴던 호흡을 헉헉대며 뱉어내던 시인이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 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느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며 일갈했던 시인이었다. 흔들리는 꼬리를 돌아보며, 그 “꽁무니” 뒤에서 나를 조종했던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이렇게 표독하게 일침을 놓았다. 이 시의 제목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다.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아버지를 향한 저항을 훌쩍 넘어서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최승자는 여성이라는 주체가 얼마나 아프게 탄생되어야 했는지를, 사랑의 서사를 통하여 아픈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드러냈던 시인이었다. 아버지를 초월한 여성, 남성의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성으로서 출생신고를 한, 우리 시대의 첫번째 시인이었다. 시인은 악을 쓰며 산고를 치르는 어미였고, 동시에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아기였고, 동시에 아기를 받아 안던 산파였다. 혼자서 그렇게 태어났다.
살았능가 살았능가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 일찌기 나는, 부분
시인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붙들어온 ‘죽음’ . 첫 시집의 첫 시에서부터 시인은 스스로를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였다고 말했다. 이 시의 2연에서 시인은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 고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고 고백을 한다.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위악이 묻어나오는 고백을 해야 했을까. 같은 시 3연에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 너당신그대, 행복 / 너, 당신, 그대, 사랑” 이라고 고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 당신, 그대, 사랑 이라는 “행복” 들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함부로 나를 사랑이나 행복으로 유혹하지 말라는 결벽이었을 것이다.
“이 詩集의 詩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 이라고 밝힌 일곱번째 시집에서 시인 김정환은 다음과 같이 써두었다: “그리하여 오늘 오늘 오늘 / 내가 죽고” (꿈에 꿈에) 그딴 생각 정말 말고 들어다오. “하룻밤 검은 밤” , “죽지 말라고” , “누가 자꾸 내 이름을 불러주” 던 그 목소리를. 그 목소리가 바로 더 미친 바깥 시인들 목소리고 네 목소리다 승자야, 네 이름이 승자 아니더냐.” 김정환의 이 간절한 요청을 들은 척도 안 하는 양, 이번 시집에도 ‘죽음’ 이라는 시어는 즐비하기만 하다.
살았능가 살았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 살았능가 살았능가, 부분
가만히 들여다보면, 김정환의 우정 어린 요구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았는가 죽었는가’ 라고 쓰지 않고, “살았능가 죽었능가” 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발음되는 대로 받아적은 이 문장은 사투리 같기도 하고 신명 나는 노랫가락 같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다. 제목에서는 아예 “죽었능가” 는 제쳐두고 보란 듯이 “살았능가” 를 두 번 반복한다. “살았능가 살았능가” 는 “살았능가 죽었능가” 보다 한결 더 풍자적인 뉘앙스를 띤다. “살았능가” 를 두 번 적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삶 쪽에 치우치려는 의지로 보일 수 있지만, 죽어버린 것을 되살리려는 주술 쪽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 말투를 구사하면서 시인은 어땠을까.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 은 것 같은, “무지근한 잠” 처럼 오래 지속되는 삶. “하늘의 시계” 가 “흘러가지 않” 는 것 같은 정지된 삶에 조금은 활력이 생기는 듯했을까. “천년 전에 죽은 시체” 라고 선언했던 시인은 이 정지된 오래된 삶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이 시집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바람” 의 이미지만이 정지된 것들에 미약하나마 활력을 주는 찰나를 만들고 있다. 시인이 가장 반색하며 애용하는 시어가 겨우 ‘바람’ 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나의 생존 증명서는, 전문
“하릴없이 살아 있” 는 것들이 꽃과 사람뿐이랴. 이번 시집에 따르면, 시간이 가장 하릴없이 살아서 지나가며, 계절도 강물도 그렇게 잘도 지나간다. “이곳에서는 다만 시간이 멍멍하다 / 이곳에서는 다만 시간이 자욱하다” (문명은 이젠). 병든 세계에서 병이 들어 하릴없이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기 쉽지 않은 자가 여전히 시를 써서 생존을 증명하고 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가까스로 새로이 시를 쓴다.
최승자가 이끌었떤 1980년대의 시는 “시적 화자라는 하나의 가면 persona 이 없어져 버렸” 던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공통분모였다. “기존의 시적 관습보다는 자기 진술의 진실성에서 시적 감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민얼굴의 시들은 “진실의 추한 모습” 을 드러낸 용기와 순수에만 가치를 둘 수는 없다. 발설된 추의 세계와 발설하는 자의 용감하고 아름다운 태도, 이 둘의 ‘격차’ 가 주는 충격이 최승자 시의 진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격차에 관해서라면, 이 시집도 여전한 가치를 지닌다. 지독하고 치열했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 표표하고 괴이한 권태가 자리 잡은 것이 다를 뿐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는 거지. 죽음은 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죽어 있으니까.
- 서역 만리, 부분
갖가지 퇴행을 겪으며 골고루 망가져가는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보다 정확한 직시가 또 어디 있었을까 싶다. 1990년대에 발언된 이 문장들을 두고 위악을 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꺼내 읽는 지금은 위악보다는 예감으로 읽히는 게 맞겠다.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 , 노릇노릇한 통닭 같은 우리의 삶을 마치 미리 적어둔 것만 같다. 진술이 아니라 대화체를 구사한 서술어로 짐작해보았을 때, 누군가에게 말해주려 했던 것 같다.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했던 것 같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떤 시인은 그걸 알려주는 자가 됨으로써, 죽었지만 살아 있는 유일한 자로 남겨진 것은 아닐까.
죽은 하루하루가 쌓여간다
미 美 추 醜 도 각기 몽당연필
인류여 코메디여
하늘의 퉁소 소리는
대지의 퉁소 소리와는 다르다
(나만 빙긋이 웃는다 왜냐하면 미쳤으므로)
- 죽은 하루하루가, 부분
시인이 괄호 속에 은닉해둔 위의 시구 “나만 빙긋이 웃는다 왜냐하면 미쳤으므로” 는 이 맥락에서야 더 잘 이해가 된다. 비극보다 더 비참한 비극, 부정할 길 없는 비극을 사는 2016년의 우리들에게, 최승자는 정확한 예감의 시인이었고 리얼리스트였다. 최승자는 탈피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았고, 탈피할 것이 없는 자만이 볼 수 있었던 것을 예감처럼 시로 써두었다.
우리가 천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최승자는 1952년에 충남 연기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와 떨어져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된 금남면에 있는 감성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물 캐고 멱 감으며, 주일학교 어린이 연극의 주인공을 맡는 착한 유신론자로 지냈다. “내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아늑하고 따뜻하게, 푸르르게 살아 있을 장소와 시간이 있따면, 바로 내가 태어났던 그 마을, 그리고 거기서 살았던 시간들일 것이다” 라고 그 시절을 시인은 소회한 적이 있다. 5학년이 다 되어서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낯선 서울에서 시인은 “유년기의 고독 연습” 을 하게 된다. 중학교 작문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기억, 책상 위에 펼쳐둔 낙서를 보고 외삼촌이 ‘너 시 썼구나’ 하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무렵, 조태일의 ‘봄’ 과 김준태의 시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무렵, 여름방학을 외삼촌 집에서 지내던 시절에 물난리가 나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에 우리의 여고생 최승자는 한국문학전집 한 질을 주섬주섬 챙겨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수도여고 3학년 시절에는 ‘문학과지성’ 창간호를 읽게 되었고, 장용학과 최인훈, 비트 제너레이션을 주도한 미국 작가 잭 케루악을 좋아했다.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고대 문학회에 가입한다. 수업으르 자주 빼먹고 문학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교지 ‘고대문화’ 편집장을 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문학도였다.
“그녀는 군대도 가지 않았으면서도 복학생들보다 학번이 빨랐고 그러나 졸업은 멀었” 던, “쓰러져 가는 술집에 앉아 우리들의 강권에 못 이겨 노래를 부르게 되면, 언제나 그 노래라는 것은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뿐이었던” , “유치할 정도로 순진하고 아름다운 꿈을 지닌” , “냉소적” 이고도 “팽팽한 긴장감” 으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1975년, 동고동락하던 문학회 남학생이 간첩 협의로 체포되었을 때, 훗날 시인의 등단작이 될 ‘이 時代의 사랑’ 을 쓰게 된다.(이후에 이 기억을 바탕으로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을 다시 쓰게 된다.) 대학 화장실 벽에서 발견된 용공시 사건의 혐의자로 성북 경찰서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24살의 최승자는 술 아니면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 수 있는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 시절에 썼던 시들이 첫 시집의 3부에 실려 있다. 갑작스런 학칙 변경으로 제적을 당하고, 1977년 26살의 그녀는 출판사 홍성사에 취직을 하여 번역 원고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최승자는 번역을 밥벌이로 삼기 시작한 셈이다. “몇 년간 회사에 다니면서 푹푹 썩” 던 그 시절 1979년에 계간 ‘문학과지성’ 에 투고를 하여 시인이 되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1982년부터 1년 정도 학원사에 몸담기도 한다. 1983년에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에 대하여 시인은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따면 그것은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주고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었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계기라고 말했다. 이듬해 1954년에 두번째 시집 ‘즐거운 日記’ 를 출간했고, 그 이듬해 1985년부터 2년간 ‘건설협회 40년사’ 를 쓰는 일로 밥벌이를 삼는다. 1년 정도 최승자라는 이름 대신에 ‘최명’ 이라는 가명으로 시를 발표한 적도 있었다. 최승자 또는 최승자의 시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최승자 표’ 시와 글을 기대했던 지면으로부터 용납되지 않았기에 다시 최승자로 돌아가게 된다. 이를 두고 시인은 “최승자에게 졌다” 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1989년에 세번째 시집 ‘기억의 집’ 이 출간된다. 시를 쓰지 않으려는 결심과 쓸 수밖에 없었던 갈등이 유난했던 시절들의 시를 모은 것이다. 이후 시인은 질병과 싸우면서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시를 써왔다.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뒤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는 최승자를 배웅하며, 나는 그 가냘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것도 쌓아 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 어깨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 할 어깨가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 황현산 말과 감각의 경제학, 물 위에 씌어진 해설
이 짧은 연대기를 이 시집의 발문란에 다시 적어보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최승자를 좀더 잘 알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최승자의 시원을 되짚어봄으로써 너무 멀리 흘러가버린 듯한 지금의 최승자를 조금 더 우리 곁에 붙잡아두고 싶기 때문이다.
최승자의 이 여덟번째 시집에 실린 ‘작품’ 에서, 우리가 반갑고 놀라운 경험을 또다시 겪게 될 가능성은 희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왔고 또다시 이렇게 살아가야 할 한 시인의 근황으로 도착한 이 ‘시집’ 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기묘한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時代의 사랑’ 에서 여성이 주체로서 탄생하는 고통스러운 장관을 처음 목격했던 것을 되새겨볼 때, 지금 이 시집에서는 아마도 그것보다 더한 고통스러운 장관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 위에 씌어진’ 의 해설에서 황현산은 “독기가 확실하게 제거되” 어 있고, “명사문이 아닌 문장들도 명사문처럼 보” 이는 지금의 최승자의 시작법을 두고서,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구별이 없어진 어떤 체험이 있었다고 오히려 말해야 할 것이다” 라 했다. “그는 마치 이 세계가 멸망한 다음날 아침 그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고 했다. “그는 외딴 섬에 조난당한 사람이 마지막 빵으 조금씩 아껴서 떼어 먹듯이 말한다” 고 했다. “우리에게 돌아온 최승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뼈만 남은 이 가난한 언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 라는 말을 이해하는 일이 된다” 고도 했다. 이 여덟번 째 시집도 같은 맥락에 있다. 파국의 파토스가 문학의 귀결점이라는 사실에 그 많은 시인들이 동의해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파국의 파토스를 끝까지 수행해온 시인을 우리는 목격해본 적이 없다. 최승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 되어 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멀지 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최승자의 곁에서 예감할 수 있다.
최승자의 시세계를 부정의 시학 또는 비극의 시학으로 읽는 것은, 방법적 부정과 방법적 비극으로 읽는 것은, 비천한 시어와 비천한 주체의 카니발로 읽는 것은, 추한 현실을 지독한 직시로 보여주었다고 읽는 것은 대부분 정당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부당하다. 부정과 비극이, 비천함과 추함과 독함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으며 어떤 예감에 의해 추동되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실마리가 제대로 보이는 까닭이다. 최승자만의 혹독한 예감이 리얼리티가 되어 있는 지금, 최승자가 ‘아픈 자’ 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자’ 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최승자가 혹독한 예감에 시달리는 예민하고 건강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누구보다 정확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만장하신 여러분
나를 죽이고 싶어 환장하신 여러분
오늘 내가 죽는 쇼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십년 후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염통을 달고
이 장소로 나와 주십시요.
- 無題2, 부분
위의 시에서 상정한 10년 후는 대략 1994년이었다. 최승자는 “죽는 쇼” 를 그때 끝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나서 가까스로 시를 쓰며 연명해왔을지도 모르겠다. 연명이라는 말에도 최승자에게 가혹한 요청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담긴 것 같아서 고쳐 적어본다. 최승자는 자주 아프지만 자주 회복했고, 회복할 때마다 시집을 출간해왔다. 어쩌면 시집 출간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회복되어갔는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다시 “십년 후 똑같은 시각에 / 똑같은 염통을 달고 / 이 장소로” 우리들이 나간다면, 최승자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가 더 이상 죄 짓기를 거절하고, 최승자처럼 차라리 아프기를 각오한다면 말이다. 최승자는 “우리가 천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 환영에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人도 아니고 間도 아니다” (우리는)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人이 될 수 있고 詩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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