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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 T. 제로니머스(Arline T. Geronimus) 가 말하는 웨더링은 한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그 대가로 몸이 더 빨리 망가진 사람들

차별과 불평등이 만든, 보이지 않는 조용한 병

 

알린 T. 제로니머스의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 먹는가> 이 책은 단지 가난한 사람이 병이 많다는 말을 넘어서, 그 병의 원인이 사회 그 자체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건강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선택이기도 하며 진정한 치유는 병원에 있지 않고,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에 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웨더링(weathering)’이 바위가 깎이고 닳아가는 자연의 작용이라면, 알린 T. 제로니머스가 말하는 웨더링(weathering)지속되는 사회적 스트레스와 차별, 그리고 구조적 불평등이 우리 몸과 마음을 서서히 닳게 만들어, 실제 나이보다 빨리 노화시키는 현상 , 사회의 부당한 압박으로 인해 우리 몸의 세포부터 기관까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그 결과 생물학적 노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자는 웨더링이 발생하는 배경으로 인종, 성별, 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별과 억압 등의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신, 의료의 불평등한 대우, 경제적 불안 등의 만성적 스트레스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생 배경으로 인해 흑인 여성은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높아도 백인 여성보다 조산 위험이 훨씬 높게 되는데 이는 오랜 시간 웨더링된 몸이 출산 같은 큰 생리적 변화에 잘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젊은 나이임에도 고혈압, 당뇨, 심장병 등의 만성질환이 나타나고 뇌와 근육, 신장, 심장기능까지 더 빨리 노화되며 텔로미어(세포 노화 지표)가 짧아지며 노화의 가속을 보여줍니다.

제로니머스 박사는 특히 흑인 여성들, 소수자들, 빈곤층이 겪는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이 현상의 중심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긴장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차별적인 시선, 의료기관에서의 무시 혹은 부적절한 치료, 경찰의 과잉 대응에 대한 두려움, 빈곤·고용 불안·교육 격차 등 구조적 문제 등의 이런 요소들이 끊임없는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유발하고, 그것이 곧 몸을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폭력을 경고하고 있으며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에 진정한 치유와 변화는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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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 T. 제로니머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책 표지

 

 


 

 

부정의한 사회가 가하는 스트레스, ‘웨더링

40년 가까이 공공보건 분야를 연구하며 인종적·계급적 부당함이라는 질문과 평생을 씨름한 끝에, 나는 미국의 인구 집단 간 건강 격차의 원인을 이해하고 이를 해소하는 데 있어서 내가 웨더링 weathering이라고 부르는 것이 핵심 열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웨더링은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차별에 의해 공격당하는 소외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생리학적 작용을 포괄하는 과정이다. 웨더링은 한 인간이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사회에서 자라고 성장하고 노화하는 동안 세포 단위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괴롭힌다.

웨더링은 그 사람이 걸은 걸음 수, 흡연한 담배의 양, 복용한 마약성 진통제의 양, 마신 술의 양, 섭취한 칼로리로는 측정할 수 없다. 학력 수준, 소득 수준이나 은행 잔고를 주된 척도로 삼아 측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서적 절망감과 관련이 있지도 않다.

 

인종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 허구

인종은 그 어떤 유효한 생물학적 범주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개념이다. 인종은 생물학적 허구, 발명품이다. 권력자들이 피부색 또는 종교, 계급, 민족, 젠더, 성적 지향 내지는 성적 정체성에 임의적인 구분선을 긋고는 자신들이 보기에 틀린쪽에 서 있는 일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웨더링을 이해하려면 먼저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지배집단의 문화와 소외집단의 문화간 권력 차이와 심리사회적 역학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다문화 사회에서는 지배집단의 관행, 가치관, 언어, 상식이 그 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지식이 된다. 그것이 보편적인 진실 내지는 실증적 진실인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유효한 지식으로 여겨진다.

인종화는 지배문화와 그 사회의 집단들을 자원·명예·권력을 누릴 자격 내지 권리가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 역으로 경멸·처벌·박탈·낙인·탄압·착취를 받아 마땅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는 강력한 수단이다. 인종화된 집단과 인종 간 차이점이 웨더링의 핵심이다.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흑인이라고 해서 건강이 나빠지기 쉬운 체질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사회가 특정 집단을 본질적으로 무책임하다, 열등하다, 미숙하다, 태생적으로 위험한 작업에 적합하다, 신체 고통에 무감하다, 위협적이다라고 규정하는 인종화가 그 집단의 건강을 손상시킨다. 인종화는 한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피상적인 신체적 특징, 혈통, 민족 기원을 바탕으로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억압당하고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겪는 신체작용

 

많은 학자, 저술가, 활동가들이 구조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야기한 물질적·교육적·법적·정치적·환경적 불의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이 공적 담론에 중요한 퍼즐 조잒, 내가 내 학자 경력을 바친 진실을 추가하고자 한다. 그 진실이란 인종화를 비롯한 문화적 탄압의 양식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예컨대 인종차별주의·계급주의·성차별주의·연령주의·외국인 혐오·동성애 혐오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과 재정지원이 끊긴 환경적으로 유해한 지역으로 사람들의 거주지를 분리시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에 실질적이고 측정 가능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웨더링은 인종적 건강 격차가 왜, 어떻게 경제 계층 구분선을 무시하고 모든 계층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

내가 연구한 웨더링의 구체적인 양상은 명백하게 미국에서 관찰된 것이지만, 생물학적 웨더링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문화적으로 불평등한 다문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도 일어난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웨더링이 모든 억압당하고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겪는 인간의 신체작용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다.

 

 

웨더링을 심화시키는 기후변화

기후변화는 웨더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기후변화 대처는 결국 기술혁신과 정치개혁의 문제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후변화 대처 역량은 웨더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기후변화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최하위 계층이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파괴라는 현실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타들어가는 지구의 열파와 그것에 수반되는 대형 화재는 캘리포니아주 파라다이스의 소박한 주택과 이동식 주택을 파괴하듯, 말리부 해변의 값비싼 대저택도 망설임 없이 파괴한다.

생물 다양성 감소가 야기한 위협과 그것이 우리의 식품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 깨끗한 물 공급 부족, 치명적인 전염병과 질병의 증가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후난민이 새로운 정착지를 구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자원 부족으로 전쟁이 벌어질 미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또한 기후 변화는 일자리, 사회경제적 안정성, 상향 사회 이동의 기회도 위협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것은 권력집단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해결책이든 효과가 있으려면 먼저 구조적인 인종차별주의와 계급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다뤄야 한다.

 

 

우리 모두의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 환경, 국민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 미국의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는 양날의 검이다. 기업화되고 중앙집권화된 화석연료 경제는 여전히 건재하고, 미국 대법원은 오른쪽으로 급격히 선회해 산업을 규제할 수 있는 EPA의 권한을 사실상 무효화하는 한편, 웨더링의 가장 취약한 인구 집단의 필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크게 줄이는 판결들을 내놓았다. 적어도 미국인의 절반은 이런 대법원의 행보에 분노하고 있으며, 더 진보적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세력을 모으면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웨더링을 중단시키고 근절하기 위한 모든 정책과 사회 변화가 고려해야 하는 더 큰 사회적 맥락이다.

웨더링의 사슬을 끊고 건강 형평성을 도모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만 구할 수 있는 생명들이 있다. 우리 모두의 운명은 연결되어 있다.

 

 

미시간대학교 공공보건대학원 교수이자

같은 학교 사회연구소와 인종·문화·건강연구소의 연구교수인 공공보건학자

알린 T. 제로니머스의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