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감나무집 허쉬입니다.
“알면 사랑한다”
평생 자연을 관찰하며 생명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대표 과학자, 한국의 앤트맨으로 더 유명한 개미박사, 생명을 사랑하는 유튜버, 최재천 교수를 아시나요?
최재천 교수는,약 74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에서 인간과 자연 생태계에 대한 폭넓은 주제로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며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가 공생을 의미하는 Symbiosis에서 착안해 만든 용어, 호모심비우스 Homo symbious는 동료 인간들은 물론 다른 생물종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최재천 교수는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보다는 공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공생하는 인간인 ‘호모심비우스’ 를 현재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이자 지향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최재천 교수의 신작도서 <양심>이 2025년 1월 14일 공식 발간됩니다.
최재천 교수의 도서 발간전 이뤄진 양심 강의를 녹취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심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만드는 첫 책의 제목이 ‘양심’ 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 때 본격적으로 그 얘기를 시작했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그 단어가 사라졌다는 걸 저는 관찰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는 정말 매일 듣던 말이에요. 굉장히 자주 쓰던 말입니다.
“양심에 털 났다” “양심 엿 바꿔 먹었냐” 이런 양심이 들어가는 대화가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의 깊게 대화 내지는 언론에 등장하는 그런 말들을 들어봐도 ‘양심’ 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졌더라구요. 왜 이럴까 그런 의구심이 많이 들어서 제가 ‘양심’ 이라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양심’ 이라는 주제의 책을 만들게 됐는데 여러분 요즘 최근에 갑자기 ‘양심’ 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으셨잖아요.
갑자기 그냥 언론에 ‘양심’ 이라는 단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에 몇 분이 ‘최 선생,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맞췄냐’ 라고 합니다.
이게 맞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같은 사람이 예전에는 안 그러다가 양심이라는 얘기를 자꾸 하기 시작하니까 사회 분위기가 지금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하고요.
절묘하게 계엄과 탄핵의 정국으로 우리 사회가 빨려 들어가면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안 쓰던 양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양심은요, 명확한 건 아닙니다.
사람의 양심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양심이라는 건 결과가 또렷하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양심은 내 마음속에 있는거죠. 누가 밖으로 드러내놓고 내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든가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든가 이런 걸 증명해줄 수 있는게 아니라 오로지 내 마음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양심에 기댄다는 게 그렇게 확실한 전략은 아닌 거죠.
아무리 양심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양심적인 사람처럼 얘기했더라도 실제로 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말투나 행동으로 살금살금 보이기도 하지만 그걸 명확하게 가려낼 방법은 별로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양심이라는 걸 이렇게 열심히 얘기할까?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처럼 무서운 게 세상에 더 있을까요?
저는 차라리 드러나는 거면 사기치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아요. 드러나서 보이는거면 까짓것 교묘한 방법을 써서 성공만 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해요? ‘난 살았다, 아무도 모르잖아’ 그런데, 이 양심이 내 마음속에 있는 거다 보니까 다 속인 듯 싶어도 속이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 기어코 남잖아요. 나를 못 속였어요.
그러니까 이게 끊임없이 남아서 나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거죠. 저는 이게 엄청난 양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으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라는 책에 ‘군인의 총부리보다도 더 강한 게 양심이다’ 그렇게 한강 작가님이 쓰셨어요. 그 대목이 참 기가 막히더라구요.
제가 그래도 꼴에(?) 문학청년이었거든요. 찬바람만 불면 신춘 문예의 열병을 앓으면서 살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지금도 앓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한 두어번 또 했습니다.
이 나이에 어떻게 등단을 좀 해볼까 그런데, 결국은 못 하고 말 것 같긴 한데요.
너무 삶이 바쁘다 보니까 제가 시간이 많은 사람이면 아마 매일 같이 온갖 소설책 이런 거 읽고 살 것 같아요.
되게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거든요.
‘양심’ 이라는 책에도 서문을 제법 길게 썼는데요. 그 서문의 한 중간 부분에 이런 얘기를 조금 썼습니다. 스포일러 아니겠죠? (웃음) 글이라는 게 또그렇잖아요. 처음에 시작이 좀 세야 되거든요. 시작 때 세게 좀 흔들어놓으면 읽어야 되겠다 이런 느낌이 오는 거니까. 그 다음 중반부에서는 조금 심각한, 학술적인 그런 얘기를 좀 하고 긑에 가서 이제 또 한 번 빵 때려야 되는 거거든요. 제가 오늘은 중반부만 조금 공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양심이라는 게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숨을 수 있어요. 근데 그 숨는다는게 엄밀하게 한 번 따져보면 결국은 못 숨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으니까 이게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대 축사에서도 그런 얘기를 좀 했고 책에도 아마 그런 얘기들이 쭉 되겠지만 저는 사실은 태생적으로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못 되거든요. 용감하다기보다는 비겁하다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고 살았어요. 특히 제 아내한테는 정말 평생 들었거든요. ‘비겁하다, 남자가 왜 이렇게 비겁하냐’ ‘화끈하게 잘못했다 그러면 같이 털면 되는데 그걸 왜 이렇게 굳세게 숨기냐?’
저는 그걸 잘 못해요. 저는 정말로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컸거든요. 아버지의 발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야 되는 그런 어린 시절을 살았어요. 그러다보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냐면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죽어도 사과하지 않는 심성이 생기는 겁니다. 사과하면 그 사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과가 빌미가 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번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면 ‘너라는 놈 말이야, 지난번에 네 입으로 얘기했잖아.’
차라리 내가 사과를 안 했으면 이렇게까지 심하게 당하지는 않을텐데. 그러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이제 적응하는거죠. 절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절대로 고백하지 않고 차라리 그냥 주어지는 이 형벌을 그대로 참아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제법 굵직굵직한 일에 제가 나섰거든요.
4대강 반대하다가 세무조사에, 별의별것 다 당하고… KBS뉴스에까지 한 번 났다고 그러던데요.
4대강에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주요 인사인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경우에는 출입국 기록까지 들여다봤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호주제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얘기하러 다니다가 돌고래도 풀어주고 뭐, 비난이 많았거든요?
이런 일을 제가 어떻게 했을까? 제가 아는 저라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안할 일이거든요. 숨어야죠.
괜히 나섰다가 다음번엔 아버지한테 더 크게 혼날 텐데 그 짓을 왜 해요. 숨어야죠.
숨었어요, 솔직히.
숨었는데, 왜 자꾸 속에서 뭔가가 자꾸 그냥. 그래서 어느날 차마 어쩌지 못해서.
아휴, 기왕에 괴로운 거 차라리 그냥 나서서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어차피 당할 건데. 차라리 대놓고 한번 해 보자. 그래서 늘 했던 것 같아요.
또 하라 그러면 제가 할 수 있을까? 또 고민해야 합니다.
그동안 제가 해온 일들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그러면 최재천 교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최전선에 나서서 또 한 번 해줄 거다.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아마 또 한참 고민하고 골방에 앉아서 나설까 말까, 나서면 어떻게 될까 이러고 있을 거예요.
제가 서울대 축사 때, 양심 얘기를 꺼낼 때만 해도 많은 분들이 약간 의아해했습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무슨 양심 얘기를 하냐?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 사회에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가장 핫한 논쟁거리가 돼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열흘동안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 중에 하나거든요. 참 묘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풀어나가겠다는 마음으로 숙론의 장을 펼치는 거니까요.
얘기를 서로 좀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질의응답
양심의 차이가 사람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요?
하하하. 그러게요. 여러가지가 가능하겠죠. 제가 그것을 서울대 축사에서는 ‘양심의 촛불’ 이라고 표현했었어요.
불어도 불어도 꺼지지 않는 이상한 촛불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걸 저는 차마 못 끄고 어느 날 그 촛불이 타오르는 대로 한 건데 어떤 분들의 마음속에서는 그 촛불이 꺼지나 보죠. 그 차이는 뭘까?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기분이 좀 안 좋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오늘 고백한대로 제가 태어나기를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성장과정에서는 양심적이지 못 하도록 컸어요. 주변 환경이 너무 무서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인 행동을 하게 된 건 뭘까?
예를 들어서 호주제 폐지에 나서게 됐던 가장 큰 배경은 제 학문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공부를 했으면 그때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자연에 나가서 동물을 관찰하는 그런 연구를 하다 보니까, 자연에 나가서 보니까 동물들 세계에는 전부 암컷이 중심이더라구요. 그런데 인간 세계로 돌아오면 수컷들이 다 권력을 쥐고 날뛰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생물학자로서 불합리하다고 얘기하는 거 그게 뭐가 틀린 일일까 하고 나서게 된 거거든요. 자신이 연구하는 것과 자신의 삶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죠.
근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러더라구요.
고전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평가는 옛날에는 학문이 삶이었대요. 사서삼경을 읽고 이러는 것이 그걸 가지고 내 삶을 바꾸겠다는 의지로 그런 공부를 하는 거였는데 현대사회로 들어와서 학문이 쪼개지고 분과 학문이 되고 이러면서 너무나 많은 분들은 학문은 그냥 하는 거고 그 학문에서 얻는 가르침과 내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 안 한다는 거죠.
그런데, 제 경우에는 일치합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관찰하면서 얻은 것을 차마 거역하지 못해서 어차피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늘 차마, 어차피, 차라리 이래서 결국은 저는 양심에 따라 행동을 하게 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는 분들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굳이 얘기하라고 그러면 공부하지 않는 죄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세상에 많은 것을 관찰하다 보면 양심의 촛불이 꺼질 리가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심과 지혜가 사실은 연결이 돼야 하는 건데 그 고리가 끊어지면 양심도 사라지지 않나 그런 생각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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