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이라도
한 번만이라도 조용해질 수 있다면.
우연과 요행과 그리고
이웃의 웃음이 멈추고
내 정감이 자아내는 이 소음이
깨어 있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지 않았으면 -
나는 그러면 더없이 깊은 사념에 잠겨
당신을 당신의 끝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그리고 당신을 (미소의 길이만큼이나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감사처럼
모든 생명에게 당신을 바칠 수 있도록.
나를 낳아준 어두움
나를 낳아 준 어두움이여,
나는 불길보다 너를 좋아한다.
하나의 원을 위하여
불길은 찬란히 빛나면서
세계를 한계 짓나니
그 외부에서는 아무도 그 불길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두움은 모든 것을 스스로 품고 있으니
형상과 불길, 짐승과 나,
그리고 인간과 권력을 사로잡으며 -
어쩌면 어느 위대한 힘이 있어
내 이웃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밤을 믿는다.
그 모든 사물에서마다
내가 사랑하고 형제처럼 느끼는
그 모든 사물에서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씨알로서 조그만 것에 스며들고
또 큰 것에는 크게 몸을 내맡깁니다.
그렇게 현신現身하며 사물 속을 흐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힘의 유희입니다.
뿌리 속에서는 눈을 뜨고, 줄기 속에서는 몸을 숨기며,
그리고 가지 끝에 가서는 부활이 되는 -
* 현신 現身 하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다. 흔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예를 갖추어 자신을 보이는 일을 이른다.
현세에서의 몸으로 나타나다.
부처가 응신으로 나타나다.
나는 모래알처럼
나는 흘러가 사라진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는
모래알처럼 흘러가 사라진다.
나에겐 금시에 무수한 감각이 생기고
그것이 하나씩 다르게 메말라 간다.
온몸 곳곳이 부어오르며 쑤시는 아픔.
가장 아프기는 심장의 한복판이다.
나는 죽고 싶다. 날 혼자 내버려 두어라.
이제 혈관이 찢길 만큼
불안이 치밀어 오리라.
당신을 찾는 이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찾은 사람들은
당신을 모습과 행위에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지가 당신을 알듯이
그렇게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나라는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는
그러한 허영을 바라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의미가 다른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기적을 내리지 마십시오.
세대에서 세대로 차차
밝혀지고 있는
당신의 계율을 정당하게 행하십시오.
당신은 미래입니다
당신은 미래입니다.
영원의 평원 위에 내리는 서광입니다.
당신은 시간의 밤이 간 뒤 우는 수탉의 소리,
이슬, 아침의 미사, 소녀,
혹은 낯선 사람, 어머니, 그리고 죽음입니다.
당신은 변모합니다.
언제나 외로이 운명에서 솟아
환호도 비탄도 없이
원시의 삼림같이 기록되는 일 없이 정결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물의 깊은 진수 眞髓 입니다.
그 본질의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언제나 다르게 모습하는,
배에게는 해안이 되고 육지에는 배가 됩니다 -
우리는 껍질이며 잎새
우리는 껍질이며 잎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죽음,
그것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있는 열매입니다.
소녀들은 그것을 위하여 몸을 쳐들고
한 그루 나무처럼 칠현금에서 나오며
그것을 위하여 또 소년들은 어른이 되기를 동경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성장하는 아이들의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공포를 막아 주는 신뢰자입니다.
설사 흘러간 지 오래라 해도
한 번 눈에 보인 것은 영원처럼
열매를 위하여 남나니,
꾸미고 짓는 모든 사람이
그 열매를 위한 세계가 되어
얼리고 녹이며, 바람을 보내며 또 빛을 줍니다.
그 열매 속으론 마음의 온갖 열기와
뇌수의 하얀 불길이 스며듭니다.
그러나 새 떼처럼 날아드는 당신의 천사들은
모든 열매들이 설익은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
당신은 가난한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
당신은 자리 없는 돌멩이,
딸랑이를 치면서 성 밖을 헤매는 나병 환자.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당신의 것,
명성인들 당신의 헐벗음을 덮을 수 있을까.
집 없는 한 아이의 허드레옷이 차라리 더 화려한 재산이겠다.
차라리 숨기려고 첫 수태의 숨결을
허리를 졸라매어 질식시키고픈
소녀의 배 안에 든 태아의 기운만큼이나 불쌍한 당신.
당신은 불쌍한 사람,
도회지의 지붕 위에 복되이 내리는 봄비,
세상을 등진 감방의 죄인이 혼자서 품어 보는 소망,
그리고 돌아누워서는 행복을 느끼는 환자,
아니면 철둑길에 바람을 맞고 선 슬픈 꽃,
또는 얼굴을 파묻고 우는 손과 같은 것.
추위에 떠는 새인들 당신만 할까,
하루 종일 굶은 개인들 당신만 할까.
갇힌 채 잊힌 짐승들의 자아 상실,
또는 오해인 그 조용한 슬픔,
그것인들 당신에게 견줄 수는 없다.
유랑인 숙소의 가난뱅이도
당신과 당신의 가난보다는 나으리.
맷돌은 못 되는 조그만 돌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얼마쯤의 음식은 갈고 있나니.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인.
당신은 청빈의 위대한 장미,
햇빛이 되는 황금의
영원한 변용 變容 .
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은
당신은 조용한 방랑자,
어디에서도 너무 크고 너무 무거운 -
당신은 폭풍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
타려는 사람마다 가루로 부서지는
당신은 하프.
릴케에 대하여
여자 옷을 입고 자란 소년
어린 시절의 릴케는 경제적 가난을 경험하진 않았으나 대신 다른 종류의 결핍을 겪어야만 했다. 그 결핍은 곧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이 경험한 것들 중 한 가지인 부모의 정서적 몰이해였다.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요제프 릴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프라하에서 장교로서의 입신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제대하여 하급 관리에 머물렀고, 어머니 피아 릴케는 자신의 허영심이 충족되지 않자 결혼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릴케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결혼하여 처음으로 낳은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죽은 딸을 잊지 못하고 릴케를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어머니의 집착으로 릴케는 일곱 살 때까지 여자 옷을 입고 자랐고, 게다가 여덟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됨으로써 불행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아버지가 그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릴케는 1886년 장크트푈텐 육군 유년학교에 입합하였고, 감수성 예민한 그는 군사교육을 받으며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릴케 스스로 군사교육을 받던 10대 초반이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고 말할 정도로 군사학교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5년을 버틴 군사학교를 병고로 자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로도 얼마간은 군사학교 제복을 입고 다녔다고 하니, 그의 어린 마음에 강인함에 대한 동경이나 군사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군대식 생활에 대한 공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16년 징집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나마 대학에 진학하면서 예술사, 문학사, 철학, 법학 등 자신의 감수성을 어루만져 주는 공부를 하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았다. 안정감을 느껴 보지 못한 릴케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삶의 고통을 치유하게 된다.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이룩한 정신적 도약
이제 라이머 마리아 릴케는 세계인에게 수많은 애송시를 제공한 시인의 대명사로 남았다. 릴케를 불멸의 시인으로 탄생시킨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의 만남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녀를 만난 날은 1897년 5월 12일로, 소설가 야콥 바서만의 뮌헨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였다. 젊은 시인 릴케는 루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거센 사랑의 폭풍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녀는 릴케보다 열네 살 연상으로 그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고 따뜻한 모성의 존재가 되어 주었고,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를 접하게 해 주었다. 릴케는 그 여인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릴케는 직접 만나기 이전부터 당대 인정받는 문학가이던 루 살로메를 각별하게 여겼다. 그녀를 만나기 한 해 전에 릴케는 그녀에게 익명으로 몇 편의 시를 우송할 정도였다.
드디어 그녀를 실제로 만난 릴케는 “친애하는 부인,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 (당신의 글을 읽던)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 둘이서만 있었습니다” 하는 편지를 보낸다. 자신을 각별하게 여기는 어린 작가에게 루 살로메도 끌림을 느낀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된다.
릴케에게 루는 애인이자 정신적인 반려자였다. 그녀는 불안에 떨며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걲던 그에게 현실의 길을 안내해 주는 든든한 지원자였다. 살로메는 릴케에게 니체의 사상과 러시아 문학을 소개해 주었고, 여행도 함께 다니며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루 살로메를 만난 이후 릴케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생긴다. 새로은 이름을 쓰게 된 것과, 그의 서체가 변한 것이다. 1897년 빈에서 발행하는 한 잡지에 ‘르네 마리아 릴케’ 라는 본명 대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데, 이는 살로메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또 이전까지 비스듬히 종이를 스치는 듯한 당시의 일반적인 필체 대신 부드러운 루의 필체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릴케의 시 세계도 더욱 원숙해진다.
직관의 힘으로 화려하고 창조적인 문학의 꽃을 피우다
릴케의 문학이 처음부터 화려한 꽃은 피운 것은 아니었다. 릴케는 문학을 독학하다시피 하였으므로, 1894년 18세 때 출간한 첫 시집 ‘삶과 노래’ 는 아무래도 미숙한 마무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시적 재능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초창기 그의 시들에는 불안한 청년의 격정과 감수성과 순수가 잘 드러나 있다.
분명한 것은 릴케의 원숙한 작품들은 루 살로메를 만난 이후 사고의 확장과 타국으로의 여행 등을 거치며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1905년 출간된 기도시집 은 기도서를 문학적으로 수용한 작품들로 신을 향한 끝없는 갈구를 담고 있다. 종교적 치열함으로 가득한 이 시집은 비평가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899년, 1901년, 1903년 세 차례에 걸쳐 한 부씩 창작한 ‘기도시집’ 의 완성 사이인 1902년에는 ‘형상시집’ 을 발간한다. ‘형상시집’ 에서부터 사물을 바라보는 릴케만의 시적 언어가 나타나고, 신비주의자와 같은 시선으로 사물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며 사물의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1907년의 ‘신시집’ 에서는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잘 나타나는데, 이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몇 개월간 일하며 조형예술 세계를 체험한 결과물이다. 릴케는 로댕으로부터 대상의 내면을 응시하는 법, 대상의 압력을 견디어 내는 법, 그리하여 경건하게 그 내부에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드디어 릴케의 시는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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