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좀 읽어볼까

백기완 선생 - 묏비나리 시와 발자취

HUSH 感나무 2024. 12. 17. 01:54

 

 

 

 

백기완재단을 상징하는 <장산곶매> 깃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 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농창 들어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의 한 몸만

맴돌자 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 오면

또 한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힌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 타 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 데나 내다 버려질지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 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 다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 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 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 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라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협잡의 명수 정치꾼들은 죄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터지는 소리

쩡, 쩡, 그대 등때기 가르는 소리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치는

주인놈의 모진 매질 소리라

 

천추에 맺힌 원한이며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쭉소리라

차라리 그 소리 장단에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그려

얼은 땅, 돌부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쭉을 나꿔채

그 힘으로 어영차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여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을 몽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을 용감했어요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노래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으고 그걸로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그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인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 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 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은 여보게 아예 그대 몸에

한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 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어

뿌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목지 몸짓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저 싸우는 현장의 장단 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벌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신부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한 춤꾼은 비로소 굽이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비록 저 이름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껴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자들의 거짓된 껍줄을 털어라

이 세상 껍줄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오, 우리 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 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 몸으로 디리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 위에

희대의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 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어라.

 

- 1980년  12월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백기완 선생은 구속 상태에서 149행의 장시 長詩 묏비나리를 썼다. 차고도 찬 시멘트 바닥의 독방 감옥에서 찬 바닥에 누운채로 스스로를 달구질하기 위해 입으로 시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워 내놓은 시다. 황석영 작가가 5.18 항쟁 희생자를 추모하며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 은 실제 백기완 선생의 묏비나리가 원작이다.

 

은 묘나 산을 뜻하는 우리말 방언이고, 비나리 는 마당굿이나 풍물, 또는 마당굿, 당산굿, 마당굿 등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순우리말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981년 뮤지컬 넋풀이-빛의 결혼식 에 삽입하기 위해 소설가 황석영과 전남대 학생 김종률 등 광주 지역 노래패 15명이 공동으로 만든 곡으로 1980년 5월 27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중 전라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8년 말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 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되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은 들불야학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미니 카세트 녹음기로 몰래 녹음한 이 곡 임을 위한 행진곡 은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 묘지에 합장하면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여러 경로의 복사본이 노동운동 세력 사이에 민중가요로 빠르게 유포되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상징곡이 되었다.

 

 

 


 

 

 

 

백기완 白基玩 한살매(생애)

1933. 1. 24  -  2021. 02. 15

 

민주화 운동가 · 통일 운동가 · 정치인

거리의 투사 · 문필가 · 시인,  백기완

 

백기완 선생은 일제강점기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백기완 선생의 아버지 백홍렬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였으며 장련청년연맹 위원으로 청년운동에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인텔리였다.

백기완 선생의 조부 백태주는 천석꾼 부자로 3.1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은율군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장련농민공제회 창립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할아버지 백태주와 아버지 백홍렬은 1934년 삼남지방 수해 당시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율에 힘쓰는 등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던 할아버지 백태주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고문으로 옥사 당하시고 백기완 선생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게 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백기완 선생은 평생을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살게 된다. 한때 몸무게가 80kg이 넘고 힘이 장사였던 백기완 선생은 갖은 고문과 잦은 투옥을 되풀이하면서 반쪽의 몸이 되었고 돌이킬 수 없을만큼 건강은 악화되었다.

 

1946년 월남한 백기완 선생은 1950 - 60 년대 초까지 농민운동과 빈민운동,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산을 되살리는 산림녹화 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196년 백기완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 백기완 선생은 1974년 유신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1979년 10.26 사건 한 달 뒤인 11월 24일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명동YW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한 협의로 백기완 선생은 또다시 투옥된다.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는 등 백기완 선생은 수감과 석방을 반복하게 된다.

 

2019년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다 함께 올바로 잘 사는 대동세상,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염원을 그린 버선발 이야기를 출간했고, 같은 해 태안화력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의 장례식장을 찾은 백기완은 마른 몸으로 김용균씨의 영정 앞에서 울었다.

 

 

 

 

 

출처 : 노나메기 재단

 

 

 

혁명가 백기완

혁명가 백기완은 불평등과 소외를 심화하고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 서로 경쟁과 이기심을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너도 나도 일하며 함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를 건설하는 데 한살매를 바쳤다. 늘 노동자 민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독재정권과 독점자본과 맞서서 언제나 맨 앞에 서서 투쟁하였다. 군사독재정권에서 202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백기완’은 곧 ‘저항’의 상징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고 수시로 투옥이 되어도, 선생은 조금도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민중 사상가 백기완

사상가 백기완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어머니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무지렁이들의 말과 이야기에 담긴 민중들의 분노와 한과 신명이 어우러진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며 노동자 민중이 해방된 세상을 여는 길을 민중들의 언어로 구성하였다. 현대사의 굴곡마다 천둥처럼 깨어있는 시대의 목소리를 내질렀고 불의와 폭력에 대해서는 폭포처럼 사자후를 내리꽂았다. 그는 민중 혁명 사상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써내려갔다.

 

 

통일운동가 백기완

통일운동가 백기완은 두 발로 분단선을 넘어 북녘 땅을 밟고 그리운 어머니의 묘소에 큰절하며 큰누이를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가족사를 넘어 온 겨레와 함께 분단모순을 극복하고 통일의 세상을 열고자 <백범사상연구소>와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한반도의 해방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모든 제국과 권력자들의 압제와 폭력을 넘어 모든 민족 민중이 자유로운 통일을 향하여 온몸을 던졌다.

 

 

예술가 백기완

민족미학자이자 예술가 백기완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자”라며 예술을 통해 혁명을 돌파하고자 했다. 민중들의 말과 이야기와 몸짓에서 참다운 아름다움과 민중사상의 뿌리를 찾아 민중미학으로 체계화하였다. 민중들의 한과 분노, 바랄(꿈)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장산곶매, 버선발, 꼴굿떼, 이심이, 뿔로살이, 새뚝이, 달동네, 새내기, 비나리 … ’ 등 진정성과 구체성이 넘치는 수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토해내었으며, <님을 위한 행진곡>의 원래 가사인 <묏비나리>를 지었다.

 

 

 

 

 

 

울보 백기완

인간 백기완은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면서도 눈물이 많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뒤 남쪽으로 내려와 한평생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평생 자본과 권력, 불의와는 터럭만큼도 타협하지 않았고 이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이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노동자와 서민, 니나, 무지렁이들에게는 늘 따끔한 한 모금이었으며, 그들의 아픔을 보듬으며 같이 울어주는 울보였다. 젊게, 밝게, 굵게 언제나 한마음으로 새로운 벗나래(세상)를 향한 그리 강렬한 투쟁도 실은 선생의 지극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기완 선생 붓글씨 (이미지출처 : 노나메기재단)

 

 

 

노나메기 재단

백기완 노나메기 재단은 분단모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야만에 온몸으로 맞서서 투쟁했던 불쌈꾼(혁명가), 민중운동가, 통일운동가, 민족·민중예술인 백기완 선생의 뜻과 한살매(일생)를 기억하고 널리 알리고 계승하고자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노나메기’ 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뜻하며,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는 백기완 선생이 한살매 동안 실천해 온 바랄(꿈)이다.

노나메기 벗나래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평등한 주체로서 소외나 착취가 없이 진정한 자기실현의 노동을 하고 각자 존엄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회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야기한 이기심과 경쟁, 불평등, 소외, 물신주의의 심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지양하고 나아가 이에서 희생되고 억압된 노동자, 민중, 사회적 약자들의 피눈물에 공감하며 인간해방을 지향한다.

정의롭고 생태적인 공동체로서 노나메기에 살아가는 바랄(꿈과 희망)을 향하여, “어떠한 어려움에도 다시 일어나, 맨 첫발 딱 한발떼기에 목숨을 걸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맨 첫발을 내딛는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롬(정서)와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 든메(사상)와 하제(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 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  백기완, 버선발 이야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