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감나무집 허쉬입니다.
독일공영방송 ZDF에서 10년째 자기 이름을 건 철학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아마존 철학분야 1위를 찍은 베스트샐러도 여럿 가지고 있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편을 녹취해봅니다.
여러분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타인을 위한 선한 행동은 유용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장려하는 부분이죠. 하지만 도덕적인 것이 꼭 유용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비열하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득이 될 때도 있죠. 내게 득이 되지 않더라도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이유를 데이비드 흄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 빈틈을 파고들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보상의 문화가 도덕적 행동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타인의 행동이 기준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아무도 나를 보상하지않고 박수 쳐주지 않고 나의 선한 행동을 비난하더라도 나는 선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선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아닌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죠. 과거에는 양심이라 불렀고 칸트는 '자기 존중'이라 말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선한 행동에 대한 의무감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영원히 악인이 된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거든요. 맞는 말이죠. 뼛속까지 악인임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범죄자 조차도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잣대를 바꿉니다. 이중잣대를 들이댑니다.
누군가가 나를 나쁘다고 비난한다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죠.
네가 나한테 할 소리야?
첫번째 특징이죠. 나를 의심하는 사람을 깎아내립니다. 흔히 나타나는 행동 방식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적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라고 할 테죠. 그렇게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죠.
양심의 가책을 피하려 할 때 나타나는 행동
① 나를 지적하는 사람 깎아내리기
②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덜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③ 외면하기
두번째는 이렇습니다.
나의 잘못을 인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하다고 항변하는 거죠. 자기 행동을 타인보다 위에 두는 겁니다. 칸트의 '정언명령(무조건 지켜야 할 도덕적 명련)'이 아닌 제가 규정한 '정언비교'에 의해서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해 나보다 나쁜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러면 내 행동을 고칠 필요가 없으니까요.
세 번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인 외면입니다.
저는 뒤셀도르프에 살고 있는데요. 작년에 신규 등록된 차량의 약 3분의 1이 SUV였습니다. SUV는 환경보호와는 거리가 먼 차죠. 대부분 자녀가 있는 부모가 이 차를 이용하는데요. 이들은 자기 행동을 완전히 외면합니다. 둘 중 하나죠.
"너도 SUV 타잖아. 네 비판은 듣지 않을래."
"다들 SUV 타고 다니는데 나 하나쯤이야."
또는 그 사실 자체를 외면하죠.
"SUV 타는 게 별건가. 동물 집단 사육 문제가 더 심각한걸."
따라서 본능적으로 우리의 심리는 우리가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했더라도 결국엔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기만하지만 타인의 비난을 거부하며 평생 이 기만을 유지한 채 살아가죠. 매우 암울한 결론입니다. 굳이 긍정적으로 본다면 자존심을 지키는 거라 할 수 있죠.
오늘날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과거보다 더 커졌을까요?
요즘 젊은이들의 고민을 생각해봅시다. 예컨대, 올바른 식습관이나 지속 가능한 행동 소수자의 사회적 통합 등을 실천할 때
타인을 비난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부단히 노력합니다.
비록 인간이 자신의 도덕성을 미화하고 이중잣대로 교정하는데 능숙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보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건 좋은 소식이죠. 우리는 더 민감하고, 신중하고 배려가 커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이 나빠졌다고 생각하죠. 실제로 세상은 20년, 50년, 100년 전보다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선한 인간에 대한 열망은 전 세계적으로 더 커졌습니다. 한국과 독일은 물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등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답하기 쉬워졌죠. 주변에 도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의 노력도 커질 것입니다. 그 집단에서 악한 사람으로 베재되지 않기 위해서요.
이것은 인류 역사가 퇴화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미래는 과거보다 도덕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어린 시절 안정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까요.
사람들은 공감을 갈망합니다. 안정감을 원하고 무조건적인 인정을 바랍니다. 무조건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면 심리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한 낭만적 사랑의 관점에서도 무조건적인 인정을 기대하지만 쉽게 충족되지 않죠. 이것이 고통과 슬픔을 만듭니다. 서구 문화권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바라는 욕구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기독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조건없이 사랑받는다는 개념은 낭만적 사랑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미 종교에서 존재했던 거죠.
중세 시대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내 인생은 왜 이토록 짧은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이 당시 평균 수명은 30~35세였습니다. 영아 사망률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50세를 넘기는 건 드물었죠. 그마저도 특권층이었습니다. 겨울에 온수도 없던 농민층이 고된 농사일을 하며 노년까지 사는 일은 극히 드물었죠.
그런데도 그들은 질문했습니다.
"왜 삶은 짧고 가혹한가?"
"왜 아이들은 일찍 죽는가?"
답은 한결같았죠. 중요한 것은 현생이 아니라 죽음 이후다. 기독교 관점에서 지상의 삶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시험대입니다. 그 시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한다는 거죠. 중세 시대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천년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에 살고 있어요.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죠. 모두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나요?"
이에 철학자들은 반어적이거나 냉소적인 답을 내놨죠.
"아무도 행복을 추구하지 앟는다. 오직 영국인만 행복을 추구한다."
독일어의 Gluck 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영어의 happy와 lucky죠. 행복과 행운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은 게임에서 운이 따르고 평소 행운아인 것과는 다르죠. 때문에 Gluck의 어감은 변덕스럽고 엉뚱하고 어리석은 느낌입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여기에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지난 수백 년간 철학이 생겨난 이래로 행복은 찾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오락같은 극적이고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죠. 행복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얻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를 떠올려 보세요. 행복을 위해서는 마음의 평온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즐겁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인생에 어떤 고난이 닥쳐도 견딜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행복을 바라보는 서양 철학의 주된 관점입니다.
"행복을 쫓지 마라."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 끝까지 함께 하든 안 하든 나 자신부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죠. 이러한 지혜는 삶을 의지대로 살 수 없었던 가난한 시대의 산물입니다. 오늘날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인생의 파트너를 찾는 것, 이상적인 일을 하는 것, 아름다운 자녀를 낳는 것, 가능한 많은 행복을 주변에 전하는 것 등 과거처럼 고통을 피하는 게 행복보다 중요하다 말하는 건 의미가 없죠. 그런 실수를 하면 안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다고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인생의 작은 행복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삶의 소박하고 작은 즐거움에서 신비로움을 찾는 거죠. 화려함을 좇는 게 아니라요. 이것은 오늘날까지 유효한 행복의 공식입니다.
철학은 어디에 쓰는가
철학은 '좋은 삶이 무엇인가'를 묻는 오래된 기술이자 훈련과정입니다.
이게 철학의 기원입니다. 지혜의 가르침이죠.
지혜의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물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시대를 초월해 인류가 마주해온 질문들이죠. 사람들은 이것을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왜 필요할까요?
제가 자주 받는 질문이죠. 이때 저는 사람들이 실용적인 것을 기대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당장의 어떤 효용 말이죠. 예를 들어,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거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이요. 하지만 그건 철학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건 자기계발서의 역할이에요. 자기계발서에는 이런 조언들이 나열돼 있죠.
인생 성공 비법, 부자가 되는 비결, 그외 사람들이 원하는 것, 행복을 찾아서, 반려자 찾기 등 이건 철학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닙니다. 철학을 자기계발서로 취급하는 사람은 철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철학이 다루는 커다란 질문을 생각해봅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믿고 바래야 하는가?
자기계발서에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답을 찾고 나면 앞선 커다란 질문들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겠죠.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철학은 커다란 질문에 쉽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걸 바란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죠.
철학의 길을 가다 보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① 세상은 언어에 종속되어 있고 언어는 진실 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② 모든 객관적 주장에는 주관적 한계가 있다.
③ 진실은(과학적 사실 포함) 세상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은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는 정당성이다.
이런 점들을 깨닫는다면 철학 하기 좋은 갑옷을 갖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남는 게 뭔가요?"
"철학을 왜 하는 거죠?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면서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신과 지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즉,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철학을 연구하면서 성장한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봤을 때도 우리는 철학을 통해 특정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끊임없이 전진할 뿐 좌절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과 타인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성과를 내는 과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욕구와 내적 성장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죠.
철학책을 보는 것은 타인의 두뇌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결하여 누구나 표현 가능한 객관적 관점이 아닌 자신만의 관점을 정립할 때 우리는 비로소 철학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