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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좀 읽어볼까

최승자 시집 - 물 위에 씌어진

by HUSH 感나무 2024. 12. 10.

 

 

최승자 시집 2011년 시집 물 위에 씌어진 표지
최승자 시집 - 2011 - 물 위에 씌어진

 

 

 


 

 

물 위에 씌어진 1

 

현존재, 하루 낮 하루 밤 같은 것

현존재, 흐르는 바람 같은 것

그 위로 질펀한 울음 같은 것

(파열하는 푸른 바다)

 

현존재, 안으로만 흐르는 물결

현존재, 물 위에 씌어진 꿈

현존재, 물 위에 다시 씌어지는 꿈

 

(하나씩 둘씩 사람들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피어오르는

하이데거적 존재의 향기)

 

 

 

 

 


 

 

슬펐으나 기뻤으나

 

슬펐으나 기뻤으나

그래도 할 일이 없어 오른 山

오른발을 東에 두고 왼발은 西에 두고

굽어보고 굽어봐도

슬펐으나 기뻤으나의 그림자들일 뿐

세상은 간 곳 없고 부풀어 오르는 먼지뿐

 

가을 山 국화꽃 하나 웃길래

오른발은 西에 두고 왼발은 東에 두어 봐도

발아래는 여전히 세상살이의 먼지뿐

먼지 자욱한 그 속에서

어디에다 내 집을 지을까

 

이 꿈도 아닌 저 꿈도 아닌 그사이에서

이 꿈도 이데올로기요, 저 꿈도 이데올로기인 그사이에서

어디에다 내 집을 지을까

 

 

 

 

 


 

 

 

망량

 

한 형체가 절벅절벅 걸어가는데

그 그림자와 망량이 서로 싸운다.

의식은 확실하게 걸어가는데

무의식 속의 무의식이 무의식에게

자꾸 싸움을 걸어온다

 

망량아 망량아

이 세상의 붉은 홍등가가

그렇게도 서러웠었니?

한 점 흰 하늘이 없엇

그렇게 서러웠었니?

 

(이 세계史와 저 세계史 사이를

찔뚝 팔뚝 걸어갑니다)

 

* 망량 : 그림자의 그림자라는 뜻

 

 

 

 

 


 

 

말馬들이 불쌍하다

 

나를 버리고 외출할 길은 없을까

남몰래 나를 벗어 버릴 곳은 없을까

 

거리는 햇빛만 쨍쨍하다

가던 개 한 마리 뒤돌아본다

세 여자아이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다

 

누군가 커튼을 드리운 창문 뒤에서

전쟁에 관한 長詩를 쓰고 있다

그는 50여 개국을 여행한 사나이라고 한다.

 

햇빛은 더욱 쨍쨍해진다

가던 개 한 마리 또 뒤돌아본다

고무줄놀이 하던 세 아이 사라지고 없다

 

(문명이 문득 울음조차 그친다)

 

(말馬들이 불쌍하다

말들의 튼튼한 엉덩이와 긴 다리가 슬프다)

 

 

 

 

 


 

 

 

사프란으로부터 온 편지

 

나의 기억은 나의 무덤

 

당신이 백일몽 하길래

나는 암야몽 했었죠

당신이 취생 취생 하길래

나는 몽사 몽사 했었죠

 

전설대로 사프란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어여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가엾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슬프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기쁘지도 않습니다

 

나의 기억은 나의 무덤

 

당신이 백일몽 하길래

나는 암야몽 했었고

당신이 취생 취생 하길래

나는 몽사 몽사 하다가

그만 끈을 놓아버렸더랬죠

 

나의 기억은 나의 무덤

 

그러나 사프란에는 내 무덤이 없습니다

사프란은 넉넉한,

넉넉히 아름다운 섬입니다

 

PS : 목 졸라매던 기억이, 무덤이, 기억이, 무덤이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잊은 것 같습니다

like, dislike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무스 아니마라는 말은

아직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most famous blue raincoat *

 

산뜻하게 너는 떠나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나는 옷을 갈아입는다

너 떠난 지 이미 오래지만

너는 떠나고 라고 쓴다

푸른 우산을 갖고 밖으로 나가지 전에

없는 너를 찾아 나가기 전에 나는

most famous blue raincoat를 듣는다

그 노래에서는 언제나

존재의 서글픈 아름다움이 흘러나온다

산뜻하게 너는 떠나고

나는 블루 레인코트를 걸치고

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듣는다

most famous blue raincoat 의 추억을

 

famous blue raincoat * - 레너드 코헨이 부른 곡 제목

 

 

 

 


 

 

이상한 안개의 나라

 

내 시야의 안개 속을 걷는다

아니 안개 속의 내 시야를 걷는다

 

그런데 왜 내 시야는 안개로 가득 차 있는가

모든 未知들의 혼란스런 뒤엉킴

내 시야가 먼저인가 안개가 먼저인가

내 시야는 어째서 안개로 번져 가는가

 

詩人의 시야는 안개를 피워 올리고

詩人은 자신이 피워 올린

안개의 신기루 속을 걸어간다

 

 

 

 


 

 

최승자 시인의 말

 

* 이 詩集 의 詩 들 전부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神, 神할애비 등에 놀랄 수도 있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노자와 장자를 계속 읽다가 마주치게 된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만 더 보태자. 그렇긴 하지만 神, 神할애비 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마저) 빠져나갈 수가 없는 초거대물리학, 초거대집단심리학이다.

 

쓸쓸한 날에는 장자를 읽는다. 쓸쓸한 날에는 노자보다 장자가 더 살갑다. 그러나 더 쓸쓸한 날에는 장자도 有毒하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아도 장자의 없음으로써 있는 그림 떡이 있을 뿐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금상첨화인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삶은 쓸쓸해진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은 기쁨이므로) 그렇게 쓸쓸해 할 때의 나는 始源病 에 걸린 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始源病 이라는 또 다른 증세까지 겹쳐 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술을 천천히 마신다. 始源 을 그리워하면서. 눈에 보이는 꽃들이 어제 생겨난 듯하고 동시에 천만년 전부터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는 듯한 순수와 환희를 가득 풀어 줄 어떤 始源性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천천히 마시는 것이다.

 

(하루 낮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게 詩人이 아니더냐)

 

 

 

 

 


 

 

 

 

  해설  

말과 감각의 경제학

 

황현산 문학평론가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뒤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는 최승자를 배웅하며,  나는 그 가냘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것도 쌓아 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 어깨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 할 어깨가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승자가 써 온 시와 살아온 살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신의 존재가 인영물이라고 늘 생각했던 그는 자아를 찾아서, 또는 그 잉여물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합당한 운명을 찾아서 긴 여행을 했다. 그는 너무 멀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멀지 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했다. 중년을 넘긴 사람들에게라면 우리의 삶이 가장 불행했던 시기인 유신 시절부터 시를 써 온 최승자가 섭생 치료에서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비서들을 섭렵하고 거기 심취했던 것은 군사독재 권력이 막을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불행 하나가 숨을 죽인 자리에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승자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팝십년대는 치욕이었다.(세기말, 내 무덤 푸르고) 그런데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돌이켜 보면 공포였고 치욕이었던 그 불행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을 가리고 있는 이름 붙일 수 있는 불행이었을 뿐이었다. 유령의 군대와 싸우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벌써 유령이 아닐까. 사실 우리의 삶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뿌리가 뽑혀 있었따. 뿌리 뽑힌 상태에서 뿌리 뽑힌 제 처지를 의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불안은 수시로 찾아온다. 욕망이 불안을 가리었다. 살아왔던 길을 모두 폐지하고 널따랗게 새로 뚫린, 뚫렸다기보다 침범해 들어온 큰길을 향해 우리를 너나없이 달려가게 하는 이 욕망은 실상 비어 있는 욕망이지만, 그 비어 있음을 가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욕망이 필요했다. 욕망이 욕망을 물고 온다. 달려가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 비켜섰을 때에야, 또는 더 이상 그 발걸음을 따라갈 수 없을 때에야, 문득 사람들은 뿌리도 없이 유령들과 싸우고 있는 제 처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최승자는 예의 내 무덤 푸르고자본족 에서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 고 벌써 예언했다. 그날은 재빨리 찾아왔고, 여행하던 최승자는 바로 그런 날들의 한복판에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의 여행은 자본 자본 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나섰던 일종의 피난 여행이었던 셈이다. 최승자가 이 욕망 시스템에서 비켜 서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 몸집이 작은 시인은 욕망을 재생산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자신의 욕망을 바람과 돌에 투사하고, 하늘의 별에 투사하여, 우리의 삶이 어떤 형식으로건 삼라만상의 기운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기미라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는 욕망의 피안을 보여 주었다.

 

지난해 최승자의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제 욕망을 누르고만 그 시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말이 줄어들었고, 문장이 짧고 단순해졌으며, 그 낯익은 독기가 확실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호흡을 타고, 독립성이 강하고 투명한 말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어서 명사문이 아닌 문장들도 명사문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최승자가 관념을 나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구별이 없어진 어떤 체험이 있었다고 오히려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물들이 본디 모습을 되찾아 의미로 충만한 말들, 이제 더 이상 기호가 아닌 말들이 그 의미와 온전하게 결합하는 자리에 들어 서 있었다. 물론 이 본디의 사물들 속에 아파트와 자동차를 비롯하여 이 문명의 무서운 기계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폐허가 되어 무너져 가는 모습으로 이따금 시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이 세계가 멸망한 다음 날 아침 그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오랫동안 혼란 속에 떠돌고 있던 최승자는 이렇게 자신이 한번도 누리지 못했거나 오래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없어져 버린 듯한 자리에서 관념이면서 동시에 사물인 것들을 만나고 있었다. 우리가 어느 날 잠 깨어 일어나 이 자본주의의 주어 없는 욕망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아침을 맞게 된다면, 아마 우리도 이 시인처럼 사물을 볼 것이다. 그러나 최승자는 자신의 시상 을 순진하게 이 문명의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구상과 추상의 결합은 통시성과 공시성이 하나인 시간(또는 무시간)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된다. 오래된 것들과 덜 오래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현재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는 이 생각은 지금 이 시간의 깊이를 말하기보다 아무것도 해결한 것이 없는 역사의 허무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 태초에 얼버무렸던 문제들은 지금 또다시 얼버무려야 할 세계의 문제로 남아 있다. 대안은 역사를 전제로 하는데 역사는 어떤 문제도 해결한 적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 문명이 멸망한 뒤에나 만나게 될 세계를 멀리 쓸쓸하게 바라보면서, 자기 시를 그 세계로 옮겨 놓고 싶어 할 뿐이었다. 최승자는 욕망의 피안에 서 있었다.

그렇다고 최승자를 이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긴 여행의 끝에 가장 하찮은 욕망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고 말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지난번 시집 쓸쓸해서 머나 먼 에서 벌써 보았고, 이제 발간하려는 이 시집에서도 보게 되듯이, 급격하게 줄어든 말들이 그 금지된 욕망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최승자는 말의 욕망까지도 허락되지 않는 정황을 자물쇠 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이 늘 구지궁상일 때에는

Da Da Da Do Do Do만 연주하라

Da Da Da Do Do Do의 리듬 혹은

외침으로만 남게 하라

 

- 자물쇠, 부분

 

 

최승자는 낮은 목소리로 절약해서 말한다. 그는 외딴 섬에 조난당한 사람이 마지막 빵을 조금씩 아껴서 떼어 먹듯이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악의 궁지에 몰린 최승자가 이 궁지에서만 가능한 시를 썼다는 것이며, 욕망과의 나쁜 인연을 욕망에서의 해방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의 시집에서 세상이 멸망에 이른 후에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말하였듯이, 이 존재론의 시집에서는 죽음 뒤로 넘어가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이 삶에 관해서 말한다.

 

 

道可道 非常道 를 노랬던 사나이는

저 초월의 에도 불구하고

질펀하게 쏟아지는 현실의

어떻게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를 道 로 대체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 58세 내 고독의 , 부분

 

 

를 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세상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욕망이 남아 있는 58 세에 그 욕망의 표적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어디에도 굽이칠 수 없고, 그래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그 욕망을 조용히 바라볼 수는 있다. 저 초월의 虛 가 의지와 훈련에 의해 도달한 자리이기 이전에 이미 나쁜 운명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조용히 바라봄 에 의해서 의 가치를 얻는 것은 사실이다. 끝내야 할 어떤 일도 없고,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는 최승자의 58세에, 어떤 행위도 의미를 지닐 수 없기에 일체의 행위는 무위가 된다. 그 무위를 조용히 바라본다는 것은 삶 하나를,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삶 하나를 확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정을 다 말한다면, 최승자에게 의지와 훈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과 훈련된 재능이 있다. 실질 없는 기호의 무덤 속으로 떨어져 버릴 낱말들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의미 하나씩을 짊어지게 하고, 생각과 표현 사이에 팽팽한 그물을 설치하여 사실 세계와 관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로 육체에 자국을 내던 그의 재능은 허무의 벌판에서도 그 효력을 더욱 또렷하게 지닌다. 최소한의 관능도 영접하지 못하는 표적 없는 욕망으로 인색하게 차려 내는 가난한 말의 식탁이 유례엇는 다이어트 식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최승자의 손을 거친 식탁이기 때문이다. 말은 늘 진실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무위에 이른다. 낙서 를 오직 그 자체를 위한 말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바로 그 낙서에 이른다.

 

 

하늘은 늘 파아란 해변

 

한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먼 풍경

 

이 식은 詩 한 사발 속에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역사와 낙서

구름 공장들

민주주의라는 겉멋에 관한

민주주의라는 속맛에 관한 속살거림들

 

- 가고 갑니다, 부분

 

 

하늘은 늘 파아란 해변 이지만, 최승자에게 그것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변화를 바랄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 이외의 다른 뜻을 지니지 않는다. 한 인간 이 모든 사람에게 먼 풍경 이 되는 것은 그 인간이 누구에게나 망각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말의 식탁에 놓이게 될 식은 詩 한 사발 이 풍경에 변화를 주거나, 타인들에게서 욕망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는 없다. 먼 풍경” 에 구름을 한 번 피우는 데나 소용될 이 낙서 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거나 역사적 기억이 되어 남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또한 거기 있다.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자유는 오직 자신을 위한 이 가난한 언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속살거리는 이 민주주의의 속맛 이 비록 허무의 맛이라고 하더라도 존재 라는 말이 가장 큰 울림을 얻는 것은 그 속맛 에서일 것이다. 우리에게 돌아온 최승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뼈만 남은 이 가난한 언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 라는 말을 이해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또한 허 를 도 로 이해하건, 그 역으로 이해하는 일이 된다. 그는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사프란으로 떠난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다시 돌아왔지만

사프란으로 떠난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바다가 너무 멀면

그 너머 더 멀리에 무슨 섬이 있으리라

 

- 나는 다시 돌아왔다, 부분

 

 

물론 이 섬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집의 두 번째 시 ‘물 위에 씌어진 시2’ 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를 항구로 삼아 “밀물 썰물 수시로 들락” 거리는 개별적인 생명 너머에, 존재 그 자체인 존재, 무상하게 출입하는 생명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홀로 비상하는 자유의 갈매기” 가 있다. 그러나 어디로 비상하는가. 어디로는 없다. 닿아야 할 자리를 염려하는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 곧 개별적인 생명에 그친다. 사는 일에 급급하게 마련인 그 생명에게 자유는 없다. 최승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사프란을 “죽음의 보부상들도 닿지 못하는 땅” 이라고 설명하지만(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 섬은 사실상 생명과 그 욕망 너머의 땅, 곧 죽음의 땅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최승자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죽음이라는 맑은 거울에 비친 우리의 삶을 조용히 바라본다. 시인에게 이 쓸쓸한 바라보기는 그 쇠약해진 육체의 감각을 가장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그녀가 사프란으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감각의 경제학에 있다. 시인은 이 경젱학으로 많은 것을 본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전에 보지 않았던 풍경을 본다. 아침 햇살을, 냉랭하게 푸른 하늘을, 바다에 내리는 비를, “소보록 소보록 쌓여 가는 눈” (눈 내리는 날)을, “만선의 돛” (포항시 뭉게구름 氏에게)처럼 펼쳐진 구름을, 아카시아 숲을, 지리산의 바람을, 그는 오직 바라본다. 그는 그 풍경을 그리스도라고도, 부처라고도 생각한다. 감각을 절약해서 얻은 행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최승자는 가장 가벼운 육체로, 가장 잘 활용된 감각으로, 인색하게 허락되는 언어로, 간명한 사상으로, 경제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사용되는 시적 선회로, 우리 시대에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을 만들었다. 제 입김으로 거울을 흐려 놓지 않으려면,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