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시간 위에 몸 띄우고
두드려라, 안 열린다.
두드려라, 만에 하나 열릴지도 모르니까.
두드려라, 안 두드리면 심심하니까.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물러가라 모든 밝음
물러가라 모든 빛들
쉬잇, 우리 모두 조용히 하자
흐르는 물결 위에서 그녀를
그대로 잠들게 하자.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의 별에 잠시 걸터앉아
흘러온 길과 흘러갈 길을 바라본다.
만경창과 시간 위에 몸 띄우고
한 사람 온 뒤에 또 한 사람 오는구나.
한 사람 간 뒤에 또 한 사람 가는구나.
사라져라 사라져라
물밀어라 물밀어라
뭇별들 사이로 소리 없이
사라져라, 물밀어라.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주렴.
그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줄게.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20년 후에, 지 芝 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 眼 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 江 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 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 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산산 散散 하게, 선 仙 에게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당혹감,
그리고 족쇄 같은 기억들을 이끌고
지나온 모든 길 모든 도시를 더듬어
마침내 거기가 이국 어느 도시의
기숙사 방임을 깨닫게 될 너의 한밤중.
내가 예감하는 너의 한밤중.
하지만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으랴.
위장이 간장을? 심장이 허파를?
고통의 물물교환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는……
일찍이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구나.
내가 파놓은 이 심연
드디어는 내 발목을 낚아챌
무지몽매한 이 심연.
깊이와 넓이와 길이로 동시에 흐르기 위해선
역시 물처럼(바다!)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모든 숨을 다 내맡기고
빨간 염통까지 수면 위에 동동 띄운 채.
이제 진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십년 전에도 십오 년 전에도
똑같은 단어와 똑같은 문법으로써
물었었던 그 질문.
그런데 어째서 그 질문의 배후에
이상한 흉칙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는지.
나는 언제나 내가 먹는 밥이
진실한 밥, 깨끗한 밥이기를 원했지만,
이게 뭐냐, 가해와 피해와 가학과 자학과
자기 기만으로 얼룩진 밥.
(생각나니, Das Brot der frühen Jahre?)
하지만 이런 게 삶일 줄은 몰랐다고 말하지 말자.
서른세 살(너는 서른넷) 나이게 그렇게 말한다는 건,
범죄 행위다.
무제 無題 1
1
나는 그들을 살아 넘겼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이제 죽어도, 죽어서도
더 나아갈 곳은 없고
나는 이제 노래하라!
입도 혓바닥도 없이,
처음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마지막으로 항문이 찢어질 때까지
나는 이제 영원히 춤추라!
무릎도 발바닥도 없이,
노예선의 북소리 울리고
까마귀들의 습격이 시작될 때까지.
2
구르기로 작정하면 한없이 굴러지지만,
그러나 육체는 흘러가도
마음은 흘러가지 못하며,
어머님.
저 바다 끝 너머
내 망막의 수평선에 누워 계신
종이 같은, 뿌리 없는 어머님,
가여운 내……
내 너를 무릎 위에 얹고
가리라 가리라
앉은뱅이 시늉으로
내 너를 무덤까지 데려가리라
무덤 속에 최초로 씨 뿌리리라
(어디에도 계시옵지 않은
그대, 독기로 타오르시며
그대, 한 세상을 꺾어버리시며
그대, 그대 그늘로 일세를 뒤덮으시며,
그러나 원하신다면,
당신이 원하는 그 깊이로
고이 추락하리라.)
3
머나먼 소혹성 위에서
그녀가 까마득하게 외쳐댄다.
우리가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귀를 가진 까닭이다.
그러나 내 무의식의 코는 분명하게 찾아낸다.
이 파멸의 냄새,
보이잖게 살이 타는 푸른 냄새를.
책이 썩고
애인이 썩고
한 나라가 썩고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썩고 계시다.
4
보이네
한밤중에
그대의 흰 죽음.
모든 사물事物이 까무러치고
모든 사물事物의 표상表象이 까무러치고
보이네
한밤중에
떠가는 그대의 흰 죽음.
5
- 그러나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
기다려라, 이제 보다 아픈 가을이 오고
비로소 나는 그치지 않는 잠을 자기 시작하리라.
두문불출 내 마음의 세월 위에
그대들의 물음이 떨어져 내리고
떨어져 내려도
답하지 않으리라,
어느 날 문득 내 창가에 불이 꺼질 때까지.
해설
방법적 비극, 그리고
정과리 문학평론가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너는 네 스스로 강 江 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20년 후에, 지 芝 에게, 부분
최승자의 시들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모래사막에서 사는 삶의 고통스러움이다. 왜 모래사막에서의 삶인가 하는 것은, 근원의 상실, 모태의 부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시간 위에 몸 띄우고, 부분
삼십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부분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현재 삶의 헛됨은 개인적으로는 자아의 탄생 직후부터, 일반적으로는 인류의 탄생 직후부터이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삶의 무의미성은 생래적 조건이다. 다음과 같은 시구는 모태와 현실의 갈림, 그리고 쌍방의 훼손을 잘 알려준다.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약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파도의 포말을 타고
오대주 육대양으로 흩어져 갔다.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리츠버그나 오덴달스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오염된 바다)
-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부분
갈림의 순간에 모태는 신생아들에게 행복한 지반이 되어주지 못하며, 신생아들이 빠져 나간 모태는 빈 껍데기로 떠돌고 아이들은 헤매며, 언제나 파행과 실패를 낳는 행각을 벌인다. 그 근원을 상실한 헤맴은 “보이지 않는 발목” (망제望祭) 또는 “일 피트 높이에서 영원히 땅에 닿지 못하” 는 “우리들의 발” (고요한 사막의 나라)이라는 분명한 표현을 얻는다. 애초에 우리의 삶은 허망하다. 뿐 아니라, 허망은 부풀어 오른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환상은 맹목적으로, 방향도 정도도 없이 자동 증식한다. “날개는 풍선 돋힌 듯” 팔리고, “여의도” 는 “구린내도 그윽한 문화의 오븐 위에서 / 무럭무럭 김을 풍기며 /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 며(여의도 광시곡).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 연습, 부분
처럼 악순환한다. 동시에 그 구역질 나는 포만의, 허망한 삶을, 사람들은 즐겁게 받아들인다. 거짓 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구르는 헛바퀴의 완강한 힘, 치욕이여
중국집 짬뽕 속의 삶은 바퀴벌레여,
그래도 코를 벌름거리며
돼지들은 죽어서도 즐겁고
오, 제 먹는 게 제 살인 줄 모르는
무의식의 죄의식의 내출혈의 비몽사몽의
- 여의도 광시곡, 부분
“폰 가갸 씨” 를 “사무실 출입문이 기운차게” 열고 “원효대교가 다시 홀라당” 넘어가듯(폰 가갸 씨의 초상) 인간은 객체화 사물화되어 있지만, 거짓 의식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꿈속에서 세상은 그를 우렁차게 찬미한다.
그 거짓 의식의 허망한, 사물화된 삶의 흐름은 파멸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거짓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파멸은 사람들에게 의식되지 않는다.
(1)
간밤 소리 없이 이슬 내린 뒤
현관문이 가만히 울고
죽음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온다.
- 무제 無題 2, 부분
(2)
그리고 고요한 사막의 나라에선 세월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앞에서 쳐들어온다.
야비하게 복병한 죽음을 싣고서
- 고요한 사막의 나라, 부분
(3)
어느 한 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
한꺼번에 불타오르고
우연히 발을 잘못 디딜 때
터지는 지뢰처럼
꿈도 도처에서 폭발한다.
-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부분
파멸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일상적이듯 남모르게 진행되어 온다(1). 그러나 어느 한 순간, 파멸은 느닷없이 폭발한다(2, 3). “쉬임없이 늙어가는” 세월은 “느리고 더딘 미끄러짐” 이지만, 그 양적 팽창은 “냉동된 달빛 뚝뚝 떨어져 꽂히고 / 벽시계 과앙과앙 울리는” (나날) 파멸의 급작스런 질적 변화를 예비하고 있다. 그 야비한, 느닷없는 닥침은 자아에게 끔찍한 공포를 유발한다. 막막히 행군해 쳐들어 오는 고통의 폭발은, 피할 길이 없기에, 더 고통스럽다. 왜 피할 길이 없는가. 이 세상에 나온 순간, 근원 · 모태는 이미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 누울 곳” 없다(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되돌아갈 땅, / 세습의 땅도 없다” (여의도 광시곡). 그래서 돌아가려는 의지는,
우흐흐하 돌아가자
돌아간다 돌아간다
도라간다도라간다도라간다
- K를 위하여, 부분
처럼, 의지의 자체 순환성으로 폐쇄되어 버린다.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의 돌아감은, 한 자리를 뱅뱅 맴돈다는 뜻의 돌아감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세계를 근원이 상실된 삶의 세계로 파악하고 있는 최승자의 시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정직한 인식(자본주의란 관념적으로는 내재성이 파괴된 세계이다)이며, 동시에 그 근원 상실을 생래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적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의 완벽한 던져짐, 완전한 갇힘에도 불구하고, 모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 非 사르트르적이다.
지금, 이곳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갇혀 있다는 인식은, 하지만 모태/현실의 대립을 심층에 깔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태의 세계를 명료한 형태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성의 와해 혹은 풀림을 마련한다. 물론 자아는 그 모태의 세계를 확실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알고 있다면, 그 알고 있음만으로도 이 세계의 고통은 덜 수 있겠지만, “새를 가르쳐주시겠어요?” 라는 질문처럼 모르기 때문에, 고통은 완벽한 그 자체로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태를 기억하는 자가 있다(시간 위에 몸 띄우고). 그 기억은 의식적 기억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다.
우리가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귀를 가진 까닭이다.
그러나 내 무의식의 코는 분명하게 찾아낸다.
- 무제 無題 1, 부분
우리는 의식 속에서 모태에 대한 기억을 거부한다. 거짓 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코는 분명하게 찾아낸다. 그래서 무의식적 기억은 자아로 하여금,
(……)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고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 고요한 사막의 나라, 부분
혹은,
깊이와 넓이와 길이로 동시에 흐르기 위해선
역시 물처럼(바다!)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 산산 散散 하게 선 仙 에게, 부분
에서 보이듯, 막연하나마 그 시원의 세계를 지향하게 한다. 그래서 모태에 대한 추억이 자아의 살아감의 이유 그리고 방식을 결정한다. 저항인가? 초월인가? 아니면 외면인가.
완벽한 갇힘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언제나 도로에 그친다.
닫혔다 열리고
열렸다 다시 닫히려 하지 않는
(닫히면서, 결코 닫히면서)
흐르는 관 棺 들.
- 죽음은 이미 달콤하지 않다, 부분
이고
(……) 197X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부분
이며, “어둠의 볼륨을 좀더 높” 이고 “날마다의 커피에 증오의 독을 조금씩 더 치” 며 “죽음의 확실한 모습을 기다” 려도, 죽음이 닥쳐온 순간엔 공포에 질려 도망가기에 급급하다(나날). “으으 …… 즈즈 …… 으깨진 무선기처럼 신음하고” “이승의 지푸라기라도 한가닥 건네다오” 라고 갈구하지만(지금 내가 없는 어디에서), 구원의 지푸라기는 어디에도 없다. 닫혀진 관인 채로 흘러갈 뿐이다. 그 흘러감은 무릎 꿇은, 치욕적인 굴종의 기어감이다.
이 절대 고통은 자아로 하여금 삶 자체를 부인하게 한다.
다시는 내가 이 세상에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모가지를 꿈틀거리며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네가 쓰러지기 전에
먼저 나를 차주지 않겠니,
다정한 내 사랑 내 아가야.
- 너는 즐거웠었니, 부분
처럼 그 부인은 필사적이다. 삶을 부인한다면? 죽음일뿐이다. 다시 말해, 삶 이전 모태는 이젠 죽음이다. 이 사르트르적 세계 인식은 그러나, 그 죽음이 모태 라는 변별적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향점이 되어준다. 죽음은 무가 아닌 것이다. 그 지향성을 통해 장아는 이 세상에 맹목적으로 휘말려 있는 사람들과 스스로 구별된다. 그 구별의 대립은 일차적으로는 흘러감 / 흘러가지 않음의 대립이다.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 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부분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의 허망함에, 거짓 의식에, 사물화에 빠져 욕망과 슬픔이 범벅이 되어 흘러갈 때, “나” 는 흐르지 않는다. 세상의 무의미성 혹은 그에 대한 인식을 “피해가고 싶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 피해가고 싶지 않음 - 흐르지 않고 남아 있음 은 위상적으로는 밑으로 내려감이다. 다시 말해 수평성 / 수직성의 대립이다. 그 수직적 내려감은 죽음 혹은 모태 혹은 무덤으로의 내려감이다. 그 내려감을 통해 자아는 구원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뱃가죽이 땅가죽이 되도록 기어나가” 는 “희망” 에 집착하느니보단, 무덤으로 내려가, 어느 날 살아, 구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말갛게 깨길 기원했으니까.
어느 날 나는 나의 무덤에 닿을 것이다.
관 棺 속에서 행복한 구더기들을 키우며
비로소 말갛게 깨어나
홀로 노래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 주인 없는 잠이 오고, 부분
구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수직적 내려감은,
봄에는 황사처럼 아지랭이처럼 미쳐
수유리 하늘 끝에서
고요히 가물거리다 스러지고 싶다.
- 망제 望祭, 부분
에서 보듯, 수직적 올라감이다. 그러나 그 수직적 내려감 - 올라감이 구원이 아님을 자아는 기실 알고 있다. 이미 얘기했듯, 그리고 인용문들에서도 보이듯, 올라가거나 내려가 도달한 세계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죽음에의 도달함이 자신을 말갛게 깨게 해주길 기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말갛게 깸 그 자체도 뜻 없는 것임을 자아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무덤으로의 내려감은 세계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세계의 외면이었을 뿐이다.
이 세계를 나는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손을 씻고서
나는 돌아섰다.
지루한 업무를 비로소 끝낸 인턴처럼.
그리고 안드레이 오 안드레이
너는 거기 앉아 있었다.
바다 건너 네 사후 死後 의 방 房 안에,
죽은 미래를 깔고서, 고요히.
- 죽음은 이미 달콤하지 않다, 부분
이 세계를 죽이면서, 혹은 이 세계에서 돌아서면서, 자아는 문득 자신과 같이 탈출해야 할 다른 사람은 여전히 이 세계 안에, 사막의 세계 속에 갇혀 있음을 본다. 나의 탈출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들을 외면한 것이다. 그 절망적 직면(!)은 충격이다. 나는 갇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가둠일 뿐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문을 닫아 걸었고 / 귀와 눈을 닫아 걸었” 으며 제 자신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 가 된 것이다. 세계로부터의 탈출은 세계 속에 갇힘의 이면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자아는 탄식조로 고백한다.
일찍이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구나.
내가 파놓은 이 심연
드디어는 내 발목을 낚아챌
무지몽매한 이 심연.
- 산산 散散 하게 선 仙 에게, 부분
흘러감 / 흘러가지 않음, 수평성 / 수직성의 대립은 올바른 대립이 되지 못하고, 함께 부정적인, 서로 구원할 수 없는 무의미한 대립이 된다. 그래서 자아는 무덤으로도, 삶으로도 어느 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그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시간과 죽음 사이로 /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솔리테어) 운명의 도박을 걸며, 수직적 지향은 수평적인 것에 걸려,
어린 날의 메아리가 되살아나
흐야 호 바다로 내달아
바다!
일어나!
솟구쳐!
위로
위로
정점의 피
태양
- 여의도 광시곡, 부분
의 모양처럼 사선이 되고 만다.
수직적 내려감의 헛됨, 그 헛됨의 헛됨에 대한 인식은 자아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그 깨달음은, 이 세계에 사는 것이 비극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 세계는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현실일 뿐이다.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이때 자아는 애초에 상정했던, “다만 헛되이 /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라는 막연한 목표에 대해 반성을 가하게 된다.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부분
이제 남는 것은 무참히 꺾여짐밖에 없다. 낭만주의적 지향에서 비극적 태도로 자리 옮기는 이 대목은, 그런데 이런 질문을 야기한다. 무참히 꺾여짐은 무슨 의의를 가지는가. 최승자의 시들은 좌절과 패망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자의 절망적인 심정의 토로일 뿐인가. 단지 토로에 그친다면, 많은 평범한 시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를 고통에 홀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반편 비극의 무 그 자체일 뿐인가. 그러나 그의 시들은 기실, 무참히 꺾여짐으로써, 좌절의 극에 감으로써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환기시키는 시들이다. 그 사실을 우선 앞 인용문에서 유추할 수 있다. 조금 자세히 보면, 그 구절에서 “나” 의 현실에서 “살아 / 기다림” 은, “너를 위해” 서이며, 동시에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이다. “너” 와 “무참히 꺾여짐” 은 등항이 되고 있으며, 그것들이 목적이라면, “살아, 기다림” 은 방법이 된다. 무슨 말인가. 풀어 쓰면 이렇다. 1) 너를 위해 나는 무참히 꺾인다. 2) 살아, 기다림은 너를 위해 무참히 꺾여지기 위한 나의 행동 방법이다. 3) 다시 말해, 나는 끝내 살아 기다려 무참히 꺾여짐으로써, 그것의 처절함을 너에게 보여준다, 혹은 나의 비극의 실상을 너에게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의도를 시인은 앞 인용문의 다음 구절들에서, 내 몸을 분지르고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히고 싶다라고, 또 다른 시에서는, “당신들의 필생의 악몽이 되고 싶다” (슬로우 비디오)라고 보다 확실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최승자 시의 비극은 방법적 비극인 것이다. “제 먹는 게 제 살인 줄 모르는” 거짓 의식에 온통 젖어 있고, “월급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 “폰 가갸” 씨처럼 사물화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최승자의 시들은 그 삶이 비극임을 철저히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비극의 의미를, 그 비극을 배태하는 현실의 위악성을 질문하고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며, 동시에 그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를 가차 없이 촉구하는 것이다. 최승자의 시들에서 섬뜩하도록 던져지는 극언적 말투들(개새끼!, 이년! 등)은 사실, 비극을 유보엇이 보여주고 그것의 극복을 가차 없이 촉구하려는 시인의 기도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 기도는, 극언적 어법 그 자체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언적 어법이 혐오로서가 아니라, 섬뜩한 깨달음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극언적 어법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의 진행을 요구한다. 그게 없다면, 극언은 말 그대로 욕설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형태론은, 의미의 양적 첨가와 그 팽창에 의한 의미의 질적 변화 - 충격적 깨달음이다. 이런 시를 보자.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즐거운 일기, 부분
언뜻 보아, 소시민적 삶의 안락함을 진술하고 있는 이 시는, 3연의 마지막 두 행 때문에 독자를 갑자기 당황하게 만든다. 그 안락한 삶이 왜 “아싸라비아 / 도로아미타불 일까. 그 당황감을 해소하기 위해 독자는 시를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읽어보자. 1연에선 나의 기쁨과 기쁨의 이유가 서술된다. 그러나 기쁨의 서술 속에서 그 기쁨을 의혹케 하는 징조가 숨어 있다. “밀린 번역료” 가 그것이다. 번역료는 왜 밀려 있었을까. 이 의문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으면, 1연 전체가 의문의 대상이 된다. 왜 어머니는 구태여 건강을 증명받아야 하는가. 나는 왜 남자를 “소개” 받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 의혹들은 아직 안에 잠재해 있다. 2연에선, “나” 의 기쁨이 일반인들의 기쁨으로 확대된다. 의미의 양적 확대이다. 그래서 기쁨의 현상들이 거듭 첨가된다. 그러나 그 기쁨의 현상들의 서술은 뒷부분에서 “피곤한 기린이 아빠” 라는 표현을 떨어뜨려놓고 있다. 왜 기린이 아빠는 피곤할까. 이 의문 때문에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 는 것은 “기린이 엄마의 꿈속” 에서이지 현실 자체에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면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이란 말인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2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읽으면, 우리는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린다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풍선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게 아니라,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린다는 것은, 삶의 충만 혹은 부풀어 오름이 무수히 비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비상이 “풍선” 처럼 묶여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독자인 우리는, 현실에 묶인 꿈이 현실 속에서 허망하게 부풀려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은근히 권유받게 된다. 깨달음에의 권유란, 의문이 좀더 확실하게 제 모습을 갖추어 질적 변화의 조건을 준비한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3연의 앞 세 행도 외면적으로는 안온한 소시민적 삶의 모습들의 첨가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문 - 깨달음의 명료화이다. 그 명료화로 제시되는 것이 “캄사 캄사” 라는 외국인의 우리말 발음투이다. 그것의 느닷없는 돌출은 사실 느닷없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만난, 외국인의 우리말 발음투에 당혹해서 다시 2연으로 되돌아가면, “아파트” / “봉봉 크랙카” / “튤립” / “포니” / “센티미터” 등 외래어와 “맥주 라는 외래 술이 이미 시 속에 들어 있어 첨가 - 팽창되어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시민의 안녕의 삶이 외세에 의한 허망한 삶의 이면임을 감지하게 된다. “날개” 로 표상된 우리의 비상이 아니라, 외세의 침윤, 외세에 의한 묶임이었고, 그 외세는 “수영이 삼촌” 이라는 표현처럼 친근하고 “별아저씨” 라는 표현처럼 멋지지만, 그 친근함과 멋짐의 이면에는, 허황된 현실에의 순응과 믿음의 환상에의 강제와 마취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국도 조선도 고려도 아닌 “코리아” 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 지만, 그것은 제대로 노는 것이 아니라 놀아난 것이며 실제 현실이 아니라 가짜 꿈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객체성 - 비주체성, 그리고 그에의 거짓 의식이 한편으로 안온한 일상적 삶의 모습들로 계속 덧붙여 서술되고 다른 한편으로 의혹의 잠재성이 밖으로 명료해지는, 양적 팽창이 극단화되었을 때, 달리 말해 깨달음의 조건들의 성숙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것은 마지막 두 행의 충격처럼, 끝없이 부풀어 오른 풍선의 얇은 막처럼 터져 폭발한다.
최승자 시가 드러내는 처절한 비극, 그 비극에 대한 야유 · 욕설 등 극언적 표현들은 단순히 말의 장난, 현실의 비하, 자기 학대가 아니다. 그 욕설 · 야유는 나름의 형태론적 진행에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그 형태론적 진행이, 의미의 계속적 첨가를 통한 양적 팽창의 질적 폭발이다. 그 세심하게 배려된 형태론적 진행은, 극언적 말투에 어안이 벙벙해진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의 시를 되돌아 읽게 만든다. 그 되돌아 읽음의 과정은, 바로 현실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이다.
하지만 양적 팽창이 팽창 그대로 질적 변화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질적 변화가 당연히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기가 쉬운 걸까. 모순이 극도로 차 있는 이 세계에서 말이다. 조건이 성숙되어 있다고 해서 조건 자체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현실로 변모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현실의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어떤 매개물 · 과정(인간의 주체적 운동)을 필요로 한다. 가령, 물이 0 ℃ 이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된다. 즉 양이 질로 전화한다는 고전적인 보기에서, 0 ℃ 의 물은 그대로 0 ℃ 의 얼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 물이 얼음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약 400칼로리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최승자 시의 비극의 적나라한 보여줌이 비극이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지탱해주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 무자비하게 쓰러진 나를 나는 어떻게 보여주는가. 쓰라림의 고통 속에, 그 한없는 자기 소멸 속에 휩쓸려 있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내며 그 고통의 의미를 우리에게 환기시킬 수 있는가. 대답부터 하자면, 최승자 시의 그 지탱력, 매개물은 관념화된 자아이다.
(1)
그래서 멀리 누운 우리의 발가락에도
때로는 빗물이 튀긴다고 하더라.
- 망제 望祭, 부분
(2)
또다시 한 세월이 끝났을 때
나의 무릎은 절단되어 있었고
너의 문은 닫혀 있었다.
-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부분
(3)
이윽고 말갛게 씻겨져 나간
백골의 추억으로 그대는 일어선다.
그대의 비인 두 눈구멍을 뚫고
두 줄기의 바람이 불어 간다.
- 한 목소리가, 부분
(4)
눈 감아요, 이제 곧 무서운 시간이 와요.
창자나 골수 같은 건 모두 쏟아버려요.
토해버려요, 한 시대의 썩은 음식물들을.
- 무제 無題 2, 부분
아무렇게나 뽑아본 위 인용문들에서 알 수 있듯, 최승자는 유달리 신체 부위에 대한 묘사를 즐긴다. 뿐 아니라, 문장들에서 주체는 “나” 이기보다는 “나” 의 신체 부위 - 구성물들이다. 다시 말해 최승자 시의 화자 話者 는 “나는 배가 아프다” 라고 진술하기 보다는 “나의 배가 아프다” 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최승자의 시들은 시인이 방법적으로 제시하는 자아의 적나라한 비극을 자아 그 자체의 고통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자아의 구성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구성물들의 고통 - 쓰러짐, 파괴당함은 모두, 끝까지 묘사된다 하더라도 “자아” 는 자아 자체로서 남는다. 자아는 끝내 자신의 몸 마음의 구성물들이 쓰러지고 파괴되는 것을, 실상 그대로, 치열하고 처절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감당시켜주는 지탱 축이다. 그것은 자신의 구성물들은 다 떼내면서 남은 것이기 때문에 관념화된 자아이다. 이 자아의 확보가 있기 때문에, 최승자 시의 화자는 고통의 극한 속에서도 옹골차고 앙칼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견지는 동시에 자아에의 집착이 아닐까?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 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 20년 후에 芝에게, 부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고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아는 자아의 비극을 철저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비극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비극은 방법적 비극이다. 그런데 그 비극 - 연극은 “나의 사랑” 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네” 가 “네 스스로 강 을 이뤄 흘러” 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들 혹은 독자들 혹은 화자의 사랑의 대상이, 화자의 죽음의 비극을 통해,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더 나은 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이다.
가차없이 꺾여 네가, 우리가 활짝 피울 꽃으로 꽃병에 꽂히겠다는 것이다. 고통으로 깊이깊이 죽어가는 자아가 화자의 실제적 자아라면, 그 죽어감이 “나의 몫” 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관념화된 자아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 내가 죽어가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관념적 자아의 자세는 오만이 아닐까. 자아의 몫을 선험적으로, 당위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자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최승자 시의 화자는 어느새 감지하게 된다. 자아가 보여주는 고통이 아무리 처절하고 그리고 그것이 자아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것은 고통의 흉내, 사랑의 흉내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켜고 들이켜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 언젠가 다시 한번, 부분
왜 흉내인가. 그 고통 사랑이 진정하고 뜨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목적인 “너” 의 깨달음, “너” 의 행복한 삶에의 지반 마련이 실현되는 순간, “나” 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나” 의 부재란 너와 나의 올바른 관계의 수립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달아나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흉내는 “나” 를 완벽히 소진시키지만, 나를 소진시키는 “나” 는 지키겠다는, 다시 말해 나의 삶의 몫을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만족하겠다는, 그럼으로써 “나” 의 의의를 구하겠다는 집착에 불과하다. 거꾸로 말하면, 그러니 그 집착이 진실한 삶이 못되고 흉내이고 만 것이다. 내 자신이 나의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한다는 것을 부인하니 흉내일 수밖에.
대체로 시집의 뒷부분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는 이 깨달음은 내가 남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있다는 인식을 얻어낸다. 하여 시인은
이제 그대가 내 적이 아님을 알았으니,
언제든 그대 원할 때 들어오라.
- 방 放, 부분
고, 흔쾌히 말하기도 하며(인용된 구절의 시 제목의 한자어가 방 이라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집착의 풀음이라는 뜻을 갖는 게 아닐까), 이제 남들이 흘러가듯 나도 함께, 그러나 의식적으로 “한 세월 위에 또 한 세월을 눕히고 / 나는 이제 가야”(하산) 한다고 다짐하고, 따라서
타오를 듯 푸르른 이 세계의 공포 속으로
내가 내려서기 시작한다.
안개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마침내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 대적 對敵, 부분
에서처럼, 너 를 나와 구별되는 객체, 위함 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상호 통화의 대상으로, 함께 이룸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죽어도 눈감을 수 없을 때엔
죽어도 눈감지 않는 게 좋습니다.
- 하산 下山, 부분
죽어, 비극을 철저히 보여주는 것이 타인들이 거짓 의식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죽음을 선험적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인식-의지의 절실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아직 명료한 형태론적 표현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외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선 신체 부위 등 자아의 구성물들의 주체화가 와해되고 자아 자신의 주체화로 담담하게 되돌아간다는 점이지만, 그 외 의식적인 시도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시인의 현실 - 우리와의 담담한 동행은 “한 경전 經典 이 무너지면 / 또 한 경전 經典 을 세우며 …… ” (하산)처럼 아직 산문적으로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를 만들어낼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이뤄야 할 우리의 일상적, 그러나 새로운, 열려 있는, 언어 담론에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그 의문이 우리가 시인과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거칠고 지루하게 살펴본 최승자의 시 세계는, 세계관의 유형학이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이 세계가 모래사막처럼 의미 없는 세계라는 인식에서, 시인은 세계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낭만주의적 충동을 느낀다. 그 세계 이전은 탄생 이전의 죽음의 세계이며, 동시에 모태의 세계이다.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무 無 이지만, 동시에 그 죽음을 지향의 명료한 형태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전체이다.
다시 말해 무가 전체로 변한다. 그래서 그것은 모태이다. 그 전체로서의 죽음 - 모태는 남들과 달리 사는 행위, 즉 자아 홀로의 수직적 지향이다. 자아의 개인적 지향이 진정한 세계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자아) 그리고 전체라는 낭만주의적 공식을 성립시킨다. 하지만, 되돌아가야 할 세계, 혹은 이승에서 벗어나 넘어가야 할 저 세계를 간단히 행복의 세계로 상정한 범박한 낭만주의자들과 달리, 그 전체는 곧 죽음이라는 점에서, 초기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가장 정직하고 가장 극단에 간 낭만주의적 인식이라는 점에서, 그 낭만적 충동은 곧 위태로워진다. 죽음 지향이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죽음의 허망함(허망함을 완성하려는 노력의 허망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시인은 비극적 세계관으로 넘어간다. 그 세계관은 처음엔 올 데 갈 데 없는 완전한 무의 세계이지만, 곧 자신의 죽음 - 무를 철저히 보여줌으로써 타인들의 “필생의 악몽” 이 되겠다는, 언제나 거짓 의식에서 깨어 있게 하는 환기력으로 작용하겠다는, 방법적 비극의 세계를 갖게 된다. 그것은 나를 철저히 죽임으로써 나(의 의)를 살리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그래서 방법적 비극의 공식은 무 無 그리고 하나(자아)이다. 하지만, 이 방법적 비극이 자아의 버림인 동시에 자아에의 집착이라는 깨달음, 나와 타인의 동등한 관계 설정을 포기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가지면서, 시인은 나 그리고 우리라는 변증법적 세계관의 단초로 이행한다. 나 그리고 우리라는 인식은 내가 행하는 삶과 그대가 행하는 삶이 서로 다른 층위가 아니라 같은 층위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삶의 몫과 너의 삶의 몫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함께 동일하다는 것,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은 “나” 혼자도, 나 없는 너도 아니고, 우리 모두라는 인식이다. 그 인식의 계속적인 개진 역시, 우리가 함께 이루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강 江 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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