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의 둘째 구절은 無染受胎(무염수태), 교미도 없이 첫 구절에서 나왔찌만 빛깔과 소리는 전혀 다른 것. 시의 셋째 구절은 근친상간, 첫 구절과 둘째 구절 사이에 태어났으니, 아들이면서 손자, 딸이면서 손녀. 눈 먼 외디푸스를 끌고 가는 효녀 안티고네. 말들의 혼례가 끝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풀잎은 약간 시든 채로 풀잎이었다
나는 문 위의 쇠사슬 수갑을 흔들며,
밤새도록 사랑하는 손님을 기다린다.
- 오시쁘 만젤쉬땀, <레닌그라드>
어릴 때 두 개의 사금파리 사이 풀잎을 끼워 넣고 무엇을 기다렸던가. 밥이 되길, 반찬이 되길 기다렸던가, 신랑 신부가 되길 기다렸던가. 푸른 사금파리 위 종일 햇빛 내리고, 풀잎은 약간 시든 채로 풀잎이었다. 누가 그를 두 개의 사금파리 사이 풀잎이 되게 했는가. 소꿉놀이 끝나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풀잎, 소꿉놀이 끝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풀잎, 누가 그를 두 개의 사금파리 사이 시든 풀잎이게 했는가. 그날 푸른 사금파리 위 종일 햇빛 내리고, 풀잎은 약간 시든 채로 풀잎이었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 파블로 네루다 <遊星>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水路夫人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봉분을 만들지 마라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장미꽃으로 하여
그저 해마다 그를 위해 피게 하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합천의 도예가 김종희 선생은 돌아가실 때 봉분을 만들지 마라 했다. 짐승들 다니는 데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푯말은 땅에 묻어 묫자리만 알리라 한 것도 사람의 몸이 땅보다 높지 않기 때문이다. 자손들 모여 곡하지 말고, 국밥과 고기 대신 차를 나누라 한 것도 사람의 죽음이 별일 아니기 때문이다. 화장 대신 매장의 관례를 따른 것도 땅속 미물들의 밥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와서 굶주리지 않았으니 가서도 굶주리지 않게 해야 한다.
뭐 그런 소릴 할 수도
나 역시 짐짓 속아보는 마음으로.
그런 뒤 사실을 말해버리고 다시 걸어 나갔다.
작년의 잎새들을 달고 있는 젊은 너도밤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무한한 순간>
나무의 석류들은 한결같이 땅을 향해 입을 쫑긋거린다. 오늘은 햇빛이 안 나네요. 쪼끔 목이 말라요, 뭐 그런 소릴 할 수도 있겠다. 여러 개 석류 알들이 같은 말을 저마다 다른 높이, 다른 음색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땅을 보며 말하는 것들은 그리 자신 있고 자랑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입맞추려는 듯 아예 땅바닥으로 내려오려고 안간힘이지만, 알고 보면 무거운 열매들을 지탱하지 못해 가지는 자꾸 아래로 처지고, 내려달라고 보채는 어린 열매들이 입을 삐죽이다 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는 것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 내내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을 흔들었네.
이제 진실 속으로 시들 수 있으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옥수수에 기생하는 스트라이거 균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스트라이거 균은 박멸할 수 없다. 강한 약 기운에 숨어 있다가 더 큰 耐性으로 되살아나는 것. 어리석음은 박멸할 수 없다. 늙기 전부터 지혜는 어리석음과 함께 있었던 것. 지혜의 나무 무성한 잎새를 보려거든, 땅속 어리석음의 뿌리에도 자주 물을 줄 것. 잘 자란 나무에 꽃이 피면, 진실이니 거짓이니 그런 시비는 벌이지 마라, 지혜롭지 못한 것.
시인의 말
가속기와 브레이크 페달을 번갈아 밟을 때처럼 내 글쓰기가 지나친 갈망과 절망으로 울컥거리기만 할 때, 평소에 좋아하던 다른 나라 시에 말 붙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 관심사는 인용된 시를 빌미로 하여, 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맘때, 한참 억지를 부리고 난 아이처럼 멋쩍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말로 시를 옮기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2003년 10월, 이성복
해설 -
깊은 오후의 열망
심재중 (서울대 강사, 불문학)
이성복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인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은 좀 별난 시집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읽고, 그 독서에서 출발하여 씌어진 시들을 모아놓은 시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시의 제목 밑에 짤막하게 인용된 외국 시인들의 시구와 본문 사이에서 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때로는 하나의 단어, 문장, 이미지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 고통, 영혼 같은 주제들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인용 시에 담긴 어떤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집의 서문에서 시인은 “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는 것” 이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사였노라고 밝혀놓았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는 시집의 첫 머리에 실린 시에서 이미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라는 구절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말들이 자기들만의 내밀한 법칙에 따라 증식한 것일까. 물론 인용된 외국 시인들의 시구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아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말하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어서 그 빛깔과 소리를 매개로 또 다른 말들과 어우러지고, 그 어울림을 통하여 무한히 증식해 나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은 거대한 하나의 텍스트일 뿐, 말들의 체계 안에는 주체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말의 내부” 에 태생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말의 바깥’ 이 있을 뿐이다. “말의 내부” 를 통해서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말 ‘이전’ 또는 ‘이후’ , 달리 말하면 말의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다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말에의 욕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탄생하는 그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말을 하게끔 만드는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번 시집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선불교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말로써 세상을 ‘분별’ 하고자 하는 욕망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 시인의 사유는 그 질문을 중심으로 궤적을 그려 나간다.
시적 사유는 인간의 다른 모든 사유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통해, 언어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의미 탐색의 작업이다. 다만 시적 사유는 언어의 역사성과 물질성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유의 방식이다. 그러한 사정을 시인은 “말의 배꼽” 이라는 비유로써 가리켜 보인다. 애초에 말이 탯줄을 대고 있었던 어떤 것의 흔적, 타자 또는 세계 앞에 마주 선 인간의 어떤 욕망이 남긴 흔적이 바로 “말의 배꼽” 이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말이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 언어라고 할 수 있고, 시의 독서는 욕망의 최초의 움직임을 향해 우리를 다시 이끌어 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시 읽기와 시 쓰기는 거의 하나의 동일한 여정이 된다. 그 둘 모두가 말이 지니고 있는 태생의 흔적, 즉 말의 배꼽 을 매개로 세계라는 절대적인 타자 앞에 우리를 다시 세워놓기 때문이다. 또한 거꾸로, 시인의 시가 ‘그의’ 말이라고 한다면, 인용된 구절들도 ‘그 만큼은’ 그의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들이 시인의 욕망을 일깨우고, 이제 그 말들의 증식을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시인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울음 울며 크게 자란 / 나의 모든 둘과 함께” 라는 파울 첼란의 시구는 시인에게 우선 괴로울 ‘고 苦 ’ 자를 떠올려준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시인의 말들은 한자 ‘苦’ 자의 형상에서 비롯된 은유들로 읽힌다. 그러나 그 은유들은 세월의 더께 속에 갇힌 인고 忍苦 의 나날과 함께 출구 없는 삶의 문 앞에 문득 마주 선 시인의 마음, 그 막막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또한 시 “내 사랑, 내 누이야, / 꿈꾸어보렴, 거기 가서 / 단 둘이서 사는 달콤한 행복을!” 이라는 보들레르 시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말들의 연쇄를 낳은 최초의 고리 하나를 우리는 인용 시의 ‘거기 가서’ 와 시의 첫머리에 놓은 ‘그해 늦은 봄’ 사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보들레르의 시구가 기억 속에 일종의 “문신” 으로, 원형적인 경험 - 상처로 남아 있는 풍경 앞으로 시인을 이끌어가고, 현재 속에 되살아난 그날의 욕망이 다시 말을 낳고 말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만, 속절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또 “노” 를 저어 가서, 결국 그 말부림이 끝나는 자리에서 어지럼증 과 함께 시인이 본 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어떤 비밀이 은연중 시인으로 하여금 시 언어의 근본적인 불가능성까지 말하게 하는 것일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가 보아온 이성복 시인의 일관된 열망 중의 하나는 삶과 화해하고자 하는, 이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운명과 화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화해하고자 하는 그 열망의 밀도에 따라서, 뒤집어 말하면 불화의 강도에 따라서, 시의 리듬은 고통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의 분출하는 듯한 속도로 거칠어지기도 하고, 연민의 물결에 실려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잠언의 비극적인 침묵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였다. 그리고 눈에 띄는 대로 예를 들어 보더라도,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세월에 대하여, 뒤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라든가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서해, 그 여름의 끝), 또는 “밤 오는 숲 속으로 마저 들어가지 못한 / 저 산길의 한 자락은 어쩔 수가 없다” (밤 오는 숲 속으로, 아 입이 없는 것들) 같은 시구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모든 경우에, 궁극적으로 시는 삶과 세계의 아득한 경계를 지향하는 어떤 것이었고, 그 경계에서 시인의 열망은 ‘붉은 꽃’ 과 같은 선연한 이미지들을 피워 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 특히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시들 중에는 거의 ‘산문’ (용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에 가까운 시들이 적지 않다. 시집 전체가 산문시들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시인이 보거나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들을 담담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는 시들이 적지 않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앞에서 예로 든 ‘들판의 경계’ 라는 공간 이미지를 시간의 축 위로 옮겨서 말하자면, 시는 비시간적인 어떤 순간의 긴장과 밀도를 지향하는 마음의 움직임, 또는 그 움직임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선적인 리듬과 논리를 따라가는 시인의 태도를, 시에 대한 열망을 잠시 내려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아서는 안 될 것’ 을 이미 보아버린 시인의 운명이 어디 가겠는가. 반지의 모양과 재질은 달라질 수 있어도, “한번 손가락에 낀 반지는 다시 벗을 수 없기 때문” 이다. 어쨌든 그런 태도가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 나름대로 한번 해명해보기 위해, 이쯤에서 ‘나는 시 쓰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라는 시인의 질문을 ‘나는 세상에서 무엇을 보는가’ 라는 질문으로 한번 바꾸어보아도 좋겠다. 근본적으로 말과 봄 觀 과 분별 행위 사이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과연 세상에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보기에 세상과 불화하고, 무엇을 보기에 화해의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는가.
이전의 시집들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성복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생과 사, 정신과 육체, 이상과 물질, 삶의 치욕과 영광 등등의 대립적인 항들이 사실은 한 몸의 두 얼굴과 같다는 인식,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각각의 대립항 모두가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인식의 표현들이다. 예컨대
새벽 오로라 같은 은혜를 너는 받았다고 우기지만, 그건 따로 국밥에 엉킨 선지 덩어리 같은 것이다. 그건 가시 담장에 걸린 비닐 봉다리 같은 것이다. 썩지 않아도 문드러지긴 하는 은혜. 때로 피멍 든 畜生 들이 하 아름다워서 ‘오, 삶은 영원한 것!’ 그렇게 속삭이다가 천천히, 천천히 삭아가는 비닐 봉다리.
미끄러운 마룻바닥을 기면서도 짝짓기를 풀지 않는 것들! ……
짝짓는 일의 고단함이여, 짝짓는 일의 삼엄함이여! 허공에 침 발라 닦아낼 수 없는 창피함이여!
말은 …… 제 똥이 말라가는 아스팔트 바닥을 몇 번이고 차보는 것이었다. 거기로부터 이어지는 어두운 낭하를 거쳐, 푸른 말젖이 흐르는 선조들의 하늘로 통하는 길이, 어쩌면 거기 있기나 한 듯이.
생명의 신비와 성스러무은 생명과 소멸의 과정 속에 있는 살과 피, 그 처연한 물질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인이 본 세상의 풍경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물러터지고, 균열이 가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있다. 가장 영광스러운 생의 이미지인 ‘꽃들’ 조차도 “복수가 차오른 말기 환자” 의 배나 다를 것이 없고, 삶은 잠시 ‘빚내어’ 사는 것일 뿐 ‘꽃 지고’ 나면 흔적도 없다. 그래서 때로 산 자들의 어리석음은 죽음의 부식으로부터 삶을 지켜내기 위해 “스텐 강판” 을 입히고 “비닐” 로 겹겹이 싸고 “콘트리트” 로 처바르기도 하지만, 생명의 순환은 “눈치코치” 없이 흐르는 ‘물’ 같은 것이어서 그 모두가 공연한 짓에 그치고 만다. 노화와 부식은 오히려 생명이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의 징표가 되고, 역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죽음의 각질 속에서도 생명의 “물기” 는 또다시 스며난다. 요컨대 생은 처연하고 속된 동시에 그 폐쇄적인 순환의 법칙에 어김이 없다. 결국 생애를 다 살고 거듭 다시 살아도 생명 가진 것들의 운명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 우리의 고통, 환희, 사랑, 증오 따위도 한갓 어리석은 분별심의 결과에 불과할 뿐, 생사의 순환 고리가 끝없이 반복되는 이 세상에 초월이나 결정적인 구원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 “영원한 수레는 나아가고 헛되이 바퀴는 돌고 도는 것”.
그래서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어머니1, 남해 금산) 다시 말해서 “밥이 法”(밥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고 “어린 영양의 창자를 끈질기게 물어뜯는 불콰한 턱주가리” 가 삶과 역사의 원형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마지막 위안과 구원의 표상이었던 어머니. “내 종아리에 달라붙어 피를 달라” 하는 “검은” 어머니로 형상화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처음 내 눈이 어머니 눈을 들여다” 본 순간과 ‘나’ 가 “어린 소 등가죽에서 파리가 피를” 빨거나 “개가 자지를 세우고 제 새끼를 물어” 죽이는 재앙의 광경을 본 순간은 동일한 하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 는 우리가 생의 축생도에 던져지는 순간에 ‘이별’ 하게 되는 어머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어쩌면 다시 “눈인사” 할 수 있을 어머니, 그래서 항상 세상의 풍경 배후에 음각으로 포개어지는,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인 셈이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병들어’ 있고 ‘죽어가는’ 어머니, 이미 항상 죽어 있는 어머니인 것이다.
하늘의 무서운 새가 내 어머니 물고 간다. …… 어쩔꼬, 하늘 깊은 둠벙에 내 어머니 빠지신다. …… 비름박 마른 시레기 같은 어머니 이제 안 보이신다.
그럴 때, 온갖 욕망의 소용돌이가 어지럽게 끓어오르는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들판은 허허롭게 텅 빈 공간을 비치고, 삶은 장난 같은 “소꿉놀이” 로 보인다. 세상은 텅 빔과 들끓음이 기이한 방식으로 결합된 방식으로 나타나고, “급브레이크” 소리, “비명 소리” 가득한 밤을 뒤덮고 있는 “고요함” , 끓는 가마솥의 ‘정적’ 은, 한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삶과 화해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은 “희멀건 동공으로 흐린 하늘을 센베 과자처럼 말아 올린” 여인들의 “몸부림” 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어낸다. 그러니 운명의 진실을 마주한 오이디푸스처럼 어찌 눈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멀건” 눈, “눈짓” 없는 눈, 보는 능력을 상실한 눈 - 우리의 분별이 가닿을 수 있는 한계가 바로 거기인 셈이다. 삶의 풍경, 세상의 풍경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한계 너머를 열망하는 시선, 이미 항상 병들어 있고 이미 항상 죽어 있는 ‘성모聖母’ 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시선 - 그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다음과 같은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나는 주물공장 쇠 부스러기 같은 비를 따라 돌의 늑막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지막 손님은 아니었다. 절 만 卍 자를 이마에 새긴 뱀이 따라 들어왔고, 뱀은 단춧구멍 같은 별자리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나는 것이 뱀의 고해라고 생각했지만, 뱀의 몸통은 겁에 질린 어린 양의 목을 한껏 조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주 생성의 중간보고 같은 것이었을까. 초대받지 않은 나는 돌의 배꼽을 열고 도망치려 했지만 내 몸의 절반을 뱀은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보았다면 돌에도 싹이 나는 줄 알았으리라.
우리는 이 시가 그려 보이고 있는 신화적인 장면을 시인의 세계 인식에 대한 “중간보고” 쯤 되는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순환, 그 단단한 경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사유하는 인간의 시선은 반쯤만 기적이다. 여전히 “내 몸의 절반을 뱀은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이 세상과의 화해를 갈망하는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말로 분별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끊임없는 유위변전 有爲變轉 의 텅 빈 ‘중심’ 같은 것, 불을 켜면 “고양이보다 빨리 옷장 뒤로 숨는” 어둠 같은 것, 생사를 관통하는 시간의 배후에 항상 음화로 존재하는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닐까.
시에서 시인은 사춘기 이후로 차례차례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런저런 삶의 열망과 고통 들이 모두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연기에 불과한 것들이었다고 단언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자신을 향해 부정의 칼날을 들이미는 시인의 그런 단호함은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시에 대한 열망으로 괴로워하고 혹은 희열에 젖기도 하는 ‘나’ , 그 ‘나’ 의 시에 대한 열망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고 시인은 질문하는 듯하다. 예컨대 먹고 배설하고 짝짓기하고 생산하는 일과 시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전자가 “법의 잉걸불 위” 에서 “스텝” 밟는 일이라면, 후자 또한 제가 부는 풍선 속으로 들어가려는 또 다른 맹목과 집착은 아닌가. 결국 시 또한 ‘벽-돌’ 에서 헛것을 보는, ‘벽-돌’ 에 헛것을 그려 넣는 덧없음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석천계곡에서 주워 온 돌 한가운데는 …… 기다림이 오래 깊어 헛것을 보았던가”. 사실 이 시는 벽 이미지가 돌 이미지로 바뀌었을 뿐, ‘남해 금산’ 에 실린 ‘격렬한 고통도 없이’ 와 거의 동일한 모티프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없다. 시는 가장 큰 환이다.’ 세상과 삶의 경계에서 시인이 피워 올리는 환화 幻化 가 ‘시’ 라고 한다면, 시인의 욕망은 맹목 중에서도 가장 큰 맹목, 어리석음 중에서도 가장 큰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결정적인 말-분별에 대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법이다. 편지도 우유도 휘파람도 법이다. 뱀도 사냥개도 금발머리도 법이다. 맑은 시냇물 속 백동전의 ‘100’ 자처럼 투명한 법이 아니라, 숯불 위 몸 비트는 아나고처럼 춤추는 법이다. 진흙탕 아나고가 언제 무도학원 다닌 적 있던가. 사교댄스 안 배운 우리도 법의 잉걸불 위에서라면 스텝 기차게 밟을 수 있다. 그러니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하늘 무덤 위 꽂힌 곡괭이 사슴뿔처럼 빛나고, 지하 정화조 속 시집 못 간 암퇘지 맑은 물로 흐느끼니, 잊지 못하는 자여, 잊지 못하는 자여, 이제는 잊어라.
그렇지만 또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법은 “백동전의 ‘100’ 자처럼” 투명한 실체가 아니다. “부대찌개” 속에서 맹목의 욕망에 이끌려 몸을 뒤트는 모든 것들의 생성과 소멸을 지켜보는 우리의 “눈꼬리로 스쳐간 그 무엇” , 그러나 그 “춤” 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그 무엇, ‘나’ 가 아니라면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그 무엇(“말들의 회반죽, 거기서 나 말고 누가 잘게 다져진 너희들의 혀를 찾겠는가”). 그러므로 “박제 홍방울새” 를 만드느라 “날개를 부러뜨리고, 눈알을 파내고, 내장을 까뒤비고” 난 뒤의 계면쩍음과 허탈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그릇을 생명이 그릇을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생사를 반복하듯 ‘노래’ 또한 쉼 없이 말을 바꾸어가며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결국 끊임없이 “다른 뚝배기 속에 생을 다시 끓여내는 일” 이기 때문이다.
근심하지 마라, 시방세계 어디서나 그대 이별의 제삿밥 얻어먹을 것이니, 지금은 다만 추억의 할례를 근심할 때. 불붙지 않는 밤의 석탄 속에서 생라면처럼 부서뜨려야 할 기억, 혀의 죽은 고사리와 찢긴 글자의 모래 삼키며, 그대 이별은 수탉의 되새김 위가 되고, 반야바라밀다의 학문이 된다. 근심하지 마라, 지금은 다만 추억의 씨받이를 부를 때.
애인아, 이제 흐르면서 우리 화해하자.
시인은 이제 ‘나’ 의 모든 선입견과 집착을 내려놓고 마치 처음인 듯, 삶의 풍경 하나 하나, 시간의 마디 하나 하나를 ‘있는 그대로’ 다시 바라보고자 시도한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그리고 문득 시인 앞에 던져진 한두마디 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 사유 방식은 선 禪 수행의 화두 잡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적인 세계관이기보다는 선 수행의 방법론이랄 수 있는 철저한 부정의 정신이다. 그 부정의 정신은 앞에서 “말의 배꼽” 이라는 은유를 통하여 우리가 확인한 바 있는, 말이 근본적으로 ‘매개의 형식’ 일 뿐이라는 인식, 뒤집어 말하면, 말을 매개로 하지 않는 관 觀 은 없다는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첫번째 표면적인 결과가 스스럼없는 구어체의 어법일 것이다(“동네 할매들과 아침 테니스 한판 붙으려고” , “72평 아파트 사는 승엽이 엄마” , “지금은 비엠더블유 굴리고” , “화가는 한참 쳐다보더니 쌩까버렸다” , “제 할일 칼같이 하는 아이” ) 그런 시들을 읽노라면 우리는 삶의 풍경을 제대로, 바로 보기 위한, 정신의 ‘체조’ 같은 것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체조가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몸놀림이듯이, 그 시들은 ‘시의 건강’ (결국 형용 모순이긴 하지만)을 염려하는 시인의 ‘사유의 요가’ 에 가깝다. 삶의 일정한 사태 앞에서 일상 언어의 리듬, ‘산문’ 의 리듬에 한 마디 “말의 뼈다귀” 를 박아 넣기( “말 한 마디가 척추를 곧추세운다” ), 보고 말하는 행위가 이미 분별이라면 분별의 쓸모를 오직 앞선 분별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엄격히 한정 짓기, 그럼으로써 굳어버린 사유의 관절을 비틀어 꺾기.
그러한 사유의 움직임은 때로 질문의 형태로( “어떤 은혜를 말하는가” , “넌 누구냐?” , “그러고 나면 또 뭐 할건데?” , “꽃피지 말라 하면 안 필 것도 아니잖니?” ) 또 때로는 망설임과 주저의 형태로 ( “신비라 할까” , “뭐 그런 소릴 할 수도 있겠다” ), 더 빈번하게는 금지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고 ( “진실이니 거짓이니 그런 시비는 벌이지 마라” , “고깃덩어리라 해선 안 되고” ), 풍자적인 유머와 반어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 마음 일편단심, 나는 철갑을 두른 중세기사가 아니지만, 내게는 오직 한 분, 내 가난한 테니스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일흔일곱 살 회장 할머니가 있다” , “뻐꾸기 한 마리 날아갔다니 애 많이 썼다” ). 맹목의 어리석음에게는 분별의 지혜를 말해주고, 분별의 미망에게는 “모든 것은 법” 이라고 말해주고 ……
그러나 그 부정의 변증법은 결코 합 合 에 이르지 못하는 변증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 쉼 없는 부정의 연쇄 끝에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생의 신비는 한결같이, 대립적인 요소들이 서로를 부정하면서 되비추고 되비추면서 부정하는 그런 양상으로 나타난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럴 만도 해” . “나는 …… 끊는다, …… 끊겠다는 집념의 어리석음” . “이래저래 삼십 방” ). 결국 우리의 눈은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뿌옇게 “뼈다귀 고은 국물” 처럼 다시 흐려진다.
“서로의 눈을 다시 찌를지도 몰라, 우리는 반지를 나누었다.” - 반지는 일종의 ‘사랑의 지혜’ 를 말해주는 은유일 것이다. 그 비어 있는 중심은 결코 이루어지는 법이 없는 약속과 항상 배반당하는 우리의 열망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니 남은 일은 그저 ‘제사’ 지내는 일, “제삿밥” 얻어먹는 일 이라는 지혜.
결국 이번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시적 사유의 여정을 우리는 나갔던 문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형국 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있음과 없음을 한꺼번에 말하기 위한(그래서 갈수록 말의 리듬은 빨라지고 호흡 또한 격해진다) 역설의 수사와 이미지들을 다시 만난다. 시 (61)이 두 남녀의 욕망을 통해 그려 보이는 상황처럼, 말-분별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욕망이다. 결국 역설은 이중의 긍정과 부정을 통하여, 마르이 틈새 사이로 타자를 빠져나가게 해주는 언어, 숨쉬게 해주는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별하되 또한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길 없음의 삶의 길”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
나는 너의 이름을 끊는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끊을 수 없는 것을 끊겠다는 집념의 어리석음. 내 어리석음만큼의 길이와 굵기를 가진 너의 이름. 악어가죽처럼 꺼칠꺼칠하고, 촌충처럼 마디마디 끊어지는 이름. 그러나 알고 보면, 네 이름은 네 환상이 내 환상을 끊어내는 자리. 국수 뽑는 기계처럼 여러 다발 환상이 ‘끙’ 하는 소리도 없이 내려오는 자리. 네 환상이 내 환상을 똥 ‘누는’ 자리. 만약 네가 ‘어휴, 저질’ 하고 얼굴 찡그린다면, 그냥 누는 자리. 丸樂같이, 토끼통같이 동글동글 잘 마른 너의 이름.
“끊을 수 없는 것을 끊겠다는 집념의 어리석음” - 이때, ‘끊는다’ 는 말의 함의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단호한 결별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마디마디 토막을 낸다’ 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끊을 수 없는 것을 끊겠다는 집념의 어리석음” 이라는 표현 속에 시인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① ‘너’ 는 분별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럼에도 ‘나’ 는 ‘너’ 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② ‘너’ 는 “미끄러워 잘 썰리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 의 분별은 ‘너’ 를 토막토막 끊어낸다. ③ “너의 이름” 은 “네 환상” 이 “내 환상” 을 낳는 / 무효화시키는 자리이다. ④ ‘나’ 는 “네 환상” 을 먹고 여러 다발 의 “내 환상” 을 배설한다. ⑤ 나 의 “되새김 위” 를 거쳐 나오지만, 그 환상은 ‘내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은 허기이고, 욕망일 뿐이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알록달록한’ 허기들, 삶의 풍경들을 만들어나가는 허기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리고 그 제일 앞에 오는 것이 시인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허기, 시에 대한 허기인 셈이다.
그런데 내려놓아도 이내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그 열망, 우리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을 지나갈 때를 ( “영동대교 다리 밑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 불쑥 솟아오르는 그 노래 를, 헛것이라고 내칠 수 있을까. 그런 열망을 우리는, 은유적으로, ‘깊은 오후의 열망’ 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골목 안 낙원 밥집 딸내미는 웃는 상이다. 방 안엔 오십대 후반 아줌마들의 계모임, 다단계 판매 얘기로 언성 높인다. 주방엔 가득 쌓인 조기 새끼들 굽는 마른 마늘쫑 같은 할매들. 빛 안 드는 낙원 밥집 차양에 붉은 녹 떳고, 끈끈이에 붙은 파리 떼 선풍기 바람이 즐겁다. 골목 안 낙원 밥집, 딸내미 나기 전부터 이 골목에 있었으니 주방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주방으로 여자들 자리만 옮길 뿐. 비닐 랩에 싼 찬그릇 스텐 쟁반에 이고 낙원 밥집 딸내미 배달 나간다,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끈끈이처럼 두 팔 내저으며.
“비닐 랩” 으로 싸고, “스텐” 으로 윤을 내어보아도 세월의 부식은 막을 수 없고, “선풍기 바람” 을 쐬어보아도 “끈끈이” 처럼 달라붙는 누추함은 어쩔 수 없고, 맹목의 욕망에 “언성” 을 높여 보아도 그저 “자리만” 옮겨 앉는 꼴이 되고 마는 삶. 세월 속에도 너무나 자엽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시들고 허물어져가는 삶 - 그 삶의 정경에서 묻어나는 나른한 리듬은 못내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여기 이 ‘밥집’ 이 바로 ‘낙원’ 인가. 시의 제목 밑에 인용딘 프로스트이 시구, “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잠기고, / 새벽은 한낮이 된다” 라는 묵시록적인 구절은 일단 ‘그렇다’ 고 말하는 듯하다. 다만, 그것은 오후의 정적 속에 빠져 있는 낙원이고, 자신의 쇠락 속에 일종의 음화처럼 낙원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낙원이다. 결국 그 정경에서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의 열망이고 “기다림” 일 뿐이다. 그리고 ‘나’ 의 “늙어가는 몸” 이 “내가 욕망하는 사람의 욕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 의 욕망도 그 삶의 풍경을 비껴간다.
그런 식으로 ‘나’ 의 기다림은 한없이 이어지고, ‘나’ 의 열망속에서 삶의 풍경들은 말로 바뀐다. 그러면서 일종의 범주화 과정을 겪는다. 일종의 원형적인 구조가 삶의 다양한 풍경들 속에 반복되고 있음을 시인은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일상적인 삶의 풍경들이 문득 신화나 설화 속의 풍경들과 겹쳐지면서, 동시에 어긋나기도 한다. 시 (15)는 “달 밝은 밤” 의 풍경이 떠올려주는 조화로운 모성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들지 못하는 ‘나’ 의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보고 메뚜기라 한다. ……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안타까운 ‘나’ 의 열망이 문득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이처럼 순진한 설화의 세계 속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이내 “벼랑의 붉은꽃 꺾어 달라던 水路父人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라는 탄식이 뒤를 잇는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그러므로 삶이 “절해” 처럼 막막해지는 까닭은 일상의 삶과 설화 속의 삶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또는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둘이 ‘둘’ 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이 삶’ 의 바깥은 “지도” 에 없기 때문이다. 덧없는 환 幻, 바로 그 환이 “늙어가는 나에게 빌려준 힘으로” 내가 “밀어” 보기도 하는, 그런 환.
다만 시인은 “만젤쉬땀의 시는 아내의 기억력으로 살아남았다 라는 사실에서 그나마 어떤 위안과 희망을 찾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별의 미사” 는 전해지고, “우리 어머니 해주지 않았으면 있지도 않았을” , 그렇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세상엔 쌔빌린 이야기” , 영원히 떠나가는 것을 위해 짓는 ‘옷-집’ , “복수가 차 오른 배” 를 덮는 “엷은 꽃무늬 이불” 의 가난한 역사는 계속 이어지리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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