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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좀 읽어볼까

최승자 시집 - 이 시대의 사랑

by HUSH 感나무 2024. 11. 12.

 

 

 

 

 

 

 

최승자 - 이 시대의 사랑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개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청계천 엘레지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어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 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 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곰.

 

꿈의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택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부질없는 물음

 

햇빛이 점점 남루해지는

저물녘 거리에서

먼지처럼 떠돌며

나는 본다.

 

내 그리움의 그림자들이

짓밟히며 짓밟히며

다시 일어서는 것을.

집과 거리와 나무들이

소리 없이 흔들리며

세상을 향한

내 울음의 통로를 만드는 것을.

 

꿈에서도 그리운 아버지 태양이여,

어머니이신 세상이여,

어째서 내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

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을까요?

 

( 울며 절뚝 불며 절뚝

이 거리 한 세상을 저어 가나니

가야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떨어야지 )

 

 

 

 

 

 

 

 


 

 

 

 

해설 -

 

사랑의 방법

김치수 문학평론가

 

 

시인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행복으로 노래하거나 불행으로 노래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자기 주변에 대한 사랑, 자기 시대에 대한 사랑의 방법이다. 행복으로 노래하는 시인은 삶의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불행이 없는 삶에 대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불행으로 노래하는 시인은 행복이 있는 삶에 대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기원은 사실은 시인의 이상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삶은 행복과 불행을 항상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인의 삶이란 일상적인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일상적 언어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 고유의 질서를 가지고 있고 일상적 언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의미와 내포를 지향한다.

최승자의 시는 대단히 강렬한 일상적 언어들이 서로 부딪치고 화해하는 언어의 드라마로 보인다. 여기에서 드라마란 시인이 의식의 싸움에서 앓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의 과정이다. 정신적인 병은 다른 증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증세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를 쓰는 행위는 일종의 즐거움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과의 갈등 때문에 시밖에 쓸 수 없는 자아의 인식으로 나타나는 병이다. 그러나 그 병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숙명처럼 지니고 사는 시인을 시인이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을 어느 시인은 시인의 저주받은 운명 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최승자는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공이 사라진 하늘의 뱃전

구름은 북쪽으로 흘러가고

청춘도 炳도 떠나간다

사랑도 時도 데리고

 

모두 떠나가 다오

끝끝내 해가 지지도 않는 이 땅의

꽃 피고 꽃 져도

남아도는 피의 외로움뿐

죽어서도 철천지 꿈만 남아

이 마음의 炳은 안 풀리리니

 

모두 데려가 다오

세월이여 길고 긴 함정이여

 

- 억울함, 전문

 

 

여기에서 청춘과 사랑이 동류항 同類項 으로 쓰이고 있는 반면에 이의 대칭으로서 병 炳 과 시 時 가 동류항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의 사랑 의 실패는 시인으로 하여금 모두 떠나가 다오 데려가 다오 라는 표현을 통해서 혼자서의 외로움 을 견디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것이 일종의 반어법 反語法 인 것이다. 사랑의 떠남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정신은 마음의 독 毒 이 어느 것으로도 풀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떠나가 주기를 기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사랑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아직 20대의 나이로서 세월이여 길고 긴 함정이여 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청춘 시절의 사랑 의 상처가 그만큼 큰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 시인에게 있어서 사랑 이란 무엇인가?

최승자의 시에서 사랑 을 다룬 시들이 있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 사랑하는 손, 전문

 

 

종기처럼 나의 사랑은 곪아

이제는 터지려 하네.

메스를 든 당신들.

그 칼 그림자를 피해 내 사랑은

뒷전으로만 맴돌다가

이제는 어둠 속으로 숨어

종기처럼 문둥병처럼

짓물러 터지려 하네.

 

- 이제 나의 사랑은, 전문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 여자들과 사내들, 부분

 

 

① 에서의 사랑은 대상과 함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전부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가여운 안식 가여운 평화 로서의 사랑이어서 열 손가락에 의해서만 만나는 흡족하지 못한 것이다. 이 미흡한 사랑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존재의 쓸쓸함 이지만, 이러한 사랑이 ② 에 와서는 뒷전으로만 맴돌어둠 속으로 숨어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사랑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종기처럼 안에서 곪게 되는 터부가 된다. 이처럼 터부와 같은 성질을 띤 사랑은 언제나 칼 그림자 의 위협 속에서 은밀한 가운데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그 위협 속에서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곪아 터질 것을 예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감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 시인은 자신의 삶을 저주받은 운명 처럼 괴로워하고 사랑의 다른 표현인 증오의 비밀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 사랑의 순간 뒤에 찾아오는 이별을 허기진 듯이 덤벼드는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라는 단정을 내린다. 그것은 이별의 아픔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불가능을 겪은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실패한 사랑의 경험은 범속한 일상성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인의 충만된 의식에 의해 이룩된다.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어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 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 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곰.

꿈의 쓰리기 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 청계천 엘레지, 전문

 

 

여기에서 시인은 지금의 일상적 생활 이전에 있었던 의식의 상태를 자유 로 비유하면서 자신을 사무실 안의 실내 장식인 베니어판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지하에 흐르고 있는 청계천처럼 자아의 내면에 허망 과 같은 공허가 감추어져 있는 자아를 의식하게 되고, 젊은 시절에 드나들던 헌책방, 싸구려 밥집과 술집들이 자유의 추억으로서만 존재할 뿐 지금은 그 보잘것없는 추억의 장소들이 자신의 의식과 유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일상적 자아는 옛날의 실현되지 않은 꿈들이 버려져 있는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되지만 떠나려고 하면서도 주위만 맴돌 뿐 항상 되돌아오는 슬픈 운명을 되풀이한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일상적 자아 속에 충족되지 않은 공백을 의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상적 편안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에 대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자아의 내면을 관찰하고자 하는 의식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은 이 시인에게서 거의 운명론적 불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아무의 제가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에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천성 天性 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모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 자화상, 전문

 

 

비교적 초기작으로 보이는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의 상징인 뱀의 슬픈 운명(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에요 )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고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기어 다니는 운명(어둠)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식의 불행 때문에 일상적인 행복과는 상관없이 태어난(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 자아 속에서 슬픔의 독毒이 발효하기를 기다리는데, 바로 그 과정이 시時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아와 대상, 자아와 일상, 자아와 상황과의 이 숙명적인 괴리의 인식은 따라서 시인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관계를 부인하게 만든다.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고 하는 부정은 물로이거니와 심지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혈연관계마저도 부인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일찌기 나는) 고 하는 것은 그러나 사실은 일상적 관계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부재 不在 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 하는 자신의 부재너당신그대, 행복/너, 당신, 그대, 사랑 처럼 일상적인 언어 속에 루머 로서만 존재하는 자아의 인식이며 따라서 부재 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철저한 부정은 사실은 철저한 긍정의 바람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고 하는 끝없는 부정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행해진 부정이라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낙관주의의 한 표현이고 자신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관주의의 한 표현이라면 이 두 가지는 방법의 차이가 있는 동일한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후자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이상주의는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며 현실과는 다른 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걸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 나의 時가 되고 싶지 않은 時, 전문

 

 

욕망과 의지의 표현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시는 그러한 괴리를 극복하는 데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시인의 비극적 운명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시 정신이 썩을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의식을 드러내준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시는 이 시인의 시론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사라으이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올여름의 인생 공부, 부분

 

 

따라서 이 시인의 사랑은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고, 실패한 것이면서 성공한 것이고, 절망이면서 극복인 것이고 죽음이면서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