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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좀 읽어볼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 형상시집

by HUSH 感나무 2024. 12. 3.

 

 

 

 

릴케와 루 살로메

 

 

 

 


 

 

고독

 

고독은 비와 같은 것.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밀려오고

멀리 호젓한 벌판으로부터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비로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내린다.

 

골목이 저마다 아침을 향하고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육신들이

절망과 슬픔에 잠겨 헤어지며

혹은 서로 싫은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그러한 뒤엉킨 시간에 비로 내린다.

 

그때 냇물과 더불어 고독은 흐른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늘을 해시계 위에 내리시고

별에는 바람을 일게 하여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을 살찌게 명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남쪽의 날을 이틀만 더 내리시어

무르익게 하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해 주십시오.

 

이제 집이 없는 자는 집을 짓지 못합니다.

혼자인 사람은 또 그렇게 오래 홀로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책을 읽거나,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의 마지막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만물의 변화가 보인다.

무엇인가 우뚝 서서 몸짓을 하며

없애고 또 아픔을 준다.

 

시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모든 정원들.

샛노란 잎새들이 차차 짙게

조락凋落에로 물든다.

내가 걸어온 아득한 길.

 

이제 빈 뜰에서

가로수 길을 바라보면

먼 바다에까지 이어 닫는

음울하고 무거운

차디찬 하늘이 보인다.

 

 

* 조락 凋落
초목의 잎 따위가 시들어 떨어짐
차차 쇠하여 보잘것없이 됨

 

 

 


 

 

 

진보

 

이제 드넓은 해안을 향한 듯

다시금 내 깊은 생명이 요동한다.

사물들이 차차 다정히 다가오고

영상마다 더 명료히 떠오른다.

이름 없는 것에 더욱 믿음이 가나니,

나는 새와 같이 나의 감각을 다하여

바람 부는 하늘에 날아 닿고

물고기 등에 탄 듯 나의 감정은

늪 속에 부서지는 하룻날에 잠긴다.

 

 

 


 

 

 

예감

 

하나의 깃발처럼 먼 원경遠景에 에워싸인다.

아래 있는 사물들은 아직 조용한데

나는 닥쳐올 바람을 예감하고 또 살아야 한다.

문이 가만히 닫히고 난로엔 적막이 깃든다.

유리창도 아직 흔들리지 않는다. 소복이 쌓여 있는 먼지.

 

순간 나에겐 폭풍이 오고 어느새 바다처럼 일렁인다.

나는 몸을 펴거나, 내 속으로 빠져들거나

또는 내던지며 혼자

큰 폭풍에 휩싸인다.

 

 

 


 

 

 

고아의 노래

 

나는 아무도 아니고, 또 아무도 아닐 테지요.

존재하기에는 너무 작고,

어쩌면 후에도 그러하리라.

 

어머니들이여, 아버지들이여,

날 가엾이 여겨 주세요.

 

보살펴 준 보람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날 거둬들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내일은 너무 늦을 테니까요.

 

나에게 있는 것은 이 옷 한 벌뿐,

오래지 않아 닳고 바래겠지만

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어쩌면 신 앞에서도 언제까지나 -

 

내가 가진 건 한 줌의 이 머리칼뿐,

(언제나 변하지 않았던 것)

전에는 어떤 사람에게 더없이 귀중했지요.

 

이제 그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대하여

 

저승의 신을 감동시킨 오르페우스와 같은 꿈을 꾸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 또한 그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리렠가 파리 생활을 하며 절망과 고독에 빠져 있던 20대 후반 쓰기 시작해 1910년 출간한 일기체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덴마크 출신의 28살 청년 말테로, 릴케와 같은 시인이다.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내적 고민을 반영한 고백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릴케는 현실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녹여 내였다.

 

릴케 문학의 정점은 1923년 출간된 ‘두이노의 비가’ 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이다. ‘두이노의 비가’ 는 릴케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명인 마리 탁시스 후작 부인이 제공한 ‘두이노 성’ 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시이다. 이 시기 그는 6년간 매달렸던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고 탈진하여 극도의 창작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때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두이노 성에 머물며 기운을 회복하고, 혼자만의 고독에 잠겨 있던 중 불현듯 솟아오른 영감으로 제1비가를 순식간에 쓰게 되었다고 한다. 릴케는 마리 탁시스 후작 부인과 16년간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제1비가’ 가 탄생한 과정도 그가 탁시스 후작 부인에게 이야기하였던 사실이다.

 

이후 두이노의 비가 10편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징집 등의 이유 때문에 10년 뒤인 1922년에야 완성이 된다. 19살로 요절한 무용수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를 위해 쓴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이다. 시인은 스스로, 몸이 갈가리 찢겼으면서도 결코 죽지 않는 오르페우스가 되어 에우리디케가 된 크노프를 향한 구원의 노래를 불렀다. 삶에 발을 둔 지하 세계의 방문객 오르페우스가 저승의 신 하데스를 감동시켰듯, 릴케는 그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많은 여인들과의 관계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결혼 생활

 

릴케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여인들과의 관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루 살로메뿐 아니라, 피아니스트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출판업자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화가 루 알버트 라사트르 등은 릴케와의 관계를 고백하는 회상록을 남겼다. 루 살로메의 하얀 길 위의 릴케 , 루 라사르트의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 는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있다.

 

그 외에 릴케를 잠깐 스쳐간 여인들도 꽤 있는데, 이런 관계는 당시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하던 일부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된다. 릴케의 특별한 여인 루 살로메 역시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릴케는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1901년 4월 28일 혼인한 이후에도 자유롭게 떠도는 삶을 버리지 못했다. 결혼하고 그해 12월 12일 딸 루트를 낳은 무렵만 해도 릴케는 보헤미안의 생활을 버리고 한곳에 정착하고자 노력한 듯 보이나 이 시간은 길게 가지 않는다.

 

루 살로메가 남긴 결혼 생활 직후의 릴케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는 명목으로 식사마저 창을 통해 들여 서재에서 먹는 등 일에 몰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은 자신의 자유와 방랑에 대한 본심을 없애고자 한 극단적 행위 아니었을까. 결혼하고 불과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릴케의 생활 방식은 이전과 비슷해졌고, 가족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생애의 마지막도 아름다운 여인과 장미와 함께였다

 

시인의 마지막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시적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경우가 흔한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린 일화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1926년 9월 릴케의 작품을 열렬히 애독하며 그를 흠모한 니메트 엘루이의 방문 시, 그녀를 위해 장미꽃 몇 송이를 따 주다가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다친 것이다. 하지만 릴케는 1923년 백혈병이 발병한 상태로, 그로 인해 장미 가시에 찔렸을 때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장미 가시가 죽음의 원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여인에게 장미를 꺾어 주려다 죽음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신화로 남을 만한 시인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26년 12월 29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듬해 1월 2일 스위스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된 릴케의 묘비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다음의 시구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오, 순순한 모순의 꽃,

꽃잎과 꽃잎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눈꺼풀 같구나.

이제는 누구의 꿈도 아닌 가엾고 영원한 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