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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좀 읽어볼까

최승자 시집 - 내 무덤, 푸르고

by HUSH 感나무 2024. 12. 12.

 

 

 

 

 

 

 

 

 


 

 

 

 

迷妄 혹은 備忘 4

 

넘치는 현존의 거리,

그만큼 또한 넘치는 부재적 실존들이여,

그 모든 부재들 중의 부재로서

나 피어났네.

검은 독버섯처럼.

 

뛰기 싫어 내 인생은 지각했고

걷기 싫어 내 인생은 불참했지.

 

오 그 모든 빛나는 -

내가 불참했던,

오 그 모든 빛나는 -

내가 부재했던,

그 자리들이여,

이제 내가 내 부재의 그림자로서

전 세계 위에 뻗어 누우려 하네.

 

 

 

 

 

 

 

 


 

 

 

 

迷妄 혹은 備忘 8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迷妄 혹은 備忘 12

 

또 깜깜한 하루

귀멀고 눈멀은.

 

내 삶의 생존 증명서는

이 먼지들의 끝없는 필적

내가 잠든 동안에도 먼지들은

내 벌려진 원고 혹은 노트 위에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을 써놓고

 

이 생존의 먼지 이 생존의 오물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침내 내 화려한 종말을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먼지에 뒤덮인 원고지 속의 혹은 노트 속의

먼 길을 걸어 나는 기필코 그대들에게,

비로소 최후로 닿고 싶다.

 

늘 언제나 절박한 현재 시각 현재 상황인

밤의 멜로디,

혹은 밥의 멜로디 속에서.

 

 

 

 

 

 

 


 

 

 

중구난방이다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을 휘저으며 물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참, 소나 나나

 

댓 마리의 소가 하루 종일 씹고 있다.

먹이가 없는데도 무진장 씹고 있다.

하릴없이 창가에 턱 괴고 앉아

나도 정처없이 씹는다.

소들이 반추로써 풀이하는 세계를

나도 열심히 씹어 풀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반추하면서

 

가엾기도 해라.

되씹기는 게으른 자들의

그림자 밟기 놀이 아니겠는가.

참, 소나 나나.

 

 

 

 


 

 

 

 

내 수의를

 

내 수의를 한올 한올 짜고 있는

깊은 밤의 빗소리.

 

내가 이승에서 어질러놓은 자리,

파란만장한 자리

없었을 듯, 없었을 듯, 덮어주고 있구나.

 

점점 더 드넓어지는

이 일대의 물바다,

그 위에 이제 새로이 구중궁궐

깊은 잠의 이불을 펴리라.

 

 

 

 

 

 

 

 


 

 

 

산화 酸化

 

이 도시가 나를 산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벽에 들러붙어

천천히 나를 녹슬어간다.

 

거대한 철판 같은 도시의

환한 어둠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골목을 돌아 들어가고

 

어느 싸구려 여인숙

객 客 은 이미 잠들고

티브이 화면만이

주인 없는 셀룰로이드의 기억들을

저 혼자 지지거리고 있다.

 

(이제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의 말

 

시집을 엮으면서 다시 읽어보자니,

이 시들이 너무도 뒤늦고 뒤처진, 그리고

너무도 낡고 늙은 시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뒤늦게,

뒤처져 길 떠나는 이 낡고 늙은 시들이

제 힘으로 제 갈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는지 걱정스럽다.

 

- 1993년 11월, 최승자

 

 

마은은 오랫동안 病中이었다.

마음은 자리 깔고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마음은 병 하고만 놀았다.

 

詩 혹은 詩 쓰기에 대해 이제까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도믿지도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나는 바라고, 믿고 싶다.시 혹은 시쓰기가 내 마음을 病席에서 일으켜 세워줄 것을.

 

 

 


 

 

 

  해설  

세기말의 비망록

 

이광호 문학평론가

 

 

 

세계는 죽음이다. 그러나 세계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죽음이 아니다.

- 김현, 게워냄과 피어남 : 최승자

 

최승자의 연작 미망 迷妄 혹은 비망 備忘 은 시간과의 싸움의 기록이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연관되는 인간 존재의 무력감과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의 한 궁극적인 형태이다. 최승자의 시는 그 절망과의 대면이다. 이 연작의 제목을 이루는 미망 과 비망’ 은 모두 망각에 대한 정신의 태도를 보여준다. 아직 잊지 않음 과 잊음을 대비함 은 모두 잊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잊음은 인간에게 가하는 시간의 전횡이다. 시인이 시간과 싸우는 것은 망각과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세계에서 그 싸움은 일방적이다. 우리는 망각과 싸워 이길 수 없으며, 설사 강인한 기억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시간이 가하는 최후의 횡포 - 죽음을 견뎌낼 수 없다. 시간과의 싸움은 결국 죽음과의 맞섬이며 迷妄 혹은 備忘  아직 죽지 않음죽음을 대비함 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지평 위에서 망각과 소멸은 기억과 실존에 대해 언제나 존재론적 우위를 점유한다. 그만큼 시간과의 싸움은 수세적인 싸움이다. 하지만 시인의 싸움은 물리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패배가 역설적으로 빛나는 시적 승리를 보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의 세계 안에서 그 싸움의 의미를 따라가야 한다. 시간에 대한 시인의 사유는 이 시집에서 자주 길의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어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간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 迷妄 혹은 備忘 14, 부분

 

 

최승자의 은 삶이 선택할 수 있는 실천적인 가능성에 관련되어 있지도 않고, 삶을 규정하는 저항할 수 없는 숙명도 아니다. 최승자의 길은 억압과 해방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길이 단지 존재자를 옥죄는 거부할 수 없는 폭력일 때 그 길은 억압이지만, 그 속에서 삶의 역사적 가능성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실존의 터전이라는 맥락에서 해방의 자리이다. 그런데 최승자의 길은 실존적 선택의 문제보다는 시간의 문제에 얽혀 있다. 길의 선택적 방향성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에 대한 시적 자아의 사유의 관점과 정서적 태도가 중요하다. 최승자의 길은 시간의 자기 운행 그 자체이며, 우연으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 이며, 불변의 세월 이다. 길은 미망비망 의 상황 조건을 이룬다. 시적 자아는 그 길을 바라보면서 그 길에 온전하게 몸을 싣지 못하는 존재이다. 길은 영원하지만 나는 유한하고, 그 길가에서 나는 단지 추억으로만 남는다. 시적 자아는 시간에 휩쓸려 가는 유한한 생존을 확인하면서, 과거를 반추하고 진정한 삶의 근거를 고통스럽게 질문한다. 길에 대한 반성적 인식은 그 길의 폭력에 대한 절망을 부각시켜주며, 삶의 덧없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자기 인식을 통해 시적 자아는 이 세계 속에 맹목적으로 몸담고 있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게 된다.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

迷妄 혹은 備忘 1, 부분

 

 

그러나 언제나 삼켜지고

뱉어져나오는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迷妄 혹은 備忘 1, 부분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오물의 이미지는 그의 초기시의 위악적 포즈와 파괴적인 에너지를 연상시킨다. 세월이 내게 똥 을 먹인다는 진술과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 라는 진술은 시간의 폭력성과 세계의 부정성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이때 오물은 두 가지의 의미 맥락을 동시에 갖게 된다. 똥은 시간이 존재자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에 대한 상징이면서, 그 시간의 폭력을 당한 시적 자아가 세계 전체를 향해 다시 내던지는 저주의 말이다. 시적 자아는 삶과 목숨 자체를 오물로 규정하면서, 시간이 던진 오물을 시간에게 되던진다. 다시 말하면 오물은 삶의 비참 · 부조리 · 불안 · 절망 · 소외 · 혼돈의 의미 내용을 갖는 동시에, 그러한 상황을 말의 주술적 힘으로 돌파하려는 실존의 언어적 무기이다. 시적 자아는 삶 자체를 오물로 매도함으로써 시간의 폭력성에 대항한다. 이렇게 하여 시간의 똥이 가하는 희극적인 폭력은 세계에 대한 시적 자아의 풍자의 칼날과 겹쳐진다. 똥의 이미지는 버림받은 실존에 대한 자학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배반과 부정의 말인 것이다.

 

 

어떻게 잠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인지.

이제 개들은 머뭇거리며 골목 안으로 꼬리를 숨기고

침묵은 오래도록 홀로 신음할 것이다.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두렵다.

검은 굴속에서 꿈은 또 물고 늘어질 것이다.

꿈은 물어뜯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악몽의 환각이,

두려운 생시의 파편들이 번갯불처럼 번쩍일 것이다.

 

- 迷妄 혹은 備忘 5, 부분

 

 

내 수의를 한올 한올 짜고 있는

깊은 밤의 빗소리.

 

내가 이승에서 어질러놓은 자리.

파란만장한 자리

없었을 듯, 없었을 듯, 덮어주고 있구나.

 

- 내 수의를, 부분

 

 

어둠의 시간은 시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더욱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잠과 어둠이야말로 세계의 공포를 공포 그대로 볼 수 있게 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초침 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한다. 어둠의 공간은 시적 자아로 하여금 텅 비고 고독한 존재로 돌아가 세계의 캄캄한 부재를 대면하도록 한다. 시적 자아는 헐벗은 마음으로 삶의 표류를 목격한다. 어둠은 불안과 공포의 얼굴을 보여주며 죽음의 음악을 연주한다. 어둠은 언젠가는 닥칠 죽음의 시간을 미리 경험하도록 만들어 죽음의 인력 인력 引力 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어둠의 공간은 경험 세계와 절연된 환상의 공간이 아니다. 그의 악몽깊은 밤의 빗소리 는 경험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공간은 다시 말하면 생시의 파편”  이승에서 저질러놓은 자리 를 되돌아보게 하는 공간이다. 꿈과 어둠의 공간은 우리를 현실의 너머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기보다는 삶의 불우와 비참과 자기 한계를 재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시적 자아가 그 속에서 체험하는 것은 어떤 근원적인 고독이다.

 

 

고독이 창처럼 나를 찌르러 올 때

나는 무슨 방패를 집어 들어야 하나.

오 내 방패는 어디 있나.

그냥 온몸 온 정신이 방팽인 것을.

 

어느 날 마침내 죽음을 동반한 고독이 찾아올 때까지는,

영원 불멸, 신생 부활의 방패인 것을.

 

- 迷妄 혹은 備忘 13, 부분

 

 

고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여러가지 존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그것들과의 연관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고독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시인이 느끼는 고독은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개별자의 비극적 자기 인식이다. 시인은 고독이라는 에 대해 온몸 온 정신 의 방패로 막는다. 이 수세적인 방어는 고독을 돌파하거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태도이기보다는 그것을 대면하고 견뎌내려는 자세이다. 시인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독에 맞선다. (죽음이란 가장 큰 고독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것처럼. 그것은 고독이라는 궁극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고독과의 싸움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독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알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의 고독은 보편적인 인간 정서의 한 드러냄이면서, 삶에 대한 실존적 물음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독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 중구난방이다, 부분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인 세계는 또 다른 문맥에서 시인의 고독을 조건 짓는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건강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사물화된다. 시인은 접속사들이 무의미 해진 세계, 말과 말 사이의 관계가 타락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말이란 진정한 소통의 관계를 이룰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할 때, 말의 타락은 고독의 사회적 의미를 시사해준다. 말과 말의 관계가 타락한 시대는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관계의 타락은 관계 자체가 억압받던 시대보다 더욱 절망적이다. 말 자체의 타락은 말의 억압보다 더욱 두렵다. 그렇다면, 시인의 고독이 이러한 사회적 의미를 동반한 것이라면, 그 고독의 한 조건이었던 무자비한 시간 또한 자본주의적 시간이 아니었을까? 자본주의적 시간이 아니었을까? 자본주의적 시간은, 그 물리적인 시간이 포괄적인 세계적 시간으로서의 역사적 시간, 우주적 시간과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실존을 앞지르고 초월성의 계기를 남겨놓지 않는 속도의 폭력이다. 이때 실존에 대한 자본주의적 시간의 우위는 자본주의적 일상성과 산문성의 승리를 증거한다.

 

 

곳곳에서 넘쳐나는 저 자본 동물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인간들이

자본과科 파충류로 변해가는 것을,

오 내 팔뚝에 뱀의 살 무늬가 새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이 슬픔.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

 

(나에게 뽀스또 모단의 방식을 가르쳐다오,

나는 왜 이렇게 정통적으로밖에 얘기할 수가 없는지.)

 

- 자본존, 부분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이러한 야유와 풍자는 자본주의적 삶의 비본래성을 거절하는 것이다. 자본의 세계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시인으로 하여금 뽀스또 모단의 방식 으로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시인은 이 자본의 세계에 편승하려는 어떠한 유혹도 거부한 채, 그것을 야유하는 정신적 염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사물화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외향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보다는 개인 단자의 내면 안에 침잠해 들어간다. 최승자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를 폐절하려는 집단적 움직임을 형상화하거나, 그 자본의 세계에 몸을 담고 그 자본의 문법을 통해 새로운 패러디의 전략을 만들어보려는 경향들을 거절하고, 비극적 실존의 주관성에 집착하면서 어두운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내적 독백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비극적 실존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대개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현실을 넘어서려는 치열한 열망을 그 자체로 보여주는 비극적 낭만주의의 길이다.

 

 

나는 개종하고 싶다.

 

커다란 수족관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

전기 장치로 공급되는

산소와 미네랄과 또 무엇과 무엇과

정부와 국가와 민족과 글로벌이…… 있고

그 안에 또 어떤 물고기들이

벌이는 걸프전이 있고……

이 하염없는, 미지근한 수족관에서

나를 바다로 이주시켜다오.

 

- 不岸發 3, 부분

 

 

하지만 커다란 수족관 의 세계로부터의 이주 와 개종 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을 커다란 수족관 으로 규정하는 시인의  세계 인식이며, 지금 - 여기의 삶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거부가 가능한 역사적 전망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거기서 투철한 부정의 정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러한 탈출의 욕망은 비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탈출에의 절규를 토해내기보다는 그 개인 단자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의 복원을 노래하게 될 때, 우리는 최승자 시의 보기 드문 온기 溫氣 를 느끼게 된다.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전문

 

 

이 시를 최승자 시 전체의 결론으로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의 방식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보여준 최승자 시의 맥락에서, 그것은 도저한 고독과 천형과도 같은 고립을 돌파할 희망의 한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최승자의 시적 자아는 대중의 허위 의식을 철저히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대중으로서의 타자와 자신을 분명히 구별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의식은 타자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드러내는 선민주의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의 건강한 관계가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진정한 사랑의 방법론에 대한 탐문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상처와 배반과 이별의 노래는 이 따뜻한 사랑 노래를 통해 극복될 수 있을까?

 

최승자와 같은 자리에 있던 80년대 시의 전사들은 이제 동양적인 일원론의 세계로 회귀하거나 탈현대적 일상성의 세계를 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자는 80년대 초반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시인은 아직도 자본주의적 질서에 물들어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는 부정성의 언어를 밀고 나감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오염을 견뎌내려는 고독한 자의식에 붙들려 있다. 그러므로 최승자의 시는 어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 세계의 사물화 과정이라는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나온 자아의 불안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을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환원하는 주관성에의 집착과 추상적 비전만을 보여줄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의 시에서 일종의 동어 반복을 볼 것이며, 단지 환멸의 심리적 구조와 미약하고 허술한 희망의 포즈만을 볼 것이다. 또한 뽀스또 모단 주의자들에게 그의 시는 지나치게 80년대적인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어쩌면 최승자 초기시의 격렬한 충격과 기습적인 감동은 퇴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최승자 시의 팽팽한 긴장감의 역사적 맥락을 구성했던 사회 구조의 변화와 연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학의 부정적 사유, 반성적 사유의 깊이와 유연성을 보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최승자의 시는 아직도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망각과 무관심은 우리를 자본주의적인 삶에 대한 수락으로 이끈다고 할 때, 자본주의적 시간과의 싸움을 통해 그 비극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그 싸움은 자주 허무주의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며, 자기 파괴의 욕망에 연루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경악과 음울과 불안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비극이 구조를 묘파하고 그 안에서 견디는 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은, 삶의 질적 차원에 대한 우리들의 잠든 의식을 깨운다. 더욱이 최승자의 시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문체는 주체의 개별성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외로운 의지로 읽을 수 있다. 절망과 고독과 악몽을 동반한 시인의 환원 불가능한 자기 세계는 저주받은 개성의 빛을 발한다. 그것은 삶의 파편화와 고립과 사물화에 대한 저항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의 문학적 내면화 과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최승자 시의 읽기를 통해 사물화의 과정을 뒤집어 볼 수 있으며, 모순된 현실의 자리를 재인식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고귀한 점은 그것이 사유의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며,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최승자 시를 이 불길한 세기말을 온몸 온 정신 으로 살아낸, 투철한 영혼의 비망록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승자의 이 섬뜩하게 아름다운 시는, 죽음과의 대면을 통해 죽음에 접근하고 죽음을 넘어서려는, 죽음을 살면서 시쓰기를 통해 그 죽음을 견디고 무한을 꿈꾸는, 키 작은 시인의 해바라기 같은 커다란 눈망울 을 그려보게 만든다.

 

 

죽은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칼이

무덤 속에서 조금은 더 자라듯,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누워 있는 흐린 구름장들을 바라보면서

키 작은 여자는 낮은 창 곁에서

하루하루를 살해한다.

 

현세는 너무 비좁은 감옥이라고,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지도를 그리겠다고,

흐린 구름들이 엎어질 듯

코를 박고 있는 낮은 창 곁에서

키 작은 여자는 하루하루를 삭제시킨다.

 

오직 한 개씩의 커다란 눈망울만을 달고 흔들리는

해바라기들, 해바라기 들판의 무한을 꿈꾸면서.

 

- 不岸發 5, 부분